<colbgcolor=#0047a0> 출생 | 1883년 10월 6일 |
경기도 양주군 | |
사망 | 1937년 7월 28일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위패)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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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며 중국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고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지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3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난 구연흠은 1901년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시종원 우시어, 내부, 지방제도 조사원, 내부 주사 등을 맡았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1920년대 사회운동에 뛰어든 그는 1922년 무산자동맹회, 1923년 신상연구회에 가입하여 민족을 계몽시키고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924년 동아일보의 지방부장을 지냈고, 1925년에는 시대일보의 영업국장과 논설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신문기자 단체인 무명회에도 가입해 활동하였다. 이 시기 화요회 그룹의 관계단체인 불꽃사의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서울청년회계와의 세력경쟁 과정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1] 1925년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 겸 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3월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될만큼 당의 핵심인사가 되었다.[독립유공자공훈록]
192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모플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당시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가입하였고, 1927년 9월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쑤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대만, 일본 등의 반제국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를 결성해 총무부 비서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총무부장으로 부임해 기관지인 '앞으로'를 발행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선전하기 위해 상해 각 단체 연합회를 창설하고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를 이끌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시위를 주도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1930년 상하이에서 3.1운동 기념시위, 6.10 만세운동 기념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그 해 9월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5년 12월 만기 출옥하였고 1938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