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이 '국민회'1946년 결성된 보수정당에 대한 내용은에 대한 내용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국민회(國民會)는 1945년 9월에 경상남도 창원시의 마산 마산 창동 공락관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하고 결성된 우익단체이다. 이 단체는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였다. 초기 이들은 1945년 8월 17일에 결성된 마산지역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회원들 중 하나였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었다. 이 단체는 마산지역의 치안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는데 치안대장 등의 핵심요직을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독점하자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탈퇴하는 사건이 일어나 한민회라는 조직을 만들게 된다.[1] 한민회는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이후 국민회(國民會)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2. 1950년: 6.25 전쟁 이후
2.1.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상술한 것과 같이 국민회는 마산, 창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역 단체이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마산, 창원은 물론이고 수많은 지역에서 당시 특무대, 경찰 등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고있다.[2][3] 6.25 전쟁 당시 우익단체들은 준경찰의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초법적인 공권력을 사용하였다.한국전쟁 당시 경남 마산지역의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학살에 관여한 군, 경, 우익단체 간부들[4][5] | ||
이름 | 소속/직위 | 기타 |
최철용 | 경남경찰국장(경무관) | 임기 1949년 6월 13일 ~ 1950년 4월 26일/국민회(한민회) 초대 선전부장 |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 ||
하동 경철서장/부산 경찰서장 | ||
조영운 | 마산경찰서장 | 1949년 12월 7일(부림극장에서 보도연맹 결성 당시) |
정도환 | 마산경찰서 사찰계장 | |
강상봉 | 마산경찰서 형사 | 1950년 보도연맹원 학살에 개입 후 1952년 대한민국 방위 포장 받음 |
1965년 진주 해륙물산(주) 대표이사/서부연탄공업사 대표 | ||
경남냉동주식회사 대표 | ||
1981년 마산의 경남에너지(주) 사장 | ||
1985년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 ||
1987년 재향경우회[6] 경남지부 회장 | ||
노장현 | 마산경찰서 형사 | |
이유성 | 육군/마산지구 위무사령관 | 대한민국 육군 중령 |
이유성 | 해군/마산지구 정보대장 | 대한민국 해군 대위 |
허태영 |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7] 마산파견대장 | |
이우정 |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 |
이진영 |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특무계장 | |
노양환 |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 육군 상사 |
손문기 | 국민회(國民會) 마산 지부장 | 국민회(한민회) 초대 부회장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 |
1946년 12월 개원한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 ||
김순정 | 국민회(國民會) 마산 부지부장 | 보도연맹 보도부장 |
유석형 | 대한청년단 단장 |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 ||
1952년 김종신의 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 ||
1952년 4월 25일 1952년 지방선거 대한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 마산시의원 | ||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1957년 4월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 ||
1957년 국민회(國民會) 지부장 | ||
강태호 | 비상시국대책위원회(준경찰기구) 비상대책위원회장 | 국민회(한민회) 초대 사업부장 |
초기 마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산업부장 | ||
김종신 |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 /민보단 고문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 |
조선독립촉진마산협의회 부의장 | ||
자유당 창당에 적극 참여/초대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 ||
마산시의원/마산시장/제3대 국회의원 | ||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자유민주당[8] 지구당 위원장 | ||
민주공화당(1963년) 중앙상임위원/신문사 사장/방송사 사장 | ||
문삼찬 |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 | 김종신의 국민회(國民會) 사업부장직을 넘겨 받음 |
1948년 민족청년단 경남지부 마산시단장 | ||
마산의 대흥주조장(大興酒造場) 양조업자/백광소주 사장 | ||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 ||
1955년 2월 결성된 마산문화인협의회(문협)의 2대 의장/3대 회장 | ||
1957년 마산체육회장 | ||
1960년 3.15 부정선거 시기 김종신과 같이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 ||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우당(民友黨)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 ||
최종적으로 민주공화당(1963년)에 합류 |
3. 주요인물과 회원
3.1. 초기 조직 구성
직위 | 이름 | 기타 |
초대회장 | 민영학 | 마산 미군정사령관 데일리의 고문 |
부회장 | 손문기 |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1946년 12월 개원한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
총무부장 | 조병기 | 국민회와 자유당의 총무부장[9] |
조직부장 | 유석형 | 광복청년단,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
선전부장 | 최철용 | 광복청년단,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
사업부장 | 강태호 | |
조사부장 | 이일래 | |
부녀부장 | 신말례 |
4. 관련 문서
디지털창원문화대전-국민회(國民會)PDF-1950년 마산지역 민간인학살 자료
마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명단 찾았다-1681명 중 일부 60년 <마산매일신문>에 수록
'3개의 국민회'에 대한 분류법
5. 관련 항목
[1] 원래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사이가 좋으면서도 나쁘다. 특히 민족주의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내전의 예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적인 색채가 있는 편이었다.[2]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3] 국민회-민간인 학살 근거[4]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5]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721&cid=40942&categoryId=34509[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51&cid=46624&categoryId=46624[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80&cid=46626&categoryId=46626[9] 일제강점기 당시 흑우연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