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권상창(權相昶) |
자 | 명서(明叙)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904년[2] 2월 25일 |
경상북도 안동군 내성면 유곡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3] | |
사망 | 1943년 5월 17일 |
경상북도 상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위패 8판 01면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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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차응은 1904년 2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 내성면(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서 아버지 권맹연(權孟淵)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하림(金夏林)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24년 3월 대성학원(大成學院) 을과(乙科)를 수료하고, 1927년에 봉화청년회(奉化靑年會)와 봉화프롤레타리아운동자동맹에 가입하였다. 1928년 3월 10일 봉화청년동맹 제1회 정기대회에서 서무재정부장을 맡았으며, 5월 10일 봉화청년동맹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문화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8월경 신간회 봉화지회 상무간사, 10월경 봉화청년동맹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5월 하순, 황윤경(黃潤慶)·권우섭(權宇燮)·김창희(金昶熙) 등과 함께,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酉谷里) 재궁곡(齋宮谷:재궁골)에 모여 황윤경의 주창으로 봉화군 내에 사상운동을 지도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우선 농촌 청년을 규합하여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부서로는 농민부·반제부·청년부·연락부로 나누고, 청년부에 별도의 반제국동맹을 두었다. 권차응은 청년부 책임자로서 청년회 조직 및 지도를 맡았다.
1932년 7월 19일, 영주·봉화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관련 인사 약 80여 명이 체포되었다. 권차응을 포함하여 황윤경·권우섭·김창희 등 12명은 근 10개월 동안 예심 판사의 취조를 받고 1933년 4월 1일 공판에 회부되었다. 권차응은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상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5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권차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