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문백(文伯)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1년[2] 1월 13일[3] |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한천리 (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 | |
사망 | 1930년 10월 28일 |
만주 | |
묘소 |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산하이관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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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권명상은 막내 숙부이며, 구한말 온건개화파로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을 지낸 어윤중은 외조부이다.
2. 생애
권희목은 1891년 1월 13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한천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권도상(權道相)과 어머니 함종 어씨(咸從 魚氏) 어윤중의 장녀 사이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조부 권숙(權潚)은 1882년(고종 19) 별시 제2회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종4품)에 올랐으나, 1895년 2월 유인석 의진에 체포되어 같은 달 15일 친일개화파라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졌다. 아버지 권도상(權道相)은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75위로 입격하여 구한말 봉화군수(奉化郡守)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충청북도 제2부 및 제3부의 도참사를 지내기도 했다. 첫째 작은아버지 권보상(權輔相)은 1894년(고종 3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27위로 입격하였고 한성부 중교의숙(中橋義塾) 영어과를 거쳐 190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에 교외생(校外生)으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엘리트였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 모두 개화파로서 신교육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배경을 타고난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이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으로 이주했다.
그는 191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19년 무렵 조선총독부 의원 소아과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19년 2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 거주하던 천도교 신자 박이근(朴理根)의 집에서 허익환과 같이 조선민국 임시정부 포고문과 도령부령(都領府令) 제1호·제2호 2,000여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허익환으로 하여금 서울 시내 요소에 배포하게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그해 8월 8일[4]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서류 반포 및 치안 방해에 대한 공소 사실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아 징역 1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하였으며,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장쭤린이 이끄는 봉천군벌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1930년 10월 28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희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시중공파-화천군파 성원(聖源)계 37세 희(熙) 항렬.[2]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1890년 12월 4일.[4] 1919년 형사사건부에는 8월 4일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