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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6 20:14:08

근공검학 운동


1. 개요

근공검학 운동(勤工儉學運動)은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학생-노동자가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것을 장려한 운동을 말한다.

2. 배경

근현대 중국에서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났고 지식인들은 그 에 맞춰 급진적인 문화 운동과 중국을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지켜낼 방법을 모색했다. 1915년,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우즈후이 등 교육계 인사들은 중국을 개혁할 진리들을 서양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서구의 문명을 익힐 수 있는 공독주의(工讀主義)를 내세웠고, 차이위안페이 등이 근공검학회(勤工俭学会)를 조직했다.

근공검학운동의 기원은 1909년 리스쩡에 의해 프랑스로 간 중국인 노동자 교육이 시초가 된다. 중국에 잠시 귀국한 리스증은 1909년 ‘유법노동맹회(旅法老同盟會)’를 결성하고 고향인 허베이성 가오양현에서 노동자 30명을 선발해 두부를 만드는 기술을 교육한 다음 프랑스로 데려왔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 두부 공장을 설립한 터라,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리스증은 공장 인근에 중국인 노동자를 위한 학교를 세워 우즈후이와 함께 영어와 프랑스어, 수학 및 과학 지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노동하고 검소하게 공부한다.”는 기본 원칙을 따르게 만들었다.

3. 전개

근공검학운동의 최초 유학은 1919년 3월 17일 제1차 중국의 근공검학(勤工儉學) 유학생단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한다. 쓰촨성 출신 교육자 우위장이 1912년부터 외국에 나가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자는 취지로 운동을 시작했다. 89명의 중국 유학생이 프랑스로 떠났고 3월 31일에는 26명이 프랑스로 떠났다. 저우언라이덩샤오핑 또한 근공검학운동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

유럽 근공검학 운동의 절정시기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의 2년동안 잇따라 20차례의 중국청년들이 프랑스로 유학했고, 총 인원수는 1,600명에 달했다.

1921년 이후부터 프랑스 근공검학 운동은 종말을 맞는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경제위기가 오자 중국 유학생들의 취업율은 40%가 채 되지 않았다. 이로인한 생활고는 근공검학운동이 중단되는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초, 이 운동은 큰 자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유학생들이 알아서 자금을 충당했어야 하는데 근공검학을 지원하는 화법교육회는 자기 조직의 경제적 무능과 곤란을 호소하면서 근공검학 학생에 대한 모든 경제적 책임에서 벗어날 것이며 오직 정신적 원조만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리스쩡 역시 유학을 간 학생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자 아나키스트였던 그는 근공검학운동에 대한 관심과 유지보다는 오히려 해외 중국대학의 설립에 더 관심을 가졌다. 결국 근공검학운동에 의한 학생 파견은 1920년 12월을 기해 중단되었다.

4. 의의

이들 중국 유학생들은 폭넓게 서양 사회생활의 실제상황을 접하면서 서양 선진사상과 문화를 흡수했다. 유럽 유학생 가운데 나중에 현대중국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주더, 리다자오, 자오스옌, 천이, 녜룽전, 리푸춘, 리웨이한, 리리싼, 쉬터리, 차이허썬, 채창, 왕뤄페이, 샹징위, 천옌녠, 진교년 등이 그것이다.

5.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