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金石過眼錄. 금석과안록은 조선 후기의 학자 추사(秋史)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 중 황초령비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두 차례에 걸쳐 판독하고[1] 고증한 후 저술한 금석학 논문으로, 철종 3년(1852)에 완성하였다. 운연과안록(雲烟過眼錄), 또는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 중이다.여담으로, 객관식 문제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 '김정희의 금석과안록에서 비의 설립 시기가 고증되었다.' 라는 보기로 4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나왔다.
2. 내용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금석문 연구가 단순히 비문 수집과 문장을 옮겨 적어 기록하는 것에 그쳤던 것에 비하여, 처음으로 과학적인 분석 ·검토 및 평가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고증학적인 형안(炯眼)으로 과학적인 논증을 펼친 것으로, 현대의 금석학 논문들과 비교해보아도 그 학술적 깊이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진흥왕 순수비 연구에 있어서 기준을 제시하고 확립한 선구자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현재 표면이 마멸되어 비문 가운데 해독이 안되는 부분이 많으므로, 이를 해독하고 사라진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선 이 저술을 많이 참고해야 한다.김정희가 이 논문에서 새롭게 밝혀낸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황초령비의 건립연도는 진흥왕 29년(568) 무자년이다.
- 진흥은 시호(諡號)가 아니라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이다.
-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북방을 원정한 사실을 빠뜨렸다.
- 삼국사기가 당시 신라의 영토를 안변(安邊)까지로 비정한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 황초령비는 진흥왕 때 신라가 최북단 함흥 지역까지 관할한 사실을 보여준다.
- 연호와 짐(朕), 제왕 등의 호칭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는 자주적인 독립국의 체제를 갖추었다.
- 북한산비는 무학대사의 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의 진흥대왕순수관경비(眞興大王巡狩管境碑)이다.
- 비문에 남천(南川)이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북한산비의 건립연도는 이천(利川)에 남천군주(南川軍主)를 두었던 568년~576년 사이이다.
3. 외부 링크
[1] 참고로 나머지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 척경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김정희 시대에는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