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의 FC-150 TV 광고. 고우영 화백이 모델로 출연. 다만 목소리는 성우 김세한이 후시녹음하였다.
1. 소개
1982년부터 금성사(현 LG전자)에서 판매한 8비트 개인용 컴퓨터 시리즈. 1982년에 전두환 정권에서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하고 그 시작으로 5000대의 컴퓨터를 각급 학교에 보급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5개 민간업체를 선정했다.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TG삼보)의 '트라이젬 20'(애플 II 호환 기종), 삼성전자의 SPC-1000,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의 '스포트라이트 1', 동양나이론(후의 효성컴퓨터)의 '하이콤8'과 함께 금성사의 금성 패미콤이 선정되었고 각급 학교에 보급되었다.[1]가장 처음 발표된 모델이자 당시 정부의 교육용 컴퓨터로 선정된 기종은 FC[2]-100. 금성사는 자체 개발인 것처럼 홍보했지만 FC-100 에뮬레이터 개발자의 글에 따르면 일본 산요전기의 PHC-25와 NEC의 PC-6001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대의 경쟁기인 삼성전자의 SPC-1000은 일본 샤프전자의 MZ-80K를 기반으로 했고 조금 뒤늦게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 대우전자의 IQ-1000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MSX 규격을 채용한 기종이기 때문에 초창기 우리나라 개인용 컴퓨터, 특히 대기업 컴퓨터의 기술은 일본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셈이다.
출시 초기에는 금성사에서 의욕적으로 보급에 나섰으나
2. 명칭
본 제품의 영문 표기인 "FAMICOM"은 "Family Computer"를 줄인 말이다. 공교롭게도 닌텐도의 "패밀리컴퓨터"와 같다. 금성 패미콤의 인지도는 한국에서도 딱히 높지 않았지만 닌텐도의 패미컴은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게임기였고[6] 저 시절엔 일본 상표명을 슬그머니 베껴오는 일이 적지 않았던 터라 이쪽도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패미콤의 첫 모델인 FC-100은 1982년 초에 나왔는데, 닌텐도 패미컴보다 적어도 1년 먼저 나왔다.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금성사가 일찌감치 사업을 접은 것도 있고 나중에 정식으로 들어온 패미컴은 현대전자가 삼성 겜보이를 의식하여 '현대 컴보이'라는 상표를 사용했던 관계로 딱히 상표권 분쟁 문제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금성사는 브랜드명인 "FAMICOM"을 공식적으로 "패미콤"으로 표기했는데, 저 시절에 사용하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computer'를 보통 '콤퓨우터'(...)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1958년 문교부에서 제정한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 때문이다.[7] 게다가 컴퓨터는 당시 새로운 문물이다 보니 표기법이 정착되지 않아 '컴퓨터', '콤퓨우터', '컴퓨우터' 등으로 통일되지 않은 표기법이 난립하고 있기까지 했다. 금성사는 '콤퓨터' 표기를 고수한 반면 삼성전자에서는 초기부터 '컴퓨터'라는 표기를 사용했다. 올림픽을 앞둔 1986년에 외래어 표기법을 개정했는데 '컴퓨터'로 통일된 표기가 정착한 것도 그때부터다. 이 시기는 이미 금성사가 MSX를 제외한 패미콤 사업을 사실상 접다시피 한 시기다. 인터넷과 SNS가 발전한 요즘은 시장 관계자 대부분이 관여하는 가운데 여러 어휘가 경쟁하다 말 하나가 우위를 점하면 빠르게 그걸로 몰리지만, 당시는 인쇄 매체의 전성기였기에 의견 수렴과 표준화는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8]
여담으로 저 시절을 겪은 세대는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을 '패미콤'과 '슈퍼패미콤'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당대에 기기를 들여온 수입사나 게임 잡지의 번역 표기 등에서 받은 영향이겠지만(즉, 일본어 표기 ファミコム을 아마도 그대로 옮겼을 것으로 보지만) '금성 패미콤'이라는 상표도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이끌린 경향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3. 모델
패미콤 시리즈의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이게 말이 좋아 '시리즈'지 모델마다 바탕으로 삼은 컴퓨터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각 모델마다 호환성도 일관성도 없다. 이는 경쟁사인 삼성전자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오히려 MSX 규격에 집중해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대우전자가 특이한 경우였다. 다만 CPU는 전부 Z80을 사용했다는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FC-100만 NEC μPD780C-1(Z80A 상당품)이고 나머지는 그냥 자일로그 Z80A인데, 이는 당시 한국의 기술 수준과 당대 8비트 PC의 시장 경향 때문에 결정된 사양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당시의 한국 컴퓨터 제조사들은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한 발 앞서 자국산 PC를 제조할 능력이 있던 선진국, 특히 주로 일본의 여러 회사 제품을 복제 또는 짜깁기해서 설계하여 생산하고 있었다.[9] 기반으로 삼은 원본 기기의 제조사가 다르니 제품간 호환성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어느 회사 제품을 들고 오던 세운상가산 애플 II 호환 기종이 아닌 이상 국산 PC는 당시 일본산 PC의 주류 CPU였던 Z80A 상당품을 채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부언하자면 이렇게 된 연유에는 금성사, 나아가 당시 한국 컴퓨터 산업계의 한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기술적 배경도 관계가 있다. 해외에서도 자사 모델끼리라도 사업부나 라인업이 다르면 서로 호환이 안 되는 경우가 흔했다. 애플 II와 애플 III, NEC PC-8801과 PC-9801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늘날처럼 여러 회사가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공통 규격을 제정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시대가 아니어서 당시에는 거의 모든 PC 제조사는 자사의 독자 아키텍처를 설계해서 사용했었고 따라서 호환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지어 프로그래밍 언어조차 성능 문제로 어셈블리어가 주류였기 때문에 소스 코드의 재활용성도 제로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제조사가 달라도 소프트웨어는 호환되도록 공통 규격을 사용한다는 MSX 같은 발상은 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PC는 수십여가지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지 않았다.[10] 다만 당시 일본의 8비트 컴퓨터는 후지쯔 FM-7이나 토미 퓨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Z80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래픽 성능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Z80이 당시에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 CPU 시장을 제패하다시피 한 관계로 구하기도 쉽고 성능도 잘 나왔기 때문인데, 그 덕에 일본의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한 기종으로 개발을 한 다음 CPU가 동일하여 공통으로 쓸 수 있는 부분은 재활용하고 기종마다 차이가 있는 I/O 계통 등만을 손봐서 여러 기종으로 소프트웨어를 거의 동시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최초 개발 기종(주로 보급률이 높았던 X1이나 PC-8801)과 CPU가 다르거나(FM-7 계열 등) 그래픽, I/O 계통에 차이가 큰(MSX 등) 기종은 소프트웨어의 발매 일자가 다른 기종들보다 차이나게 늦어지거나 하기도 했다.
3.1. FC-100
사진은 FC-100D |
3.2. FC-30
보급형으로 나온 모델이다. 1983년 10월부터 발매되었으며 1981년 등장한 영국 컴퓨터, 싱클레어 ZX81의 복제품이다. 크기가 작아 간편하고[12]에 129,800원이라는 다른 모델들의 1/3 조금 넘는 가격으로 패미콤 제품들 중에 가장 저렴했다. 원본인 ZX81의 콘셉트가 저렴한 가정용 컴퓨터였기 때문에 같은 ZX81 복제품인 삼성전자 SPC-300 역시 비슷한 가격대였다. 여기서 '저렴한'의 의미는 다른 컴퓨터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이지 발매 당시 가격인 10만원대 초반은 1983년 당시의 경제상황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저렴'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비교할만한 물가지표를 들어본다면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의 초임이 약 20만원, 소형 승용차인 현대 포니2가 350만원 정도 했었다. 동시대의 다른 컴퓨터들은 대체로 30만원대 내외였는데, 10만원대 초반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웬만한 게임 컴퓨터를 번듯하게 맞출 수 있는 가격인 100만원 정도, 30만원대의 주류 제품들은 호화로운 하이엔드급 PC의 가격에 필적하는 300만원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ZX81 복제품답게 키캡마다 베이직 명령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원판인 ZX81이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를 써서 악평을 받았지만 FC-30의 키보드는 평범한 스위치형(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했다. 그래픽 성능은 꽤 후달리는 편으로 모노크롬/저해상도 출력만 가능하여 사실상 그래픽 성능은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다른 FC 시리즈와 달리 한글 처리능력도 없었는데 원본인 ZX81을 보면 기기 구조상 애초에 그런 게 될 거 같지는 않아 보인다.
가격대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성능과 용량이 형편없을 정도로 낮아 정상적인 컴퓨터로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베이직 명령어를 입력할 때 철자를 하나하나 타이핑하는 것이 아니라 각 명령어의 첫 알파벳을 입력하면 그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명령어가 객관식으로 뜨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고르면 입력이 되는 식. 그러니까 G를 타이핑하면 1. GOSUB 2. GOTO... 이런 식으로 하단에 선택이 뜨는데 그 중에 원하는 보기를 고르면 자동 완성으로 입력이 되는 방식이었다. 대소문자 변환도 요즘처럼 caps lock 한번 누르면 되는 게 아니라 키를 몇 개 눌러야 하는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여담이지만 키보드의 품질은 패미콤 시리즈 중에 최고였다. FC-80과 FC-100이 그 뒤를 잇고 FC-150은 최악이었다. 다만 키보드의 고정이 약한지 국민학생 손을 키보드 위에 내려치는 정도로도 키보드가 내려 앉는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키보드가 상판에 고정된 방식에 상판의 내구성이 낮아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여진다.
결국 FC-100과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보급이 저조하여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봐야 BASIC으로 직접 코딩을 해보는 것 외엔 쓸모가 별로 없었다.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판매가 저조하여 발매 1년여만인 1984년 12월에 생산이 빠르게 중단되었다.[13]
3.3. FC-80
MSX 규격. 1984년 4월에 발매를 시작하였고 시리즈 중에서 가장 오래 생산되었다. 메인 RAM 64KB로 MSX1 규격으로는 최대 사양이며 삼성전자 SPC-800, 대우전자 DPC-200과 동일한 사양이고 한글 BIOS도 큐닉스(Qnix)에서 만든 한글 BIOS를 받아다 써 3사간 호환성을 유지했다. 패미콤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종이기도 하다.
FC-80의 사양을 조금 변경한 모델인 GFC-1080/A라는 파생모델도 있는데, GFC-1080은 '패미콤' 타이틀을 떼고 나왔다. GFC-1080은 FC-80과 같은 사양에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파소칼크'와 모니터 프로그램을 내장했고 1080A는 내장 소프트웨어를 제거해 가격을 낮춘 제품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각급학교에 OMR. OCR 시트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성적 처리를 전산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교육용으로 보급[14]된 8비트 컴퓨터를 그렇게 사용한 곳이 많았다.
키캡에 한글이 측각으로 각인된 FC-100과는 다르게, 한글이 정각으로 각인되어 있다. 한국에서 발매된 모든 MSX 기종의 컴퓨터들의 공통 사항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면 롬팩 슬롯 옆에 뭔가 동그란 구멍이 하나 있는데, 다름아닌 라이트펜을 끼워놓는 거치대다. 물론 라이트펜은 별매품이고 꽤 비쌌던 관계로 저기에 실제로 라이트펜을 거치해본 사용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FC-80의 파생 모델로 유럽 수출용 모델인 FC-200이 있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서독(현재의 독일), 스페인, 터키(현재의 튀르키예)에 발매되었다. 한글 처리 능력을 제거하고 디스플레이 출력을 NTSC에서 PAL로 변경한 것을 제외하면 FC-80과 동일한 사양이다.
3.4. FC-150
(일단은) 패미콤 시리즈 중 최상위 라인업. 1983년 12월에 발매를 시작하였으며 1982년 등장한 일본의 취미용/게임용 컴퓨터 Sord M5의 복제품[15]이다. 당대의 인기 만화가였던 고우영 화백을 모델로 기용하여 TV 광고를 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한 기종이다. 그 덕에 FC-100이나 30보다는 좀 팔렸는지 1985년 9월까지 생산되었다.
금성사는 패미콤 시리즈 중 최상위 모델로 '전문가용'이라는 콘셉트로 마케팅을 했으나 원본인 M5는 3만엔대의 저렴한 가정용 컴퓨터였기 때문에 딱히 전문가용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전문가용이라면서 저가형 모델인 FC-30에서도 안 쓰는 고무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고 있는 것부터 문제였다. 원본인 M5가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고 있었기는 한데 FC-30은 교체해놓고 정작 비싼 150은 교체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16] M5가 원래 저렴한 가격과 컴팩트한 크기를 내세운 가정용 컴퓨터였는데 이걸 전문가용 콘셉트로 팔아먹으려는 속셈에서인지 FC-150은 하우징의 크기를 MSX에 준하는 크기로 키웠지만 내부 기판은 M5와 동일한 컴팩트 사이즈라 내부 공간이 꽤 널널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8비트 PC들과 달리 BASIC 인터프리터가 메인보드 내의 ROM에 내장되어 있지 않고 별도의 카트리지 형식으로 제공되는데, 기본으로 제공되는 정수 BASIC 인터프리터인 BASIC-I, 부동소수점 연산을 지원하는 수치계산용 BASIC-F, 그래픽 명령어를 지원하는 BASIC-G의 3종류로 나뉘어 있었으며 BASIC-F와 G는 별매였다.[17] 참고로 카트리지를 꽂지 않으면 컴퓨터가 아예 켜지지 않는다. FALC라는 스프레드시트 소프트웨어 카트리지도 있고 한글 조차 별도의 카트리지 형태로 지원하였다.
M5가 원래 MSX와 아주 유사한 하드웨어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18] 게임 성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문제는 MSX에 비교하면 게임이 별로 없었다. PHC-25 정도로 금방 망해버린 기종은 아니지만 모기업인 Sord가 내력있는 컴퓨터 전문 기업이기는 했으나 규모가 당시 일본 PC계의 주류였던 3사(NEC, 후지츠, 샤프)나 MSX 규격에 참여한 대형 가전사들(소니, 산요, 파나소닉 등)에 비하면 많이 작은 편이어서 크게 밀어주지 못하여 M5도 그다지 성공한 기종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19] 일단 '게임 퍼스컴'(ゲームパソコン)내지 '하비 컴퓨터'로 분류되던 카테고리의 PC들, 그 중에서도 특히 Z80A+TMS9918+PSG를 달았던 비슷한 콘셉트의 기종들은 1984년 MSX 규격 발족 후에는 전부 몰락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고로 삼성전자에서는 SPC-500과 SPC-300을 버리고 SPC-1000에 올인을 했던데 비해 금성사에서는 FC-150을 가장 주력으로 밀었던 것도 있고[20] 일본에서 이미 발매된 M5용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들여와 사용할 수 있었기에 금성 패미콤 시리즈 중에서는 MSX 규격인 FC-80 다음으로 소프트웨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게임 카트리지는 물론이고 카세트 테이프에 담긴 게임도 비교적 다양했다.[21]
주변 기기로 본체와 비슷한 디자인의 프린터가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프린터는 프린터 리본 대신 일반 볼펜심을 사용했다. 잉크가 떨어지면 모나미 153 볼펜심을 끼워서 쓸 수 있었다고... 그리고 프린터를 작동시키면 화면에 업데이트되는 텍스트 내용을 그대로 프린트해주는 특성을 이용해 FC-150 본체와 프린터를 마치 노트북처럼 가지고 이동하며 사용하는 방법도 가능했다. 당시 배불뚝이 모니터 (혹은 TV) 만큼은 절대 휴대가 불가능했기에 가능했던 꼼수.
키보드 레이아웃이 매우 특이한데, 스페이스바가 하단에 위치하지 않고 우측 시프트와 리턴키 사이에 아주 작게 숨어있다.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Sord의 M5도 동일한 레이아웃인데 유저들의 추측으로는 슈팅 게임에서 발사 버튼으로 자주 쓰이는 스페이스바를 그 용도에 적합하게 변형한거라고...
FC-150이 카트리지를 장착하지 않으면 아무런 작동이 되지 않는 반면 같은 Sord M5 복제품이었던 삼성전자 퍼스컴 SPC-500은 기본적으로 FC-150의 BASIC-I에 해당되는 정수 BASIC 인터프리터를 롬에 내장하고 있어서[22] 본체만으로도 구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 카트리지로 SBASIC-2를 발매했는데 이건 FC-150의 BASIC-F와 BASIC-G의 명령어 셋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서 소수점 이하 계산과 픽셀 단위 페인팅이 하나의 카트리지로 가능했다.
4. 기타
- 금성 패미콤 시리즈의 최상위 라인이었던 FC-150과 동일한 M5 복제품 중에 고려시스템의 '타미컴'이라는 제품이 있었다. 실제 시판이 되기는 했지만 거의 팔리지 않은데다 지면 광고조차 찾기 힘들다. 현재로서는 엄청난 레어품이지만 소장자가 있다. 소장자도 처음 출시때 우연히 구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이 타미컴은 금성사의 FC-150보다는 여러모로 삼성전자의 SPC-500에 더 가깝다. 전체적인 금형이나 외부 단자 레이아웃, 그리고 카트리지 삽입구의 위치 및 기본 BASIC 인터프리터 내장 등 SPC-500에서 키보드와 외장 색상만 바꾼 수준인데 링크에서는 FC-150만 언급되는걸 보면 SPC-500의 존재는 그야말로...
- 금성 패미콤 시리즈는 삼성전자 SPC 시리즈와 라인업이 유사했는데 모델명도 유사했다. SPC-300은 싱클레어 ZX81의 복제품이고 SPC-500은 Sord M5 복제품, SPC-800은 MSX 규격이다. SPC-1000은 첫 발매 기종이자 플래그십 모델. 금성 패미콤 제품들의 모델 번호와 유사하다. 참고로 삼성전자에는 패미콤 시리즈에는 없는 SPC-650이라는 기종도 있었는데 특이하게 복제품이 아닌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을 위탁생산 하면서 겸사겸사 국내에도 내놓은 것이었다.
[1] 이 중 스포트라이트1 과 하이콤8은 일찍 철수했기 때문에 어느 기종의 복제품인지 정보가 부족한 상태. 두 기종 모두 이미 1980년대 중반에 매체에서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스포트라이트1의 경우는 Radioshack TRS-80의 클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담으로 동양나이론은 재빨리 하이콤8을 포기하고 애플 II의 클론으로 소프트웨어가 많은 PC-8000을 개발하여 당분간 이를 주력으로 민다. 애플 II 클론이지만 트라이젬이나 세운상가 복제품과는 달리 CP/M 카드를 내장하고 나름 몇가지 커스터마이징을 해서 내 놓은, 나름 좀 생각했던 기종이다.[2] Family Computer의 약칭. 공교롭게도 닌텐도 패미컴과 동일한 이름이다.[3] 금성사는 종로와 서초동 등지, 삼성전자는 신사동 등지에 컴퓨터 전시장이 있었고, 각사의 컴퓨터 판매장 역시 어느정도는 전시체험이 가능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MSX 호환 기종을 내놓은 후발주자 대우전자 역시 논현동(위치는 삼성전자의 신사동 전시장과 가까웠다. 훗날 역삼동으로 이전.)에 전시장을 설치했던 적이 있다.[4] 컴퓨터 경진대회 개최는 대우전자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5] 1980년 중반부터 금성 마이티 시리즈라는 브랜드로 IBM PC 호환 기종을 생산하고는 있었으나 제조사를 막론하고 1989년 이전에는 IBM PC 호환 기종은 업무용 시장이 주 타겟이었다. 금성사는 교육용 PC 사업 이후에도 상당기간 '마이티' 브랜드를 유지했다.[6] 다만 북미쪽에서는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7] 이 표기법으로는 장음도 표기에 반영하기 때문에 New York을 \'뉴우요오크\', [ruby(東京, ruby=とうきょう)]를 \'토오쿄오\'라고 적었다.[8] 이는 이후에도 마찬가지. SK Telecom의 경우는 SK텔레콤으로 했는데 LG Telecom(유플러스의 전신)은 LG텔레컴으로 했으며, 2000년대 초반의 대부분 닷컴 기업들은 텔레컴이였다. 이 시기 이렇게 한 이유로 SKT는 2023년 현재까지 정식 사명이 에스케이텔레콤이다.[9] 사실 말이 선진국이지 미국, 일본 정도다. 영국 등 유럽 선진국들은 일부 선도적인 기업이 PC를 개발 할 정도이지 미국, 일본에 비해 보편적으로는 뒤떨어 졌으며 이들 국가에 PC가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일본제 MSX가 상륙한 이후다. 대만, 싱가폴, 홍콩 같은 아시아 4개 용 국가들은 한국이나 비슷했는데 당시 이들 국가는 대기업 보다 중소기업 위주이다 보니 대부분 애플 II 클론으로 통일했었다. PC에 한해서 삼성전자, 금성사 같은 대기업은 없었고 세운상가 같은 곳이 한국보다 더 크게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맞다. 그런 이유로 오히려 기종의 통일성은 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좋았고, 미국의 유명 1개 기종의 클론으로 통일이다 보니 8비트가 쇠퇴하고 16비트 IBM PC 호환 기종이 부상하자 재빨리 모든 컴퓨터 기업들이 IBM PC 호환 기종으로 갈아탔다. 오늘날 대만의 기업들이 PC 메인보드를 비롯 PC산업의 주류가 된 배경도 이 시기 재빨리 IBM PC 호환 기종으로 대동단결한 데 있다. 일본은 나름 앞선 기술로 독자적 아키텍처를 개발, 이를 오래 붙들고 있었으며 한국은 일본식의 독자 개발과 대만식의 호환 기종 일색의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틈만 나면 정치권에서 신토불이 시스템 개발을 추진하여 대기업에 이에 따른 탓에 IBM PC 호환 기종 시장으로의 완전 전환이 늦었다.[10] 이 수많은 기종들의 목록을 보려면 당시 나왔던 일본 컴퓨터 잡지인 마이컴 베이직 매거진(베-마가)을 보면 된다. 1985년 8월호를 보면 51개 기종 소프트웨어 게재라고 나와 있다.[11] 사실 PHC-25는 PC-6001과 호환성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호환 기종 취급한다.[12] 서류 봉투에 들어가고도 남을 수준이었다.[13] 사실 저렴하지도 않은 게 1984년 당시 세운상가제 애플 II 호환 기종은 10만원대 후반에서 20만원대 초반이였다. 성능이나 소프트웨어의 풍부함 등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을 기종이 고작 몇만원 차이였으니 실패할 만 하다.[14] 보급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기자재를 마련할 때와 비슷하게, 교육부는 공간과 최소 수량만 마련해주고 학교 육성회가 기부금을 모아 채우는 식이 되기 쉬웠다.[15] 복제품이라고 하기엔 뭐한 게 Sord M5는 Apple II처럼 시스템 아키텍처가 공개되어 있었기에 전세계적으로 호환 기종이 흔했다.[16] 그나마 금성 FC-150의 멤브레인 키보드는 상태가 좀 나은 편이었는데, 삼성전자의 비슷한 기종인 SPC-500이나 MSX 기종인 대우전자 DPC-100, DPC-180은 고무 멤브레인 위에 플라스틱 캡을 씌웠는데 키보드와 상판 프레임 사이의 유격이 애매해 타이핑을 하다보면 키가 프레임에 끼여 입력 상태로 고정되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17] 같은 VDP를 사용하는 FC-80에 내장된 MSX-BASIC은 이거 하나로 정수 연산, 부동소수점 연산, 그래픽 묘화 전부 된다. 이러니까 안 팔리지 FC-150에서 부동소수점 연산과 그래픽을 동시에 사용하려면 별매품인 확장 슬롯을 사서 BASIC-F와 BASIC-G를 같이 꽂아야했다.[18] CPU, VDP는 완전히 동일한데, M5가 1년 먼저 나왔다. 사실 MSX의 콘셉트는 저렴한 기성 부품으로 구성해 3만엔대 선에 맞추는 가정용 컴퓨터였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비슷한 구조를 가진 하드웨어가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세가의 SC-3000도 거의 비슷한 구성을 지니고 있었고 MSX보다 먼저 나왔다.[19] 당시 Sord가 내력있는 컴퓨터 전문 기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업형 컴퓨터 시장에서 그랬었다. 그러다 보니 가정용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낮을 뿐만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도 낮았다.[20] 모델명의 숫자로 각 회사의 주력 우선 순위를 짐작할 수 있다.[21] 삼성전자는 어떻게 해서든 소프트웨어를 늘려 보려고 공모전까지 여러 번 여는 등 뭔가 해 보려고 했으나 금성은 누가 가전회사 아니랄까봐 쿨 하게 자작 소프트웨어를 포기하고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적은 해외 기종의 호환 기종을 주력으로 밀었다. 이미 이 시절부터 두 회사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이 차이가 있었으며 이는 이후 IBM PC 호환 기종,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까지 이어진다.[22] 삼성전자에서는 이걸 SBASIC-1으로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