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5:20:07

기인제도

1. 개요2. 관련 문서

1. 개요



고려 시대조선 시대 때 실시된 제도. 지방 유력자의 자식이 수도에 머물러 있게 한 조치로, 지방 세력 유력자를 인질로 잡은 신라상수리 제도의 후신이다. 상수리 제도와 기인제도의 차이점은 상수리 제도는 지방 유력자 본인이 수도에 부임해야 했지만 기인제도는 향리의 가족을 머물게 한 제도라는 점이 다르다.

겉으로야 온갖 방법으로 포장했지만 기인제도의 본목적은 지방 세력의 자제들을 사실상의 인질로 붙잡아 둠으로써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고려는 송악의 대호족인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태봉국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건국한 나라였기 때문에 쿠데타로 건국된 나라인 고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족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 왕건은 정략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 집안들이랑 사돈을 맺어가며 어떻게든 이들을 통제하였다. 그 결과 기인 제도사심관 제도가 탄생했다.

일단 인질로 잡아두긴 했지만 고려의 호족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기인 제도로 온 호족 자제들에게 후한 대접을 했고, 호족 입장에서도 중앙에 줄을 댈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윈윈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지방에 대한 조정의 영향력이 계속 강화되고 호족의 힘은 빠지면서 이에 비례해 기인의 대우도 점점 개차반이 되기 시작했고,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개판이 될 무렵에는 일부 힘있는 호족의 자제를 제외한 나머지 기인들은 그냥 일꾼 취급 받으며 사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로 가면 더 심해진다. 고려 시대에 지방 향리들은 자기 목소리는 낼 수 있었지만 조선고려와 달리 모든 행정구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고, 수령의 통치에 방해가 되기 쉬운 토착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결과 조선의 아전은 수령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양반들이 과거도 못 보고 녹봉을 안 줘 지방 관아 예산으로 급여를 받아야 하는 중인의 눈치를 볼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기인들은 과장 좀 보태서 공노비급이었고, 관청에서는 이들의 근무표까지 짜놓고 체계적으로 부려먹었다. 이후 광해군 때 폐지되었다.

2. 관련 문서



[1] 차이점이 있다면 상수리 제도는 유력자 본인이 거처를 옮기는 것이고 기인제도는 가족이 옮기는 것이다.[2] 유력자나 그 가족의 거처를 옮겨 인질로 잡아 권력의 강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