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1:54

기천문

1. 개요2. 수련 체계
2.1. 기본 수련법2.2. 무술
3. 논란 거리: 전통무술인가, 창작무술인가?4. 기천 관련 설화5. 여담6. 관련문서

1. 개요

1970년대에 박대양(朴大洋, ?~2017)이 설립한 수련 단체이다. 이 단체에서 수련하는 무술을 기천(氣天)이라고 한다.

모토는 '말과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련하라' 이다.

박대양은 원혜상인이라는 스승에게서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초기에는 기천선무장이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개설하였다

기천문은 기천이 산중에서 명맥을 오래 이어온 무예이자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
여러 한국 무예에 영향을 주었다.수벽치기와 해동검도, 기림선방 창시자 등이 기천 사범 출신이다. 해동검도의 다리를 조이는 기마자세, 대도세, 소도세, 개운기공 등이 이 단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택견문화재인 신한승선생과 기천문 초기 제자들이 교류하였다.


2. 수련 체계

기천의 핵심 원리는 반장, 역근, 반탄이다. 수련 유형에는 정공과 동공이 있다. 정공은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자세를 뜻하고, 동공은 동적인 동작을 뜻한다.

2.1. 기본 수련법

파일:LQeSepG.jpg
내가신장
파일:2xB8Fsf.jpg
육합단공 중 일부를 보여주는 그림

* 원양진기단공
정공에 속한다.

2.2. 무술

3. 논란 거리: 전통무술인가, 창작무술인가?

전통 무술인지 현대에 창작된 무술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지금은 폐간된 무술전문잡지 마르스에서 이 무술에 대한 집중 해부가 벌어졌는데, 기사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박대양이 산에서 어떤 수법을 배우긴 배웠는데, 그것이 당랑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기천의 핵심이라는 내가신장의 초창기 모양이 현재 모양과 달랐다는 것은 현대 창작 무술 내지는 당랑권 짝퉁 무술[6]이라는 증거가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7].

이에 대한 반론을 주장하는 측은 당랑권과 비슷한 것은 입문자들이 배우는 초급 동작 몇 개이고 고급 동작들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빅대양이 야인 시절 여러 곳에서 가르치거나 도장깨기를 대신해준 시절이 있었다.
배우는 입장은 아니고 가르치는 입장이었다는 증언도 있다.https://m.blog.naver.com/gunwe1000/221493069179

마르스 잡지에 같은 해에 기천문 지도자와 당랑권사 윤모 관장의 대담에서 기천과 당랑권은 체계가 다른 무술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실렸으나, 다른 기사에 묻혀 이 기사는 공론화되지 않았다.


마르스 기사를 조목조목 반론한 글이 있다.


당랑권 외에도 기천과 유사한 중국 무술이 있다. 기천이 북소림권과 벽괘장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다. 기천을 수련했던 무술인의 블로그에서는 북소림권과 기천이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기천과 벽괘장과의 기술적 연관성에 대해서 쓴 포스팅이다.

기천의 자세와 동작의 이름은 무협소설작가인 좌모씨 등이 지은 것이라는 기천 원로들의 증언이 있다.

4. 기천 관련 설화

기천문에서 이야기하는 설화가 있다. 예를 들면, 박대양의 스승인 원혜상인이 장(掌)으로 소나무를 한 대치면 소나무가 재가 되고 큰 돌을 공 차듯이 차고 경공술을 하는 이야기, 원혜상인이 160세가 넘어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박대양이 기천을 배울 때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진이 쳐져 있어서 도망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 박대양이 모래 사장을 걸었는데 모래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한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이자 저서 조용헌 살롱에는 연개소문이 기천의 상박권을 배워 당태종의 호위 팔대장군을 모두 제압하고 무림을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출처는 계룡산에 거주하는 장문인이다.# 이 외에도 달마대사가 백두산에 사는 여자 신선으로부터 역근을 배웠다는 이야기[8] 등이 있다. 근거가 없고, 비현실적이라 비판을 많이 받는다. 심지어는 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최배달이 박대양과 만나 조언을 구했다고 날조하기까지 한다. #

5. 여담

이경규의 간다투어 2탄에 출연한 적이 있다.

비보라는 빠른 보법이 축지법으로 짤이 많이 돌아다닌다.

수련생이 기천무라는 신무협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1권(기천무 1, 옥규철, 드림필드, 2002) 부록에 기천문에 대한 설명을 직접 집어넣었다는 모양. 네이버 책정보, 기천무 1

과거 노량진엔 기천 수련을 의무적으로 시키던 대학입시 재수종합학원인 대양학원이 있었다. 직접 했던 전직 학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운동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던 수험생에게는 매우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이 프로그램이 상당한 호응을 얻어서인지, 모 기천문 강사는 수험생을 위한 기천문 수련법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내가신장이 높은 치유력을 가졌다는 주장을 한다. 일부에서는 내가신장을 많이 하면 몸에 안 좋다고 주장한다. 기천 수련하다가 몸 망가진 사람 많다.

국자랑이라는 기천문의 박성대 원장이 기천문을 나와 세운 단체가 있다. 기천문이 정통성 시비가 많은 만큼 협회 내부적으로도 소란이 있었는데 그 중 분열될 때 따로 나온 쪽이다. 기천문의 무술 외에도 '팔중원류' 라는 신라시대의 봉술이라는 것과 '고구려진술' 이라는 일종의 기공을 연마하는 쪽으로 기천문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속초 지방에서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무예들을 함께 접합해서 수련한다고 한다. 무술 자체가 좋아서 배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고구려나 신라타령이냐며 질색하는 사람들도 역시 존재한다.

현재는 없어진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1번 출구 앞 문제의 그 축지법 학원은 사실 기천문류 도장으로 보인다.
파일:attachment/P100328001.jpg

2021년 6월, 이경규가 간다투어 2탄에 나왔던 문제의 계룡산 축지법 아저씨가 유튜브 근황올림픽에 출연하였다.

6. 관련문서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6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6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일보일권, 일보이권, 일보삼권, 풍수, 금화장, 대풍역수, 비연수로 이루어져 있다.[2] 천룡수, 천여수, 천라수로 이루어져 있다. 기천1수, 기천2수, 기천3수라고도 한다.[3] 정식 명칭은 천강암연투응권이다.[4] 임품장 노사 등을 통해 한국에 퍼진 당랑권은 중국 정통 당랑권과 달랐다고 한다[5] 마르스 기사에 박대양 초기 제자가 구술한 것이 적혀있는데, 박대양이 산에서 배운 5가지 기술은 단순한 것 같지만 매우 실전적이고 응용수가 무궁하게 나올 수 있는 훌륭한 기법들이라고 한다[6] 한국 당랑권을 깊이 수련한 사람들 중, 기천 초창기의 수련자들과 교류를 해본 후, 기천을 망가진 당랑권이라고 평한 수련자도 있었다.[7] 마르스가 기천 관련 기사를 쓴 이후인 2014년에 박대양은 내가신장의 원형을 공개하였다.[8] 백두산은 15세기까지 활화산이라서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이 문서의 2015년 4월 17일 이전 저작자는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