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자와 츠요시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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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키타자와 츠요시 北澤 豪 | Kitazawa Tsuyoshi |
출생 | 1968년 8월 10일 ([age(1968-08-10)]세) 일본 도쿄도 마치다시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조건 | 170㎝ |
포지션 | 미드필더 |
학력 | 슈토쿠 고등학교 (1984~1986) |
소속팀 | 혼다기연공업 (1987~1991) 베르디 가와사키/도쿄 베르디 (1991~2002) |
국가대표 | 58경기 3골 (일본 / 1991~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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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현재는 축구행정가로서 일본축구협회 이사, 장애인축구연맹 회장 등을 맡고 있으며, 축구 해설자로서 코나미 위닝일레븐 시리즈의 해설역으로 유명하다.인터넷에서 통하는 애칭은 키타자와상, ktzw3이다.[1]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는 흔히 '키짱'(キーちゃん)으로 불린다.
2. 선수 경력
도쿄도 마치다시 출신으로 마치다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요미우리 사커클럽 유스팀,[2] 슈토쿠 고교를 졸업하고 혼다기연공업에 입사하여 실업 생활을 거쳤다. 1990년에는 회사 지원으로 독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브라질 상파울루 FC 등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후 프로화를 앞두고 1991년 요미우리로 이적하여 후신인 베르디 가와사키, 도쿄 베르디1969에서 2002년까지 활약했다. 2000년 이후 특유의 넓은 활동량 탓에 무릎 부상이 잦아지면서 출장이 줄어들고, 2002 시즌 후에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 감독으로 취임한 오카다 다케시 감독의 제의를 거절하고 은퇴를 택했다.포지션은 초기에는 윙어와 포워드를 겸하면서 혼다 시절에는 일본 사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으나, 베르디로 이적한 후에는 같은 팀에 라모스 루이, 미우라 가즈요시, 하시라타니 데쓰지 등 대표팀의 코어 멤버가 모여 있던 관계로 미드필더에서 마당발 역할을 맡았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활약했다. 대체적인 포지션은 이전의 모리야스 하지메를 이은 중앙 미드필더로 베르디와 같이 라모스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해당한다. 라모스가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미드필드의 주축이 마에조노 마사키요와 나나미 히로시로 넘어가 기타자와는 1996년 아시안컵 출장이 좌절되었으나, 1998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다시금 베테랑들이 중용되면서 대표팀에서 마지막 활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새로이 대두한 나카타 히데토시 등에 밀려 월드컵 본선 무대는 밟지 못하였다.[3]
다만 실업 시절 FIFA 대회에 출전한 적은 있다. 1989년 FIFA 풋살 월드컵의 전신인 풋살 세계선수권 첫 대회에 소속팀 혼다기연 선수로 대표팀이 구성되어서 세계대회 출장을 했다. 본선에서는 3패로 탈락한 가운데 2득점을 기록했다.
3. 여담
- 특유의 장발과 활동량,
간지 넘치는외모 [4] 3박자가 적절히 어우러진 선수였다. 때문에 90년대의 한일전을 기억하는 팬들의 이미지에 강렬히 각인된 선수 중 한 명. 다만 프로 전 혼다에서 실업선수를 하던 시절에는 명색이 회사원이었던 만큼 평범한 헤어스타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푸근한 아주머니(...)같은 외모와 대조적으로 상당한 패셔니스타 기질로도 유명하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장애인축구연맹 소개 페이지에서 그 부담스러운 사진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정상적인 수트 차림. - 얼굴과는 별개로 풍성한 긴머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 탈모 축구팬들의 부러움을 사고있다(...)
- 어릴 때는 야구팬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열성팬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고 요미우리 유스팀에 입단했는데, 모집 절차를 거치지 않고 요미우리랜드 내 연습장에 무작정 찾아가 연습생으로 들어간 것. 고교 시절에도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하여 대학의 스카우트도 거절했지만 실업팀과 달리 프로로 운영하는 요미우리에서 고졸 선수의 입지가 없다는 옛 스승의 조언에 따라 혼다에 입사했다. 원래는 고교 감독과 연줄이 있는 야마하의 훈련에 견습생으로 다니다가 인접한 혼다의 스카우트를 받은 것. 다만 실업 선수라고 해도 보통의 고졸 사원 채용 절차를 거쳤고, 당시 일본 실업 축구의 관행과 마찬가지로 오전에는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 축구를 겸업했다. 기타자와가 소속된 곳은 이륜차 도장 공정.
4. 관련 문서
[1] TV 중계 해설자인 만큼 경기 중 시도때도 없이 호명되기 때문.[2] 시설이 마치다에 인접한 이나기시에 있다.[3] 이 때는 오카다 다케시 대표팀 감독이 그간 사용하던 4백 존디펜스 대신 본선에서 점유율 열세를 대비한 3백 전향을 공언했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실제 오카다는 전임 가모 슈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를 할 때도 3-4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팀을 구성했었다. 본선에서의 기용을 보면 3백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차피 공격은 나카타와 나나미가 주도하니 어설픈 마당발보다 확실한 홀딩을 해 주는 야마구치와 혼다를 고른 것.[4] 주된 활동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늘 착용했던 헤어밴드로 드러난 넓은 이마 등으로 인해 헤어밴드를 종종 착용하고 뛴 적이 많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박성배(축구인) 선수와 저돌적인 플레이스타일과 더불어 자주 비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