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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7:48:25

미우라 카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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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02a29><colcolor=#ffffff> UD 올리베이렌스 No. 11
미우라 카즈요시
三浦 知良 / Kazuyoshi Miura
출생 1967년 2월 26일 ([age(1967-02-26)]세)
일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72kg
포지션 스트라이커
등번호 11
소속 클럽 산투스 FC (1986)
SE 파우메이라스 (1986)
SE 마츠바라 (1986)
클루비 지 헤가타스 브라지우 (1987)
XV 지 자우 (1987~1988)
코리치바 FC (1989)
산투스 FC (1990)
요미우리 FC/베르디 가와사키[2] (1990~1998)
제노아 CFC (1994~1995 / 임대)
GNK 디나모 자그레브 (1999)
교토 퍼플 상가 (1999~2000)
비셀 고베 (2001~2005)
요코하마 FC (2005~ )
시드니 FC (2005 / 임대)
→ 에스폴라다 홋카이도[3] (2012 / 임대)
스즈카 포인트 게터스 (2022 / 임대)
UD 올리베이렌스 (2023~ / 임대)
국가대표 파일: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89경기 55골[4](일본/1990~2000)
가족 아버지 나야 노부오
어머니 미우라 요시코
미우라 야스토시#
아내 시타라 리사코
아들 미우라 코타[5]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최고령 출전 기록
4.1. 최고령 출전 기록 허울 논란
4.1.1. 숨겨진 뒷사정
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국적의 축구 선수. [age(1967-02-26)]세인 현재도 아직 현역으로 UD 올리베이렌스에서 뛰고 있다. 2018년 1월 11일 11시 11분에 재계약했는데 그의 등번호 11번과 연계한 것.

2. 클럽 경력

1982년에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갔다. 일본의 브라질 축구 유학 1세대이다. 브라질 프로 팀에서 4년간 뛰다가 J리그 출범을 앞두고 1990년 일본에 돌아와 오늘날 도쿄 베르디의 전신인 요미우리 축구 클럽에 들어갔다. 요미우리는 프로화와 함께 명칭을 베르디 가와사키로 바꾸었고, 미우라는 핵심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초기 J리그 붐을 이끌었다. 1994년에는 세리에 A팀인 제노아 CFC에 임대 이적하여 세리에 A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최종 성적은 리그 21경기 출장(선발 10경기) 1골 1도움. 당시 데뷔전이었던 AC 밀란전에서 밀란의 수비수 프랑코 바레시와 충돌하여 코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한달 동안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10월에는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일본 축구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회 기간 소속팀에서 이탈해야 했다.

시즌 종료 후 다시 베르디 가와사키로 복귀했다. 1996년에는 J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98년말에는 소속팀 베르디 가와사키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6] 미우라는 다시금 유럽을 노려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1998)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토 퍼플 상가비셀 고베를 거쳐 2005년부터는 요코하마 FC에서 뛰고 있다. 비셀 고베 초반까지는 연간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했지만 이후에는 풀타임 기용은 하지 못하고 있고, 스타팅과 벤치를 오가며 연간 10~20경기씩 출전하였다.

2005년 후반기에는 호주 A리그시드니 FC에 단기 임대되었으며, 이 해 일본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해 처음으로 FIFA 주최 대회에 발을 내딛었다.

2016년 홈경기에서 최고령 득점을 경신하고,# 그 뒤로도 계속 경신하고 있다.#

2017년엔 만 50세 14일의 나이로 또 최고령 득점을 경신했다. 이 득점으로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스탠리 매튜스 경의 만 50세 5일 득점 기록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2018년에도 현역으로 뛸 예정이며, 소속팀 요코하마 FCJ1리그 승격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2019년에도 재계약을 맺으면서 여전히 현역 선수로 뛰게 되었다.#

참고로 2017년도 이후로는 완전히 잉여 전력에 불과하다. 2020년도 시즌은 팀내 체력 테스트도 시원찮을 정도로 몸상태가 떨어진 상태고, 지는 경기에 버리는 카드 혹은 다 이긴 경기에 짬처리로 나오는게 전부였다. 정상적인 팀이라면 이미 방출되고도 남을 선수인 상황이다.

2020년 9월 23일. J1리그 최고령 선발 출전 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2012년 나카야마 마사시가 기록한 45세 2개월 1일이다.

2020년 12월 19일. 2020시즌 일본 J리그1 34라운드에서 요코하마 F.마리노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투입되어 약 5분간 경기장을 누비며 53세 9개월 23일로 일본 최고령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2021년에도 뛴다고 밝혔다. 야후 재팬댓글을 다룬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마저 미우라의 현역 연장에 대해서는 반응이 좋지 않다.[7][8]

2021년 3월 10일, 우라와 레즈 다이아몬드와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투입되어 약 1분 간 경기를 뛰며 자신의 J1 최고령 기록을 경신했다.

2021년 4월 28일, YLC(J리그 리그컵에 해당)에서 추가시간 투입되어 1분 경기를 뛰었다.

2021년 5월 5일, YLC에서 24분 경기를 뛰었고, 팀은 1-1로 무승부를 거뒀다.

2021년 5월 19일, YLC 우라와 레즈 다이아몬드 경기에서 후반 교체 투입되며 19분을 뛰었다. 그리고 이게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되었으며, 본인의 목표였던 1골은 결국 넣지 못했다. 결국 본인도 프로 무대에서 뛰기에는 한계를 느낀 것인지, 시즌 종료 후 이적을 고민중이라는 현지 기사가 떴다.

J2리그FC 류큐를 비롯해 JFL 스즈오카, FC 오사카, 고치, 오소시아스 교토, 간사이 등이며 해외 구단이자 알비렉스 니가타의 위성팀인 알비렉스 니가타 싱가포르도 영입 의사를 밝혔다고 하며, 곧 계약이 만료되는 요코하마에서도 재계약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우라는 단기간 승격과 같은 목표를 두고 100% 열정을 쏟을 수 있는 팀을 선택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연말까지 오사카에 머물며 내년에 뛸 팀을 결정한다. #

이후 4부 리그 격인 자신의 형인 미우라 야스토시가 감독으로 있는 스즈카 포인트게터즈로 이적한다고 보도되었다. #

2022년 1월 9일, 요코하마 FC가 2022시즌 선수단 등번호를 발표했는데 11번이었던 미우라는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결국 2022년 자신의 형이 감독으로 있는 4부 리그팀 스즈카 포인트 게터스로 임대 이적했다. 등번호는 요코하마 시절과 동일한 11번. 그리고 10월 30일 티아모 히라카타와의 경기에서 드디어 골을 넣었다. #

이후 자유 계약으로 포르투갈 2부 리그의 UD 올리베이렌스 이적이 유력하다고 한다. 2023년 1월 16일 스즈카 포인트 게터스 임대 종료 발표가 나오면서 UD 올리베이렌스 이적을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적에 성공할 경우, 유럽 리그에서 뛰는 아시아 최고령 선수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

2023년 2월 1일, 리가 포르투갈 2UD 올리베이렌스로 임대 이적했다.# 하지만 2달이나 일절 경기도 못 나오다가 4월 23일 리그 경기에서 3분 출전하여 데뷔했다. 팀이야 4-1로 이겼지만 나이가 56세인 그는 전혀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사실 이 이적도 미우라가 뛰던 요코하마 FC의 소유주인 오노데라 그룹이 소유한 UD 올리베이렌스였기에 이뤄진 것이다. 즉 필요해서가 아니라 후술하는 대로 최고령 기록 허울로 벌어진 이적이다. 거기다 시즌 최종전에서 종료 직전 몇 분을 뛰었는데, 이 경기에서 미우라에게 경기 MVP를 수상하며 큰 논란이 일었다. 사실상 누가 봐도 억지로 MVP를 떠넘겨 준 것이고, 미우라 본인도 이건 아니라며 수상을 거부했으나, 수상을 거부하면 벌금을 물 것이라는 엄포에 하는 수 없이 그냥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그만 좀 하라며 여론이 험악한 상태고, 결국 포르투갈 2부 리그라지만 엄연히 유럽 리그라도 돈 앞에 장사 없다는 걸 보여준 셈.

그러나 2023년 7월 11일, 1년 임대 연장을 했고 2023-24 시즌에도 UD 올리베이렌스에서 뛰게 되었다.# 8월 20일 2023-24 시즌 리그 2라운드 비야베르덴세전에서 후반 추가 시간에 교체 출전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img.upload.tom.com/130325667915606765030.jpg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공한증을 벗어나 거의 대등해진 1990년대부터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홈에서 열린 1992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해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기록한 골은 단 한골이었지만 순도가 엄청났다. 당시 조별리그 3차전을 앞두고 일본은 UAE와 북한을 상대로 두 번 다 비겼는데, 하필 3차전 상대가 가장 강한 이란이었다. 비겨도 탈락인 상황에서 미우라가 87분에 버저비터나 다름없는 1대0 결승골을 터뜨렸고,[9] 이 골이 아니였으면 일본은 홈에서 조별리그 광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올라간 토너먼트에서 차례로 중국과 사우디를 꺾으며 일본이 첫 아시안컵 우승을 달성했다.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 최종 예선전에서 후반 15분에 터진 미우라의 결승골로 일본은 9년 만에 한국을 꺾었다. 당시 중국보다 더한 공한증에 시달리던 일본은 이 경기 승리로 징크스를 확실히 깼다.(9년간 A매치는 2무 7패)

그래서 일본은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한국은 거의 탈락을 예상하고 있었으나…한국이 북한전을 기대 이상으로 잘 뛰어 3점차 이상으로 이긴데다 일본이 종료 30초 전 이라크를 상대로 골을 먹고 비기는 바람에 일본은 최종 예선 3위로 탈락하고,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2장은 한국과 사우디가 나눠가졌다. 이 때 미우라 카즈요시는 "축구의 신이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그런 캡틴 츠바사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날의 일이 미국 월드컵 기간 내내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비극이 일어나고 1년 후, 미우라는 대한민국과 다시 한 번 만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축구 8강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대한민국 앞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일본은 난타전 끝에 동점 골을 기록한 유상철 및 2골을 넣은 황선홍대한민국에 3:2로 패해 8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일본은 미우라와 이하라 마사미가 골을 넣었다. 이하라는 종료 직전 황선홍에게 PK를 내주었다.

당시 전성기였던 미우라에게는 도하의 비극이 천추의 한이 되는데, 그 이후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지역예선에서도 활약하면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사상 첫 본선행을 이끌었으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이 본선 엔트리에서 미우라를 제외시켰다.

미우라는 예선 초반에 팀의 주공격수이자 주축으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전에선 혼자서 4골을 기록하며 상대 골문을 아주 탈탈 털었지만, 세번째 경기인 한국전, 흔히 도쿄대첩으로 일컬어지는 경기 당시 한국의 최영일이 담당마크한 이후 폼이 확 죽어버렸다. 이와 관련해서 최영일과 그에 대한 여러가지 썰들이 한국 올드축구팬 사이에서는 잔잔히 화제가 됐었다.[10] 이 때문에 미우라는 득점이 싹 막히며 일본 대표팀 부진의 원흉으로 낙인찍혔고 심지어 경기 후 청문회 상황까지 몰리기도 했다. 어쨌든 일본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의 본선 엔트리 탈락을 두고 일본 내에서는 너무했다는 얘기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미우라가 본선 엔트리에 빠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의견도 많았으며 심지어 "일본은 영웅을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논설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월드컵 본선에서 미우라를 대신하여 일본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나선 건 나카야마 마사시조 쇼지였는데, 나카야마는 예선 마지막 경기인 자메이카전에서 골을 넣으며 일본 대표팀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조 쇼지의 경우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역시 미우라를 데려갔어야 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다만 이때의 선수 구성을 보면 조 쇼지는 당시 대표급 선수 중 유일하다시피 한 포스트 플레이어였고, 나카야마는 활동량이 많은 하드워커 스타일로 어떤 상대든 기본은 하는 데다 1998년 J리그 전반기에 4경기 연속 해트트릭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절정의 폼을 찍고 있었다. 미우라는 2010년대 식으로 표현한다면 크랙 성향의 공격수이지만 이 때는 최전방에 서서 아시아 수준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제3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로페스 바그너와 다툰 셈이다. 로페스는 미우라가 침묵한 최종예선 중후반을 이끌고 간 스트라이커이며, 결과적으로 로페스 또한 본선에서 출장기회는 적었지만 나카야마의 면피성 골을 어시스트하는 공헌을 했다.

오카다 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다. 가장 큰 정황은 이란과의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오카다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프리킥을 미우라가 멋대로 차서 날려버린 것으로, 오카다는 감정적인 대응임을 본인도 인정했지만 질책성으로 미우라를 조기 교체하였으며 이후 중용하지 않았다. 미우라는 현재도 '불러주기만 하면 반드시 참가한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이가 50을 훌쩍 넘긴지라 꿈이었던 월드컵 본선 출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는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로 합류를 타진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대신 2012년에 열린 풋살 월드컵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소원 성추를 했다.

1993년 당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좌절시킬 뻔한 골의 주인공이었기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으나, 세월이 많이 지난 데다가 결과적으로 일본은 예선에서 탈락하고 한국은 본선에 진출했기에 그러한 감정도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한일전을 장식했던 추억의 축구선수들 중 한 명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오히려 50을 훌쩍 넘은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뛰냐며 놀라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 J리그 최고령 프로 선수로서 매일 자신의 기록을 자신이 갱신하는 모습에 대부분의 한국 축구팬들도 일본 선수인 것과 상관 없이 존경과 호감을 표하는 팬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4. 최고령 출전 기록

J리그 최고령 출전 선수 기록을 가지고 있고, 현재 역대 최고령 현역 축구 선수이므로 시합에 출장할 때마다 기록이 갱신된다.[11][12]

일본에서는 그 외에 미우라와 동갑인 나카야마 마사시(J3리그 아술 클라로 누마즈)가 프로 선수 생활을 2020 시즌까지 이어갔지만 한번 은퇴한 것을 번복한 데다 리그에 엔트리 등록이 되지 않아 형식에 불과하다.

4.1. 최고령 출전 기록 허울 논란

미우라는 영웅 만들기와 기록에 대한 집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젊은 선수들과 전혀 경쟁이 되지 않는 만 55세의 중년이 이벤트 형식 비슷하게 한 번씩 경기에 나서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미우라가 고령의 나이임에도 선수로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50이 넘은 나이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 미우라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몸관리는 본받아야 하며,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프로 팀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최고령 기록을 자세히 파보면 시즌 중에 풀타임을 소화한 경기는 전무하고 출장 경기 수 늘리기 외에는 공격이나 수비에 대해서는 별 거 없다보니[13] 전형적인 영웅 만들기와 기록 집착의 결과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물론 앞선 언급과 마찬가지로 이는 황혼기를 넘겨서까지 현역으로서의 집념을 불태우는 선수 미우라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일본의 별다른 의미 없는 기록 만들기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당장 국내 사례를 찾아보면 만 41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동국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두 자릿수 득점을 이어갔었으며, 김병지는 만 44세까지 K리그에서 현역으로 활발하게 뛰며 706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썼다. 그는 은퇴하기 전 시즌까지도 K리그1의 주전 골키퍼로 뛰었으며 은퇴의 직접적 원인도 셋째 아들의 학교 폭력 가해 무고였다. 만 55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는 미우라가 대단해 보이면서도 너무 과하게 기록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질만할 일이다. 심지어 그의 부친인 나야 노부오조차 이제는 그만 뛰고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할 정도다. ‘52세 현역’ 미우라, 시즌 초부터 ‘은퇴 권고’ 받았다 만 52세 현역 선수?허울 뿐인 일본의 미우라 ‘기록 만들기’

아무리 미우라가 나와도 기네스북에서는 적어도 90분, 즉 1경기만이라도 전체 시간만큼 시즌에 나와야지 인정한다. 게다가 프로 축구 선수라고 인정받으려면 시즌 경기 풀타임으로 최소한 2게임을 뛰어야 한다. 몇분씩 나눠서 180분 이상으로 나와도 인정을 해준다?이렇게 한다면 나이 80~90 넘은 축구선수도 등록하고 몇 분 정도 출전만 하면 기네스북에 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야 최고령 축구 선수 정도로 인정은 해주지만 일본 기네스북도 인정 안하는게 미우라 경기 출전 시간이 180분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019년만 해도 심지어 2분 정도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2021년에는 모든 경기 다 합쳐 40분 넘게 나오긴 했지만 역시나 2경기 시간은 못 넘었다.

이와 달리 기네스북으로 공식 인정받은 최고령 선수들 기록을 봐도, 이라크 출신 유태인으로 이스라엘 축구 선수인 이샥 하이크가 2019년 3월 5일에 만 73세에 리가 베트 사우스A(이스라엘 4부리그) 이로니 오르예후다 소속의 골키퍼로 나왔는데 경기는 5실점을 당하면서 1-5 참패를 당해야 했지만 하이크는 당당하게 90분 풀타임을 뛰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기네스북에서 세계 최고령 프로 선수로 인정했다. 미우라가 기네스북에서 저런 인정을 받은 건 없다.

그래도 52살 최고령 프로 선수 골기록이 있긴 했지만 이조차도 2020년 이집트 3부리그 `식스스 오브 옥토버`(6th of October) 소속으로 3월 10일 3부리그 경기에 나와 무려 만 75세의 초고령 축구 선수인 에즈 엘딘 바흐데르가 공식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미우라의 최고령 골 기록도 깨지고, 최고령 축구 선수 출전기록도 새로 갱신했다. 그가 넣은 골로 경기도 1-1로 비겼다.

굳이 따지자면 미우라는 최고령 1부 리그 출전 기록을 가진 선수로 인정받고 있긴 하다. 당연히 1부리그 90분 풀타임 출전이 아니기에 이조차도 기네스 비공식 기록이지만 말이다. 결국 그도 2022년부터는 4부 리그로 임대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갑자기 포르투갈 2부 리그로 이적했지만 상술한 대로 그 팀조차도 바로 미우라가 속해 있던 요코하마 FC의 소유주인 오노데라 그룹이 소유한 포르투갈 팀이라 현지에서도 일본인을 어거지로 영웅화하고자 아시아 최고령 유럽 선수라는 허울 좋은 기록을 남기고자 데려왔다는 비아냥만 받았고, 감독도 당연히 주전으로는 안 쓰고 있다가 다 이긴 경기에서 교체로 3분 정도 뛰게 하여 유럽 리그 최고령 기록을 세워줬다. 차라리 젊은 선수들이 입단했다면 유망주들에게 선진 축구를 체험할 기회를 줬다는 순기능이라도 있지만, 미우라의 이적은 그저 환갑을 눈앞에 둔 뒷방 어르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이라,[14] 축구는 커녕 거동도 불편할 정도의 중상을 입지 않는 이상 미우라의 최고령 현역 기록에 대한 집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4.1.1. 숨겨진 뒷사정

그러나 미우라의 도전 정신을 넘어 요코하마 FC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우라와 계약 연장을 하는 데에는 사실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요코하마 FC는 말 그대로 역사의 정통성과 근본이라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구단이다.

본디 요코하마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전신이었던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요코하마 플뤼겔스 두 팀이 있었다. 헌데 플뤼겔스의 모기업이었던 ANA와 사토 공업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플뤼겔스도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는 듯 했으나, 해체는 하지 않고 마리노스로 합병으로 사라지게 된다.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F가 바로 플뤼겔스의 F이다.

물론 플뤼겔스의 팬들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고, 그러한 팬들이 모여서 새로이 만든 시민구단이 바로 요코하마 FC였다. 하지만 시민구단이 그렇듯[15] 재정도 입에 풀칠할 수준밖에 안되고 스폰서 모집도 힘들며 관중수도 J리그서 최하위권이다. 인터넷서 요코하마 FC를 검색하면 80% 이상 요코하마 F. 마리노스 관련 글이 뜬다. 그나마 요코하마한테 있는 것이 플뤼겔스를 이었다는 역사의 정통성과 2005년부터 뛰면서 승격도 경험시켜준 미우라 카즈요시 정도 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잔혹한 이유 때문에 요코하마 FC는 미우라 카즈요시라는 선수의 존재감과 이름값만으로도 스폰서의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이고, 또한 미우라가 출전하는 것 만으로도 언론에서 엄청난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미우라 역시 경기 말고도 광고 촬영, 언론 인터뷰, 방송 출연, 구단 행사나 강연에 참여하며 요코하마 FC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미우라가 있는거 자체로도 구단은 홍보효과와 재정에 엄청난 도움이 되며 모르는 상태라고 하면 엔트리를 떡 차지하면서 후배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빼앗는다고 비판받을 수는 있지만 사실은 미우라가 요코하마 FC라는 구단의 구명줄이라 후배선수들의 일자리를 유지시켜 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결코 우습다고 볼 수 없는 말이 있는데 "요코하마 FC에 재정난이 온다면 그 시작은 미우라의 은퇴부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후배 선수의 자리 하나 빼앗는 것과 구단이 없어지며 사라지게 될 선수들의 자리수를 비교하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결국 요코하마 FC - 미우라 서로가 서로에게 얻는 것이 너무 많으니 주위의 비난은 무시하면서 계속 현역 연장을 하는 것이다. 사실상 로스터를 차지하는 앰버서더 정도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프로 축구계의 선수로서는 비판을 받아도 전혀 할말이 없을 만큼 철저한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지만, 결국 냉정한 현실은 프로는 결국 돈이라는 것이다. 구단으로서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우라를 출전시키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우라 개인도 이제 와서 자신을 계속 받아주는 요코하마 FC를 떠나 타 팀으로 이적할 리도 없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미우라의 이적을 받아줄 팀도 찾기가 힘든 것도 있다. 일본 축구에서 가지는 위상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타 팀에서 앰버서더로 모셔갈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주전 자원들로도 인기를 유지하는 다른 팀에서 굳이 로스터를 잡아먹으면서까지 미우라를 기용해 줄 이유는 없다.

종합해 보면, 선수로 남고 싶은 미우라와 재정이 어려운 구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사실상의 플레잉 앰버서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2021년에도 재계약을 발표하고 현역 연장을 한다. 3년간 득점을 못해 봤으니 자신이 많이 부족했다며 2021년은 1골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1골도 넣지 못하고 4년 동안 무득점이었고 2022년부터는 4부리그에 가게 되었다. 4부리그에서도 2022년 9월초까지 6경기 출전하여 0골이었으나 시즌 막바지인 10월 30일에 드디어 PK로나마 골을 넣었다.

5. 여담



[1] IFFHS에서 주관하던 시기에 수상했다. 1994년부터 AFC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1994년 이전의 수상 기록은 AFC 입장에서 비공식 기록에 해당되지만 전체적인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에서는 인정받고 있다.[2] 1993년 J리그 출범 이후 팀명 변경[3] 풋살 클럽. 잠시 풋살선수로 뛸 때 소속됐었다.[4]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득점 2위[5] 종합격투기 선수이며, 한국에서 외모가 금태양 실사화라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6] 이전 모기업이던 요미우리 신문이 손을 떼었다. 베르디 가와사키는 이 때 리그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뿌리던 팀으로, 미우라의 연봉은 지금 J리그에 가져와도 일본인 중에서는 최고급에 해당하는 2억엔 이상이었다. 당시 세계 축구 전체를 다 뒤져도 최고 연봉이 일본 엔화로 3~4억엔 수준이었으며, 그것도 미우라가 실질적으로 챙기는 지급액은 6억엔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팀 전력은 이미 하위권으로 처져 흥행성도 없었으며, 그 결과로 베르디는 연간 30억엔에 가까운 적자를 안고 있었다. 결과 파이어세일 후 1999년의 팀 전체 연봉이 미우라 한명분보다 적었다고 한다.[7] 국내 축구 컨텐츠 유튜브에서도 이 반응들을 소개했는데, 서형욱의 뽈리TV 영상에서 읽어준 댓글 중에서 "경기 뛰다가 심장마비 오면 누가 책임질꺼야?"라는 댓글이 가장 압권이다.[8]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차라리 플레잉 코치를 하라는 의견도 간혹 나오지만, J리그는 NPB와는 다르게 선수의 지도자 겸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로 엔트리 등록을 하지 않으면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NPB는 21세기에도 후루타 아츠야다니시게 모토노부 이렇게 두 명의 선수 겸 감독이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9] 도하의 기적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때는 추가 시간을 굉장히 박하게 주는 시절이었다.[10] 최영일은 위 언급된 1993년 월드컵 예선과 1994년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미우라를 마크한 바 있다. 이미 그 전에 친선경기까지 해서 세 번 맞붙어 세 골을 내준 상대인 만큼 제대로 파악하고 나온 것이다.[11]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고 울산 현대 사령탑을 맡은 홍명보보다 2살 많으며, 대한민국 네임드 스트라이커이자 감독이었던 황선홍보다 1살이 많다. 홍명보와 황선홍이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국대에서 은퇴했었던 점을 본다면 미우라 카즈요시가 얼마나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 국대 감독인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이 그보다 1살 어리고 파울루 벤투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그보다 2살 어리다. 여기에 현재 행정가와 감독으로 활동중인 하석주위르겐 클롭과 동갑이다.[12] 야구팀까지 확대해도 그보다 나이 어린 감독이 수두룩한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이나바 아츠노리 감독은 미우라 카즈요시보다 5살이나 어리고, 이나바 이전에 감독을 맡았던 고쿠보 히로키마저도 1971년생으로 미우라 카즈요시보다 4살이나 어리다. 요코하마 연고 야구단의 프랜차이즈이자 감독 미우라 다이스케는 1973년생으로 미우라 카즈요시보다 6살이나 어리다. 중간교체 없이 1492경기를 연속 출전한 야구계의 철인이자 전 한신 감독 또한 1968년생으로 이 분보다 1살 어리다. 또한 그가 축구 유학을 갔던 브라질에서 프로에 데뷔한 해인 1986년에 태어난 혼다 케이스케가 현재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고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을 정도이다. 잉글랜드의 폴 개스코인, 프랑스의 다비드 지놀라,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등이 그와 동갑이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미우라보다 2살이 어리다.[13] 비슷한 사례로 만 50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던 주니치 드래곤즈야마모토 마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야마모토 마사는 50이 넘어서도 땜빵 선발로 등판하기도 하는 등 적어도 미우라보다는 보여준 게 많다.[14] 즉 올리베이렌스의 감독 입장에서도 본인은 내키지 않지만 미우라 본인이나 모기업의 압박 때문에 가비지 타임이라도 때우라는 의도로 투입시켰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다.[15] 사실 팬들이 창단을 주도했을 뿐이지 지금의 요코하마 FC는 시민구단도 아니다.[16] 영상 1:09를 보면 미우라를 수비하는 이기형이 거의 부동 자세로 미우라의 페인팅을 지켜보는 것을 볼 수 있다.[17] 원래는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에서 고생을 한 뒤로 많이 둥글어진 것이라고 한다.[스포일러] 그리고 작중에서 코난에게 자신의 손목 보호대를 선물로 주면서 자신이 예전에도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손목 보호대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정체는 범인이었다.[19] 송재익 캐스터의 말로는 도쿄에 가서 중계를 준비하던 중에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를 봤다고 했다. 요컨대 그냥 본인이 지어낸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