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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9:35:49

김명인(독립운동가)

파일:김명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김조동(金朝東)
인범(仁範)
출생 1899년 4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법상동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
사망 1966년 8월 22일[1]
경상북도 안동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21호
본관 신 안동 김씨[2]
가족 아버지 김계한, 어머니 권고인
형 1명, 남동생 2명
학력 협동학교 (졸업)
교남학원 (고등과 / 졸업)
종교 개신교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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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9년 4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법상동(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김계한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고인(1870 ~ 1968. 8. 12)[3]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계명학교를 재학한 뒤 1907년 설립된 안동의 근대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졸업했으며, 20세 때 대구 교남학원 고등과에 재학,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부친 김계한이 주도한 안동면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1921년 1월 안동 계명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학생들에게 '망향가', '소년행진곡', '용진가' 등 애국 창가를 가르치고 일제의 침략행위를 성토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1921년 2월 3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3월 1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1921년 4월 11일에 공소를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3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김명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3월 11일 본래 안동시 금곡동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

3. 참고 문헌



[1]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3년 3월 16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2] 휴암공파 28세 동(東) 항렬.[3] 권명수(權明銖, 1839 ~ 1918. 9. 13)의 넷째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