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대통령비서실 소속 경제 관료에 대한 내용은 김병환(공무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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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2월 19일 |
사망 | 1947년 1월 16일 (향년 57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 |
본적 | 경상남도 밀양시 |
조직 | 의열단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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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경남 밀양군 밀양장날에 윤세주, 윤치형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수천명의 군중들을 모아 시위를 하였고 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생 160명과 함께 밀양 만세시위를 벌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출옥 후 비밀리에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0년 5월 조선총독부 고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을 목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김원봉, 곽재기가 폭탄 3개를 국내로 반입하였을 때 이병철이 전달해준 그 폭탄을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었고 "밀양 폭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한 후 징역 3년을 복역하였다. 이후 1925년 11월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군자금으로 1만여명을 탈취한 혐의로 10년 후 체포 당했을 때 연루자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0월 25일 만에 출옥했다고 알려진다.
8.15 광복 이후 동료들의 권유로 밀양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잠시 맡아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6년 좌익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미군정 당국에 체포되었다. 머지않아 석방되었지만 이때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1947년 1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2]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3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