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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2:16:36

김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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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color=#000> 김화 전투
金化戰鬪
시기 1637년 2월 20일 ~ 23일
(음력 1637년 1월 26일 ~ 29일)
장소 조선, 강원도 김화현 근북면 백덕리, 금곡리 일대[1]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청나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류림
파일:조선 어기.svg 홍명구
파일:조선 어기.svg구현준
파일:조선 어기.svg허노
타타라 잉굴다이
마푸타
병력 5,000 명 30,000 명[2]
피해 1,000 여 명 사상 불명
결과 조선군의 전술적 승리.

1. 개요2. 상세3. 전투의 전개

[clearfix]

1. 개요

자모산성 전투라고도 불리고, 김화 백전(대첩)으로도 알려져 있다.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당시의 대표적인 승첩이다. 다만 청나라쪽 기록에선 이를 자신들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청군이 여러 부족에서 잡다하게 뽑은 몽골 기병 3,600명이 강원도랑 함경도를 약탈하러 가는 길에 조선군 일부를 박살낸 정도로 인식한다. 특히 당시 청나라가 병자호란에서 실제로 동원한 병력이 4만 5천 정도로 추산되기 때문에 조선측 기록인 적군 3만명은 매우 과장된 기록이다.

2. 상세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생창리에 위치한 자모산성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다.[3]

병자호란 당시의 전투들은 실록은 고사하고 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에도 제대로 남아 있지않아 상세한 진행 과정을 알기 어려운 전투가 대부분인데 이 전투는 참전자인 류림과 홍명구의 후손들이 남긴 기록 외에 김화 지역에 들렀던 송시열과 박태보가 전투를 직접 목격한 김화현의 관노 유계홍의 증언을 각기 채록해 남긴 글이 그들의 문집인 <송자대전>과 <정재집>에 실려 있어 전투 진행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3. 전투의 전개

파일:Screenshot_2016-10-20-23-57-31-1.png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갇혀있던 인조를 지원하기 위해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사 류림(柳琳)이 평안도 근왕군 5천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들은 평양을 늦게 출발해 # 참고하면 좋은 글 1637년 1월, 김화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류림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김화의 자모산성으로 들어가 싸우자고 이야기 했으나 홍명구[4]는 이를 거부했다. 두 사람은 견해 차이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연려실기술을 비롯해 이 전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홍명구와 유림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따로 진영을 꾸렸는데 홍명구는 김화읍 생창리 탑골의 개활지에 주둔했다. 유림은 홍명구 진영의 왼편, 잦나무가 빽빽한 백수봉과 백전 능선에 진을 구축한 다음 나무를 베어다 목책을 설치했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청군은 양 진영의 전방에 진을 친 다음 홍명구 진영부터 공격했다. 순차적으로 20기, 30기, 100기를 동원해 홍명구의 태세를 알아보고 시선을 끄는 사이 다수의 기병이 홍명구 진영의 뒤편에 위치한 산으로 올라가 산 위에서 들이닥쳤다. 산위에서 돌격한 청군은 2개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유림 군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한 부대는 홍명구 진영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기병이 산위를 내달려 기습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 제대로 후방을 방비하지 않았던 홍명구 진영은 그대로 유린당하고 홍명구도 전사한다.

이어 청군은 유림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으로 총 공격을 감행했다. 유림은 사격 통제를 철저히 해 청군이 진영 10보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때 홍명구 진영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패잔병들이 유림의 진영 앞에 몰려왔지만 그들을 들여보내려 했다간 바로 뒤에 붙은 청군이 난입할 게 뻔했음으로 유림은 진영을 닫고 사격 명령을 내렸다.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가해진 일제 사격으로 돌격해온 청군의 제1파는 치명타를 입었다.

홍명구와 달리 유림은 진영의 위치 선정부터가 탁월하여 3면이 가파른 산악 지형이고 1곳으로만 접근이 가능해서 홍명구 진영을 유린할 때 쓴 기습을 쓸수 없었다. 게다가 그 입구도 좁았고 미리 설치해 둔 목책으로 한번에 접근할 수 있는 병력은 더욱 줄었다. 기병 위주의 청군으로선 그런 상황에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재차 돌격했으나 역시 조선군의 10보 거리 일제 사격에 분쇄되었다. 청군의 공격은 종일 계속되었으나 모두 저지되었고 결국 청군은 무수한 피해를 낸채 퇴각한다.

하지만 대승에도 불구하고 홍명구 군이 전멸해 군세가 줄었으며 유림 군이 보유한 탄약도 격전으로 대거 소진되어 퇴각이 불가피했다. 유림은 총포에다 화승의 길이를 다르게해 잣나무에 걸어두고 불을 붙여 밤새도록 총포 발포 소리가 들리게해 적의 추적을 따돌렸다. 그리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나설때 쯤에는 이미 삼전도의 치욕이 치러지고 있는 마당이었다. 유림은 가평에서 항복 소식을 듣고 교지에 따라 다시 평안도로 복귀했다.

탁월한 전술적 신견과 놀라운 침착성으로 승리를 이끈 유림이지만 받은 대우는 죽은 홍명구에 비해 심하게 박했다. 인조는 홍명구의 장렬한 전사를 높게 평가했으며 효종 9년, 홍명구는 충렬공으로 봉해졌다. 김화 지역에는 홍명구를 기리는 사당도 세워졌다. 반면 유림은 상관인 홍명구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도망쳐오는 홍명구의 패잔병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3년 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고 140년 뒤인 정조 20년에 와서야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게다가 후대에 임경업의 심양 급습 작전에 거부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소인배, 겁쟁이 취급까지 받는다. 사실 임경업 항목에도 있지만 유림이 거부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상식적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전략인터라 거부하는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임경업의 전략적인 문제가 현실적이지 않고 무모한터라 더 비판받는다.

자모산성 전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지만 경과를 보면 자모산성 전투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자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한 유림 본인조차도 홍명구의 기묘한 전장 선택에 의해 자모산성의 맞은 편 능선에서 싸웠으며, 자모산성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1] 현 김화군 근북면 백덕리, 금곡리 일대로, 대부분 전적지는 남방한계선 이북이다.[2] 아래의 서술대로 과장이며 실제 병력은 3600명일 가능성이 높다.[3] 철원의 자모산성은 성재산성(城齋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4] 홍명구는 정묘호란 때 종사관으로서 평안 감사인 윤훤에게 평양에서 철수해서 전열을 가다듬자고 건의를 올렸다가 본인은 파직되고 윤훤은 처형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