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6년 12월 14일 |
한성부 동서 성 밖 숭신방 동문외계 정자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248번지) | |
사망 | 1974년 4월 13일 (향년 77세) |
종교 | 불교[2] → 기독교 |
상훈 | 2016년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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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6년 12월 14일 한성부 동서 성 밖 숭신방 동문외계 정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248번지)에서 어머니 함씨(咸氏, 1861 ~ 1936. 11)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위로 형 낭승근(浪承根)[3]이 있었다. 이후 직물 직공으로 일했다.1919년 3월 23일 밤 경기도 경성부 종로5정목에서 이종원(李鍾遠)·윤수영(尹守榮)·민귀득(閔貴得)·박홍식(朴弘植)·박규동(朴奎東)·김동엽(金東燁)·김도치(金道致)[4]·김완석(金完錫)·정순길(鄭順吉)·최순근(崔順根)[5]·김현성(金顯星)·홍진옥(洪鎭玉)·김두성(金斗成) 등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조선독립만세를 따라 불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했고, 그해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 중 낭완근 자신에 대한 부분이 일부 취소되어 징역 6개월형으로 감형받았다. 이에 상고했지만 1919년 9월 2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왕래방해 및 소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20일 출옥했으며, 출옥 후에는 낭승혜(浪承惠)로 개명했다. 1923년 감리교 소속의 동대문교회에서 설립한 흥인배재학교(興仁培才學校)의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고양군 숭인면 제기리(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81번지로 이주했고, 1934년 남부 지방에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하자 제기리 교풍회(矯風會)에 의류 1벌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1974년 4월 13일에 별세했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