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436f4d><colcolor=#fff> 제10대 헝가리 왕국 국방장관 너지바조니 너지 빌모스 Nagybaczoni Nagy Vilmos | |
출생 | 1884년 5월 30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퍼러이드 | |
사망 | 1976년 6월 21일 (향년 92세) |
헝가리 인민공화국 필리스처버 | |
국적 |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루도비커 사관학교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상장 |
경력 | 제10대 헝가리 왕국 국방장관 |
1942년 9월 24일 ~ 1943년 6월 12일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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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군인으로 헝가리 왕국 제10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을 보호해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2. 생애
1884년 트란실바니아의 세켈리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902년 고등학교를 수석졸업 후 루드비커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졸업한뒤 헝가리 욍국군에 입대했고, 1909년 뛰어난 능력으로 제국전쟁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30세의 나이로 소령에 진급해 총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모장교로 세르비아 침공, 카르파티아 전선, 고를리체 공세, 볼히니아 작전 등에 참여했다. 종전 후 건국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적군에서도 계속 경력을 쌓았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붕괴된 후 재건국된 헝가리 왕국의 헝가리 왕국군 총참모부에서 다시 근무했다.
1927년 제1기마보병사단의 사단장에 임명된것에 이어 1931년 헝가리 왕국군 총사령관의 부관이 되었다. 1937년 준장 진급 후 1년뒤 1938년 제1기병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939년 제1차 빈 중재가 체결되어 코시치가 헝가리 왕국에 넘어간뒤 코시치에 진입하는 헝가리 왕국군을 지휘했고, 보병총감을 단기간 역임 후 1940년 제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9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루마니아 왕국의 트란실바니아 북부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넘기는 제2차 빈 중재를 체결하여 군대를 이끌고 마로스바사렐리에 진입한 후 국경 강화 및 식량공급을 감독했다.
1941년 3월 최고사령부에 의해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1942년 9월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국방장관 재직 당시 군의 정치간섭을 최소화했고 발칸 반도의 유대인 10000명을 세르비아 보르의 구리 광산에 보내라는 나치 독일의 요청을 거부해 극우정당들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1943년 장관직을 사임했다.
1944년 화살십자당과 나치 독일의 쿠데타 이후 필리스처버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종전때까지 수감되었다. 미군에 의해 풀려난 후 헝가리로 돌아와 군인 연금 평가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1948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뒤 아파트와 연금을 박탈당했다. 이후에는 묘목 관리자로 일하던 도중 1958년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 루마니아 대통령 페트루 그로자의 도움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군인 연금을 다시 받았다.
1965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을 보호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스라엘 야드 바셈 연구소로부터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