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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31 20:23:33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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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3.2. 의회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2. 배경

1642년 10월 23일 엣지힐 전투에서, 의회군은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해 의회군 내 슈퍼스타로 떠오른 올리버 크롬웰은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회는 1644-1645년 겨울 동안 군대를 개편하는 안건을 고려했다. 크롬웰의 추종자인 윌리엄 윌러 경은 각 지방에서 올라온 민병대를 단순히 모아놓기만 하면 엣지힐 전투에서 그랬듯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 군기가 엉망진창인 상황이 지속될 게 뻔하며, 이런 식으로는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이 비판을 받아들여 신모범군(New Model Army)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먼저, 의회는 '자기부정 조례(Self-Denying Ordinance)'를 발표했다. 이 조례는 군 내의 장교들 중 군직에 있어서는 안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며 자발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즉, 단순히 정치적 영향력을 내세워 군대의 요직을 꿰어찼지만 실제 전투에선 무능한 모습으로 일관한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물러날 것을 권유하고 그 자리를 군사적 역량이 출중한 장교들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후 신모범군은 로버트 페어팩스 경의 지휘하에 1645년 2월 설립되었다.

신모범군의 근간은 에식스 백작, 맨체스터 백작, 윌리엄 윌러 경의 군대였다. 신모범군은 기병 11개 연대(1연대 당 600명), 용기병 1개 연대(1,000명), 보병 12개 연대(1연대 당 1,200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포병대에는 별도의 기지가 주어졌는데, 여기에 소속된 병사들 중 많은 이들은 본래 국왕군이었다가 의회군에게 포로로 잡힌 자들이었다. 그리고 탄약을 잘못 관리에 화재가 발생할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방화벽을 세웠으며, 한 무리의 사수들은 총기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하지만 신모범군은 제대로 훈련하기도 전인 1645년 4월에 출격했다. 로버트 페어팩스 경은 남서쪽에서 타운톤으로 진군했고, 올리버 크롬웰은 옥스포드에 주둔한 국왕군이 런던으로 진군하는 걸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1645년 5월 8일, 국왕군은 옥스퍼드에서 적의 움직임에 대항할 방안을 모색했다. 많은 신하들은 신모범군이 제대로 훈련될 시간을 준다면 일이 골치아프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니 당장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찰스 1세의 조카인 루퍼트 왕자는 마스턴 무어 전투의 패배 이후 상실해 버린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진언했고, 찰스 1세는 조카의 주장에 따랐다. 이에 따라 루퍼트 왕자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로 향했고, 조지 고링 경은 기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서부 지역으로 가서 왕을 추종하는 병사들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바로 이때, 타운톤으로 진군하고 있던 로버트 페어팩스는 의회로부터 "전쟁을 조속히 끝내야 하니 옥스퍼드를 공략하고 국왕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페어팩스 경은 1645년 5월 19일 옥스퍼드로 진군했고, 뒤이어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가 합세했다. 이에 당황한 찰스 1세는 루퍼트 왕자와 조지 고링 경에게 당장 옥스퍼드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루퍼트 왕자는 속히 돌아왔지만, 조지 고링 경은 명령을 무시하고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 눌러 앉았다.

5월 30일, 에이틴 경 제임스 킹의 군대가 레스터 경을 체포하고 옥스퍼드를 포위한 의회군을 위협했다. 이에 크롬웰은 동부 카운티로 진군해 이들에 대항했다. 그 후 페어팩스는 6월 5일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행진했다. 찰스 1세는 페어팩스가 포위를 풀어 북쪽으로 향했다는 걸 보고 크게 기뻐하며 인근의 초원에서 사냥을 즐겼다. 그런데 6월 12일, 한창 사냥에 열을 올리던 찰스 1세는 페어백스의 군대가 그가 있는 곳에서 10마일 떨어진 키슬링버리에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6월 13일, 크롬웰은 그의 기병대와 함께 페어팩스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에 찰스 1세는 북동쪽의 마켓 하버러로 철수했다. 페어팩스는 그를 추격했고, 의회군 전위대는 나세비에서 여관 밖에서 식사중이던 왕당파 무리들을 체포했다. 왕당파는 신모범군의 이같은 신속한 진군에 경악했다. 이때 마침 루퍼트가 도착하긴 했지만 의회군에 비하면 열세였고, 조지 고링의 기병대는 좀처럼 돌아올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6월 14일 이른 시간에 소집된 전쟁 위원회에서 아군 기병대가 적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니 철수 대신 한판 붙어보기로 결정했다.이리하여 1차 잉글랜드 내전의 향방이 결정될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

3.2. 의회군

4. 전투 경과


1970년작 영화 크롬웰에 묘사된 네이즈비 전투.

1645년 6월 14일 새벽 5시, 의회군 본대가 네이즈비에 도착했다. 로버트 페어팩스 경은 처음에 나세비에서 클립스턴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계곡의 밑바닥에 군대를 주둔시키려 했다. 하지만 크롤뭴이 루퍼트 왕자의 기병대를 유인할 필요가 있다고 진언하자, 그는 그 말에 따라 나세비 능선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다. 한편 루퍼트는 동 파른돈과 옥센돈 마을 사이에 있는 마켓 하버러 남쪽 능선에 군대를 패치한 뒤 적의 진영을 살펴본 후 적의 좌익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계곡 밑바닥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국왕군은 클립스턴을 통과하여 시버토프트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세비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갔다. 이것을 지켜본 로버트 페어팩스 경은 아들 토머스 페어팩스 경에게 군대를 왼쪽으로 이동시켜 나세비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양군은 네이즈비에서 맞닥뜨렸다.

국왕군은 우익에 루퍼트 왕자가 지휘하는 2,000명의 기병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중앙엔 아스틀리 경이 지휘하는 보병대가 배치되었고 토머스 하워드 대령이 지휘하는 기병 800명이 이 보병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좌익에는 랑데일 남작이 지휘하는 기병 1,500명이 배치되었으며, 버나드 스튜어트 경이 지휘하는 900명의 기병대와 일부 보병대가 예비군으로 배치되었다. 아에 맞서는 의회군은 중앙에 필립 스키폰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 5개 연대를 배치했다. 이들은 2개의 전선을 형성했고, 일부 보병대는 예비역으로서 제3선을 형성했다. 또한 우익에는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좌익에는 헨리 아이어튼의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또한 의회군은 최좌익에 오케이 대령의 용기병대를 배치해 국왕군 기병들의 측면에 포격를 퍼붓게 했다. 양군의 전선은 1마일에 달했는데, 전장의 서쪽엔 나세비 조수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긴 이중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전 10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루퍼트 왕자는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계곡을 가로질러 먼 비탈길을 올라가 적의 좌익을 공격했다. 좌익의 의회군 기병대는 이들과 격렬하게 맞서 싸웠고 오케이 대령의 용기병대는 측면으로 돌아가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루퍼트 왕자는 측면이 공격당하는 걸 무릅쓰고 적을 밀어붙였고, 의회군 좌익 기병대는 곧 패주했다. 그 후 루퍼트의 기병대는 엣지힐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나세비 근처의 의회 숙영지로 달려가서 약탈을 벌였다. 이에 루퍼트는 어떻게든 그들을 수습하려 애썼지만 1시간이 넘도록 수습하질 못했다. 한편, 중앙에서는 국왕군 보병대가 수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적 보병대를 향해 맹렬히 공격했다. 필립 스키폰 소장은 중앙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머스켓 탄환이 복부를 강타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의 가슴에는 두꺼운 갑옷이 있어서 가벼운 화상을 입은 정도에 그쳤지만, 그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결국 의회군 보병대의 제1 전선이 제2 전선으로 후퇴했다. 이에 헨리 아이어튼 대령은 루퍼트에게 패퇴한 기병대를 수습한 뒤 중앙으로 진군했지만,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보병대 제2 전선으로 후퇴했다. 이렇게 전세는 국왕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의회군 우익을 지휘한 올리버 크롬웰이 적 좌익 기병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해 버린 것이다. 크롬웰은 적 좌익 기병대를 멀리 쫓아보낸 뒤 중앙의 적 보병대 측면을 습격했다. 이때 찰스 1세에겐 예비대로 남겨둔 기병대가 있었다. 이 기병대를 투입해 크롬웰을 막게 했다면 전세는 국왕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고, 크롬웰은 그 사이에 중앙의 적 보병대 측면을 요격해 적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일부 보병대는 전멸할 때까지 저항했지만, 다수의 보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결국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루퍼트는 전의를 상실하고 일부 기병대를 수습한 뒤 찰스 1세와 함께 도주했다. 페어팩스는 도주하는 적을 맹추격해 네이즈비 들판에서 적군을 완전히 궤주시켰다.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회파 병사들은 패주하는 국왕군을 추격하던 와중에 국왕군의 치중대를 발견하고 약탈한다. 그런 병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국왕군을 종군하고 있던 여성들이었다. 병사들은 이 여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칼질을 해댔고, 최소한 100명에 달하는 여인들을 살해했다. 한 의회파 기록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우리 병사들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그들 중 약 100명을 죽였다. 그리고 저 사악한 군대에 동행한 나머지 창녀들의 코와 얼굴에 칼질을 해서 표시를 남겼다."

5. 결과

국왕군은 이 전투에서 1,000명의 전사자, 4,500명의 포로를 상실했다. 이 포로 중에는 8명의 대령, 8명의 중령, 18명의 소령, 70명의 대위와 500명의 장교들이 있었다. 반면 의회군은 400~1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찰스 1세는 레스터에서 루퍼트 왕자와 만난 뒤 헤어포드로 가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의회군과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의회군이 왕이 미처 챙기지 못한 개인 보석함을 찾아낸 뒤 그 안에 아일랜드 카톨릭 연맹과 프랑스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민심은 급격히 의회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후 의회군은 국왕을 추격해 1년만에 왕당파 세력을 제압했고, 찰스 1세가 애써 모았던 병사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이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에게 항복했지만, 애초부터 찰스 1세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의회에게 40만 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찰스 1세를 넘겨줬다. 이리하여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