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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9 11:52:54

엣지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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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3.2. 의회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2년 10월 23일 옥스퍼드셔주의 엣지힐에서 찰스 1세의 국왕군과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잉글랜드 내전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로, 전쟁 발발 후 서로 눈치를 보던 왕당파와 의회파가 본격적으로 내전에 돌입하는 계기가 된다.

2. 배경

1642년 1월 4일, 찰스 1세는 자신의 잘못을 2백개 조항에 걸쳐 나열하며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대항의문 통과를 주도한 의원 5명을 체포하고자 근위대를 이끌고 의사당에 난입했다. 그러나 의원 5명은 사전에 도망가버렸고, 의회는 경비병들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며 국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묵살해 버렸다. 이에 찰스 1세는 분노해 의회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이 의회를 점령하려 하는 병사들을 저지하고 바리케이드를 세워 국왕에 맞설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치자, 찰스 1세는 런던의 민심이 의회파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깨닫고 3월 2일 런던을 떠나 3월 19일 요크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8월에 노팅엄 성에 왕기를 내걸어 군대를 모집했다. 의회는 이에 맞서 지방의 민병대 통솔권을 자신들에게 주는 법안을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의회파는 대체로 잉글랜드 남부에서 지지를 확보했다.

찰스 1세와 의회는 이후 몇달동안 일련의 협상을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동안 양측은 병력을 집결시켰다. 먼저, 양측은 전국 각지의 주요 병기고와 화약고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4월, 찰스 1세는 영국에서 가장 큰 탄약고가 있는 헐 시를 확보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접근했다. 그러나 의회를 지지하는 존 호섬 경이 왕의 진입을 차단하는 바람에 도시에 입성하지 못했다. 왕의 신하들은 성벽을 향해 "호섬을 성벽 아래로 내던지고 왕을 위해 문을 열어 신의 축복을 받으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찰스 1세는 헐 시 입성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이후 1642년 여름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교전이 벌어졌지만, 대개 서로 대치하기만 하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포기하고 물러났다. 아직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양측은 함부로 전투를 벌이길 꺼렸고, 의회파에 가담한 이들 중 다수는 왕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을 망설였다. 심지어 양측 모두에게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선포한 이들도 많았다.

이렇듯 양측이 서로 싸우길 주저하는 상황이었지만, 의회파는 왕당파에 비해 많은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은 재정 지원의 주요 원천을 제공했으며, 영국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런던 부대(London Trained Bands)를 수중에 두었다. 또한 해군은 의회파를 지지해 주요 항구들을 의회파의 수중에 들게 하였다. 이 때문에 찰스 1세는 전쟁 초기부터 재정적 자원이 부족해 곤경에 처했다. 그래서 왕당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털어 군사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도 왕을 위해 반역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사명을 품은 귀족의 사병들과 웨일스의 농민들, 그리고 국왕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짐하는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찰스 1세는 10월까지 1만이 넘는 군대를 노팅엄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한편 의회 역시 민병대를 대거 모아 이와 비슷한 수준의 군대를 편성했다.

1642년 9월 23일,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브로는 의회군을 이끌고 워스터로 진군해 도시를 장악하고 찰스 1세와 웨일스 간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때 마침 찰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루퍼트 왕자[1]가 기마병 1,000명을 이끌고 워스터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옥스퍼드 대학이 찰스 1세에게 보내는 귀금속 등 물자들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에섹스 백작의 본대에서 떨어져나와 기동하던 전위 기병대 1,000명이 근처의 포윅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보고를 들은 루퍼트는 병력을 물리지 않고 즉각 교전하기를 원했다. 그는 의회군 기병대가 대응태세를 갖추기 전에 먼저 돌격하려고 서둘렀고, 루퍼트의 기병대는 심지어 무구와 군장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한 채 말 위에 올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선두에서 기병도를 번뜩이며 돌격을 이끌었고 기선을 제압당한 의회군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반면 루퍼트를 따르는 기병대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포윅 다리 전투의 승리는 왕당파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 이번 전쟁은 대규모 회전 한 번에서 승부가 가려질 것이며 길어봤자 몇 달 안에 끝날 거라고 여겼다. 그러던 중 포윅 다리 전투의 승리로 아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자, 찰스 1세는 여세를 몰아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10월 8일, 찰스 1세는 슈르즈버리에서 작전 회의를 열어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일부 신하들은 워스터를 장악한 에섹스 백작을 공격하자고 건의했지만, 찰스 1세는 런던을 향해 진군해 에섹스 백작이 제발로 워스터에서 나오게 만드는 작전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국왕군은 10월 12일 슈르즈버리에서 출발해 런던으로 향했다. 햔편, 에섹스 백작은 국왕군이 런던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19일 워스터에서 출전해 그들의 뒤를 쫓았다.

10월 22일 오후, 엣지코트에 도착한 루퍼트 왕자는 병사들을 풀어 숙소를 찾게 했다. 그러던 중 그곳의 술집에서 술을 진창 퍼마시고 있던 의회군 전위대를 우연히 만났고, 그들은 곧 체포되어 루퍼트 앞으로 끌려왔다. 루퍼트는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조건하에 의회군이 어디 있는지를 발설할 것을 요구했고, 병사들은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에섹스 백작의 본대가 엣지코트 서남쪽의 카인튼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루퍼트는 휘하의 기병대에게 지시해 카인튼 북쪽의 고지 엣지힐을 점령하게 한 뒤 찰스 1세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찰스 1세는 즉시 작전 회의를 열어 의회군을 무찌를 작전을 논의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국왕군에는 군대에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상급 지휘관들이 여럿 있었으나, 찰스 1세는 자신의 조카 루퍼트를 전 기병대의 부사령관으로 삼은 후 오직 그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며 주요 작전을 결정했다. 심지어 찰스 1세는 루퍼트에게 오로지 국왕의 명령만 따를 뿐 다른 상급 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는 권한을 주기까지 했다. 이러니 루퍼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노장들과 루퍼트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루퍼트가 작전 회의에서 보병의 배치와 운용까지 간섭하자, 보병 부대의 최고 사령관인 린지 백작 로버트 버티가 "내가 보병 부대 총지휘자인데 어째서 기병대 부사령관이 간섭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찰스 1세가 조카의 뜻에 따를 것을 권고하자, 린지 백작은 격분해 자신의 지휘봉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질렀다.
장군으로서 지휘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1개 연대의 지휘관으로서 선봉에 서겠다!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린지 백작을 지켜본 찰스 1세는 "성질은 여전하군."라고 웃어넘기고 포스 백작 패트릭 루스벤을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에도 몇번의 설전이 오갔다. 루퍼트는 의회군이 진용을 정비하기 전에 야습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실제 부대 배치와 작전은 루퍼트가 제안한 그대로 이뤄졌다. 중앙에 보병대 3개 여단이 제1 대형을 구성하고, 제2 대형엔 2개 여단이 배치되었으며, 각 여단은 중앙에 파이크 병, 양익에 머스킷병이 편성되었다. 또한 전군의 양익에 기병대가, 전선 끝엔 용기병대가 배치되었다. 루퍼트 본인은 우익에 배치된 기병대를 지휘했고, 좌익은 루퍼트의 부지휘관인 헨리 월못이 맡았으며, 중앙 선두엔 국왕의 친정기를 든 에드먼드 버니 경이 섰다.

한편, 의회군은 10월 23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국왕군이 언덕 위에 포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10월 23일 아침 일요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려던 에섹스 백작은 오전 8시에 적이 언덕 위에 있다는 급보를 받자 급히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중앙에 보병대를, 양익의 기병대, 그리고 양쪽 끝에 용기병대를 배치시키고 국왕군과 대치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양측은 전투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

3.2. 의회군

4. 전투 경과

전투 개시 전, 찰스 1세는 검은 갑옷 위에 검은 벨벳 코트 복장을 한 채 말을 타고 군대 전열을 따라 달리며 병사들을 격려했고, 국왕군은 한 목소리로 "국왕 만세!"를 외쳤다. 한편 에섹스 백작은 적이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돌격했다가는 완패를 면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적이 언덕 아래로 내려와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오후 1시부터 포병대에게 적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게 했다. 이에 국왕군의 포병대도 응사해 양측은 한 시간 동안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양군 포병대 모두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지점에서 서로를 향해 무의미한 포격을 벌였고, 당연히 양측 모두 별다른 손실이 없었다. 그러다가 화약이 다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루퍼트는 포격을 중지하게 한 뒤 우익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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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의 우익 기병대가 돌진해오자, 제임스 램지 경이 이끄는 의회군 좌익 기병대가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의회군 기병대는 적이 유효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총을 난사하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반면, 적진 10m 거리까지 접근할 때까지 피스톨을 쏘지 말 것을 명령받은 루퍼트의 기병대는 의회군 기병대의 코앞까지 접근했을 때 비로소 사격을 개시, 적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렸다. 곧 패닉에 빠진 의회군 좌익 기병대는 패주하기 시작했다. 후방에 있던 예비대는 도망치는 이들에게 머스킷을 쏴대 패주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기에 국왕군 좌익 기병대를 이끄는 헨리 윌못도 적의 우익을 향해 진군해 앞을 가로막은 적 기병대를 패주시켰다. 이리하여 의회군은 순식간에 기병대 대부분이 패주해버려 양측면이 적에게 노출되는 사태에 놓였다.

만약 이때 국왕군 기병대가 재집결한 뒤 적 보병대의 측면을 쳤다면, 엣지힐 전투는 국왕군의 압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이 덜 된 루퍼트의 기병대는 루퍼트의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사방으로 내달려 의회군이 버리고 간 총을 줍거나 적의 후방에 있는 야영지와 수송대 약탈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또한 헨리 윌못의 기병대 역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약탈하는 데 열을 올리느라 전장 상황 따윈 안중에 두지 않았다. 적 기병대가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을 때, 후방에 남아 있던 의회군 예비 기병대가 이 기회를 이용해 국왕군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그러자 아군 기병대의 엄호를 받지 못한 국왕군 보병대는 대혼란에 빠졌고, 의회군 보병대는 이틈을 타 적 보병대를 향해 정면 돌격했다.

이때 국왕군 선두에서 국왕의 깃발을 높이 들며 병사들을 독려하던 에드먼드 버니 경이 전사했고 왕기는 의회군에게 탈취당했다. 버니 경은 죽는 순간까지 깃발을 꼭 붙잡고 있어서, 의회군에게 탈취당한 왕기의 손잡이엔 그의 잘린 손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존 스미스 대위가 레이피어를 휘드르며 돌진, 수많은 상처를 입은 끝에 왕기를 다시 되찾아왔다.[2] 한편 의회군 전면 보병대의 지휘관 존 바이런 경, 국왕군의 전변 보병대 지휘관 제이콥 애슬리 경도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당시 12살이었던 찰스 왕세자[3]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을 향해 직접 피스톨을 뽑아들고 쏘다가 근위병들에게 안긴 채 후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루퍼트와 갈등을 빛고 직속 연대의 선두에 섰던 린지 백작은 백병전을 벌이던 중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포로 신세가 되었고, 아버지를 구하려 들었던 몬타큐 버티도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린지 백작은 감옥에서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렇듯 양측 보병대가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 루퍼트가 가까스로 일부 기병대를 수습해 전장에 나타났다. 이를 본 의회군 보병대는 물러서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당장 돌격을 감행해 적 보병대를 섬멸해버리려 했으나 기병대 부사령관 헨리 월못이 반대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소. 살아서 그 승리의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결국 루퍼트는 기병 돌격을 포기했고, 양측의 군대는 각자의 진영으로 귀환했다.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 내전의 첫 대규모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엣지힐 전투에서 양측이 입은 손실은 분명하지 않지만 양쪽 모두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많은 부상자들은 엣지힐 들판에서 추위에 떨다가 동사했고, 전투를 처음 치러본 많은 병사들은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야음을 틈타 탈영했다. 다음날, 양군은 다시 전장에서 진형을 갖췄지만 둘다 전투를 재개할 의사가 없었다. 찰스 1세는 자신이 내건 조건에 동의한다면 사면해주겠다는 서신을 에섹스 백작에게 보냈지만, 에섹스 백작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후 에섹스 백작은 대포 7문을 버린 후 사기가 저하된 군대를 이끌고 워릭 성으로 후퇴했다.

10월 25일, 루퍼트 왕자는 기병과 용기병대를 이끌고 의회군이 떠난 카인튼을 급습해 적의 군기와 지휘관의 개인 화물들, 탄약, 화기 등의 보급품들을 약탈하고 전투 생존자들을 사살했다. 이후 찰스 1세는 에섹스 백작이 북쪽의 워릭으로 후퇴한 틈을 타 런던 방향으로 남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에섹스 백작이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진군해야 한다는 루퍼트 왕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에섹스 백작에게 덜미를 잡힐 것을 우려해 벤버리, 옥스퍼드, 아일즈버리, 레딩 등 여러 도시를 거치며 천천히 진군했다. 한편 에섹스 백작은 워릭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적이 런던으로 천천히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런던으로 귀환했다. 얼마 후 국왕군은 런던 근교의 터너 그림에 이르렀으나 런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민병대를 결성해 에섹스 백작에게 합류했기 때문에, 국왕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적과 대면했다. 이에 찰스 1세는 런던 진공을 포기하고 옥스퍼드로 철수했다. 이렇게 잉글랜드 내전이 조기에 끝날 가능성은 사라졌고, 양측은 본격적으로 내전에 뛰어든다.
[1] 본명은 프린츠 루프레히트 팔츠그라프 바이 라인 헤르조그 폰 바이에른이다.[2] 그는 왕기를 지켜낸 공적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3] 훗날 찰스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