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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04 22:27:38

노박덕


路博德
(? ~ ?)

중국 한무제 때의 명장.

평주 사람으로 기원전 우북평 태수로써 기원전 119년에 표기장군 곽거병 휘하에 소속되어 여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는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종군하면서 도도산에 이르러 2,700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는 군공을 세웠다. 이 군공으로 식읍 1,600호를 부여받아 부리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위위가 되었다.

기원전 113년에 남월의 애왕이 즉위하면서 한나라에서 남월의 왕과 태후에게 제후처럼 입조하도록 하자 한무제의 명에 따라 계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사자를 기다렸다. 기원전 112년에 남월에서 재상 여가가 왕과 태후, 한나라의 사신 등을 죽이면서 술양후를 왕으로 세우자 계양으로 진군했다.

기원전 111년에 복파장군이 되어 계양에서 나가 회수의 강변을 따라 진군했는데, 다른 곳에서 달른 길로 나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심협과 석문을 깨뜨리면서 기다리자 번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함께 번우를 공격했으며, 서북면에 주둔하여 양복과 함께 번우를 공격하여 남월군을 패퇴시켰다. 사신을 보내 항복시키면서 술양후와 여가가 바다 쪽으로 달아나자 항복한 병사들에게 이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추격하도록 지시하여 이들을 붙잡았으며, 남월을 평정한 것으로 남월의 땅에 9군을 설치하게 되는 공을 세웠지만 이후에 법을 어겨 후작의 작위를 박탈당했다가 강노도위가 되었다.

기원전 102년에 한나라에서 광록훈 서자위를 보내 오원으로 나가게 하자 호수인 거연택 근처에 차로장을 쌓았다. 기원전 99년에 한나라에서 이광리가 주천에 파견되었다가 천산에서 싸우고 돌아온 이후에 인우장군 공손오를 보내 서하로 나가게 하자 탁아산에서 공손오와 합류했지만 별로 소득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는 이광리가 기병 6만, 보병 10만을 거느리면서 삭방으로 나갈 때 1만 여명을 이끌고 이광리와 합류해 여오수 남쪽에서 이광리를 따라 10여일 동안 흉노와 싸웠으며, 이후 거연에 주둔했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복파장군 둘을 가리키는 이복파사(二伏波祠)는 마원과 노박덕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