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양한교체기 시대의 산적
중국사 전한 멸망 후 일어나 후한 직후까지 활동한 산적무리의 이름이다.전한 멸망 후 왕망의 신나라 왕조가 내정을 엉망으로 만들자 이에 대항한 최초의 농민봉기 중 하나였다(서기 17년). 왕광(王匡)과 왕봉(王鳳)이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했는데, 녹림병(綠林兵)이란 집단의 이름은 그들의 근거지였던 녹림산(綠林山)이라고 하는 형주(荊州= 현대의 후베이와 후난 성 일대)에 있는 산(山)이름에서 따왔다. 현재는 대홍산(大洪山)이라고도 불린다.
이 녹림병은 이후 왕상(王常)이 이끄는 하강병(下江兵)과 왕광, 왕봉이 이끄는 신시병(新市兵)으로 다시 나뉘었으며, 같은 지역에서 봉기한 평림병(平林兵)과 호응하기도 했다.
황족 출신인 유연과 유수(劉秀)형제는 거병한 뒤 이들 무리들과 연합, 왕망의 군대를 격파, 이 후 지휘계통의 확립을 위해 네 연합군은 황실 종친인 유현(경시제)을 황제로 추대한다.
이 후 신시, 평림병의 수령들의 모함으로 유연이 군령위반으로 잡혀죽자, 동생 유수가 경시제로부터 독립, 결국 천하의 패권을 차지함에 따라 녹림병도 소멸하였다.
이후 녹림은 소위 도적의 별칭이 되었는데[1]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녹림이 그 예시. 수호전에서도 녹림객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장제스 시대의 무식한 군벌들이 본인은 녹림대학을 나왔다는 발언으로도 알려져있다.
영어에서 greenwood는 바로 녹림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