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코스모스 | |
New York Cosmos | |
<colbgcolor=#8ad4df><colcolor=#002b5c> 정식 명칭 | New York Cosmos Football Club |
별칭 | The Cosmos |
창단 | 1970년 12월 10일([age(1970-12-10)]주년)[1] |
2010년 8월 1일([age(2010-08-01)]주년) | |
소속 리그 | 전미독립축구협회 (NISA)[2] |
연고지 | 뉴욕 주 브루클린 |
홈구장 | 미첼 애슬레틱 컴플렉스 (10,102명 수용) |
회장 | 로코 B. 코미소 (Rocco B. Commisso)[3] |
명예 회장 | 공석[4] |
감독 | 공석 |
주장 | 공석 |
공식 웹사이트 | |
우승 기록 | |
사커 보울[5] (3회 / 최다 우승) | 2013, 2015, 2016 |
스프링 챔피언십(전반기) (1회) | 2015 |
폴 챔피언십(후반기) (2회) | 2013, 2016 |
홍콩 구정컵[6] (1회) | 2015 |
클럽 기록 |
뉴욕 코스모스 홈 유니폼 | |
2021 홈 킷 | 펠레 시절 홈 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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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폰서 | 유니폼 메이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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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저와 축구 황제[7] |
미국이라는 축구 불모지에 창설된 팀이지만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네스켄스, 조르조 키날리아 등 슈퍼스타를 영입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NASL 시절 5번의 우승을 거두며 리그 최강팀으로 손꼽혔으며 1978년에는 평균 관중 47,856명을 달성하는 등 전성기를 달렸던 팀이다.하지만 펠레의 은퇴로 인한 주목도 감소와 모기업의 자본 문제 등이 겹쳤고, NASL의 폐지 이후에는 실내 축구 리그에서 1985년 1시즌을 뛴 후 해체하였다.
지금의 뉴욕 코스모스는 2010년 재창단된 구단이다.
2. 역사
2.1. 창단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 12월 10일 뉴욕에서 튀르키예 출신의 아흐메트 에르테군과 네스히 에르테군 형제에 의해 창단되었다. 형제 소유의 애틀랜틱 레코드가 워너 커뮤니케이션스로 판매되며 큰 수익을 거둔 에르테군 형제는 축구 팀을 창단하기로 하고 연고지를 애틀랜틱 레코드가 설립된 뉴욕으로 정했다. 이후 첫번째 직원으로 NASL 소속이던 볼티모어 베이스의 총지배인 출신이던 영국 출신의 클라이브 토이를 영입하였다.당시 토이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단어에서 영감을 받아 축구팀 이름에 코스모스를 사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소유주였던 에르테군 형제는 축구팀 이름을 뉴욕 블루스로 짓고 싶어하였으며, 또 다른 소유주들은 구단 명을 뉴욕 러버로 짓고 싶어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토이는 뉴욕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조작된 팀 이름 짓기 대회를 여는데, 3000개의 이름 후보를 미리 받고 1등으로 뉴욕 코스모스를 정한 것이다.[8] 이렇게 정해진 팀 명은 1971년 2월 4일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2.2. NASL 참가, 랜디 호튼의 시대
뉴욕 코스모스는 1968년 창단된 NASL에 참가하였고 데뷔 시즌인 1971 시즌 2위로 순위를 마감하였다. 이 때 뉴욕 코스모스의 뼈대를 다진 두 선수가 들어오게 되는데 한 명은 버뮤다 출신의 랜디 호튼이고, 다른 한 명은 뉴욕 코스모스의 초대 감독이었던 영국 출신의 고든 브래들리였다. 랜디 호튼은 첫 시즌 16골을 집어 넣으며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고든 브래들리 역시 플레잉 감독으로 팀을 잘 이끌었다. 양키 스타디움 치른 첫 시즌과 달리 두번째 시즌인 1972년부터는 호프스트라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여 경기를 펼쳤고, 랜디 호튼은 이 시즌에도 16경기 9골을 득점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이런 호튼의 활약을 바탕으로 코스모스는 창단 후 첫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1973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탈락하게 된다.1973년과 1974년은 뉴욕 코스모스가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 때 감독이던 고든 브래들리가 미국 대표팀의 감독을 겸임하며 6경기를 치른 것이 영향을 줬다고평가된다. 1974 시즌에는 뉴욕 랜들스 아일랜드에 위치한 다우닝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가졌는데, 해당 시즌 뉴욕 코스모스는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뉴욕 코스모스를 대표하던 랜디 호튼은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같은 NASL 소속의 워싱턴 디플로마트로 이적하게 된다.
2.3. 펠레의 이적과 코스모스의 전성기
축구 불모지 미국의 강팀 중 하나였던 뉴욕 코스모스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75년, 축구 황제 펠레의 이적이다. 당시 산토스에서 뛰고 있던 펠레에 대해 구단주였던 스티브 로스는 알지 못하였으나 토이가 그를 두고 브라질의 교황이라고 칭하자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한다.[9] 이를 두고 영국의 작가 가빈 뉴햄은 "세기의 이적"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펠레의 이적은 뉴욕 코스모스가 선택한 최고의 일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이전까지 리그 강팀에 불과했던 뉴욕 코스모스에게 아이덴티티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첫 경기인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경기는 22개국에 방영되며 큰 상업적 이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펠레의 뉴욕 코스모스 첫 시즌은 3위를 기록하며 이름값에 비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내었다. 이로 인해 감독이던 고든 브래들리가 팀을 떠나게 되었고 빈 자리를 셰필드 유나이티드 감독 출신인 켄 퍼피가 채웠다. 또한 팀의 주포로 라치오에서 핵심으로 활약하고 있던 조르조 키날리아를 영입한다.[10] 다른 NASL의 스타들과 달리 전성기에 이적한 키날리아는 수 년간 코스모스에서 활약하며 큰 활약을 하였고, 구단주 로스와의 관계도 좋아 펠레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더 대우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1976 시즌 뉴욕 코스모스는 양키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여 한 시즌을 치렀고 다시 1977 시즌에는 뉴저지에 새로 지어진 자이언트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여 경기를 치렀다. 이때 뉴욕 코스모스는 이름을 뉴욕 코스모스에서 코스모스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후 1979년 다시 뉴욕 코스모스로 돌아오게 된다.
고든 브래들리의 빈 자리를 메운 켄 퍼피는 고작 한 시즌만에 경질되었고, 그 빈자리를 다시 고든 브래들리가 메우게 된다. 하지만 브래들리 역시 반 시즌만에 다시 경질되었고, 그는 클럽의 부사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감독 자리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신이자 템파베이 라우디스 감독이었던 에디 피르마니를 영입하게 된다.
1977 시즌은 또 다른 슈퍼스타들이 영입되었다. 브라질의 주장으로 활약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영입되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뉴욕 코스모스는 1977, 1978, 1980시즌 등 3시즌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1977년 펼쳐진 포트 로더데일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당시 미국 프로축구 최다 관중인 77,691명의 관중을 모으며 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1977 시즌을 마지막으로 펠레는 은퇴를 선언하였고 이는 뉴욕 코스모스만이 아니라 NASL 전체에도 큰 악재였다.
2.4. 코스모스와 NASL의 쇠퇴
펠레의 은퇴와 함께 그간 이룩했던 것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4만 명 대의 관중을 모은 코스모스는 1981년 3.4만 명, 1982년 2.8만 명, 1983년 2.7만 명을 기록하며 관중이 급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NASL을 중계하던 ABC와의 계약이 1980년을 마지막으로 끝이났고, 결국 1981시즌 사커볼은 녹화본으로 방영 되었다.이는 비단 뉴욕 코스모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NASL 소속 모든 프랜차이즈들의 수익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1984 시즌 급여 상한선을 두었으나 이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뉴욕 코스모스의 모기업이던 워너 커뮤니케이션이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 타겟이 되며 여러가지 잡음을 일으켰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자산을 아타리 등에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조르조 키날리아가 코스모스를 운영하던 글로벌 사커 주식회사를 인수하였으나 당연히 그에게는 팀을 운영할만한 자금이 없었고 이로 인해 코스모스를 지탱하던 수많은 스타들이 매각되게 된다. 코스모스는 1982년, 팀의 마지막 타이틀을 획득하였으나 몰락은 가속화되어 팀의 마지막 시즌인 1984 시즌에는 10년 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2.5. 실내 축구 리그로의 편입과 유소년 축구단 운영
NASL이 몰락한 후 뉴욕 코스모스가 선택한 것은 실내 축구 리그인 MISL으로의 편입이었다. 1979년 1시즌간 감독을 맡았던 리투아니아 출신의 레이 클리베카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재도약을 꿈꿨지만 관중 부족으로 고작 33경기만을 치른 후 리그에서 탈퇴하게 된다. 이후 성인 축구 팀은 운영을 잠정 중단하게 된다.이와 별개로 유소년 축구 팀은 이후에도 꾸준히 운영되었었는데, 뉴욕 코스모스의 소유권을 보유한 페페 핀튼의 지원으로 2003년까지 운영될 수 있었다.
2.6. 코스모스의 재창단
1990년대 후반, MLS가 부상하며 NASL의 최강 팀이던 뉴욕 코스모스에도 관심이 모였다. 뉴욕에 메트로스타즈 한 개의 팀만이 존재할 때 MLS는 뉴욕 소속 두 번째 팀을 만들기 원했고, 여러 뉴욕 기반의 기업가들이 코스모스 재창단을 위해 핀튼에게 제의를 하였으나 핀튼은 MLS가 코스모스의 유산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판매를 거부했다.[11]하지만 MLS가 산호세 어스퀘이크스, 시애틀 사운더스, 포틀랜드 팀버스,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NASL 소속이던 팀들의 전통을 잇는 팀을 창단하자 마음을 바꾸고 토트넘의 부회장이던 폴 켐슬리에게 뉴욕 코스모스 브랜드를 판매하게 된다.[12]
폴 켐슬리는 부회장으로 리버풀의 CEO였던 릭 패리를 선임하였고, 미국의 전 축구 선수인 코비 존스를 어시스트 디렉터로 선임, 2011년 1월에는 에릭 칸토나를 디렉터로 선임하게 된다. 다만 칸토나의 역할은 다소 애매한데, 클럽은 차후 칸토나에 대해 "홍보 계약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2012년 존스가 팀을 떠난 후 칸토나는 팀에서 해고당하였다.
코스모스는 팀의 부활을 위해 과거의 스타들과 연결고리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코스모스의 간판이던 펠레와 5년간 500만 달러의 프로모션 계약을 체결하였고, 마찬가지로 카를로스 알베르토, 조르조 키날리아, 셉 메싱 등에게 앰버서더 역할을 맡긴다.
새로운 코스모스의 첫 경기는 2011년 8월 5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였고, 코스모스는 전세계의 초청 선수들로 구성된 이벤트 팀이었다.
이후 폴 켐슬리는 2011년 10월 26일, 사우디 아라비아의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셀라 스포츠의 소유주에게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였으며, 그 후임으로 셰이머스 오브라이언이 임명되었다. 오브라이언은 MLS의 총재 돈 가버와 미팅을 가졌는데, 양 측 다 팀의 MLS 참가를 원하였으나 MLS 측에서 참가비 100M과 함께 리그가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계약을 제안하자 코스모스는 이를 거절하고 타 리그의 참가를 계획하게 된다.
2.7. 새로운 NASL 참가
뉴욕 코스모스는 2013년부터 미국 2부 리그 소속이던 새로운 NASL의 참가를 발표했다. 다만 코스모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여전히 MLS로 합류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발표 후 코스모스는 마르코스 세나 등을 영입하며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2013년 첫 참가에서 코스모스는 9경기 4무 1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2013년 열린 사커볼 2013에서도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2015년 미국과 쿠바간 관계가 정상화되자 쿠바에서 쿠바 대표팀과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프로 팀이 쿠바에서 경기를 펼친 것이다. 또한 라울 곤잘레스, 후안 아랑고 등 스타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또다시 스타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다만 이러한 성공에도 코스모스는 팬들을 끌어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재정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에릭 칸토나는 코스모스에게 100만 달러의 연봉과 약속했던 4%의 지분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구단을 고소하기에 이른다.[13] 문제는 점점 심각해져 2016년에는 코스모스 서포터들이 경영 투명성과 클럽 미래를 걱정하며 구단주와의 회의를 요청하기도 한다.
2.8. 현재
2016년 들어 심각해진 자금난으로 뉴욕 코스모스는 더 이상 축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미 2013년부터 16년까지 4년간 자본금 3천만 달러를 잃었다 평가받았으며, 2016년 11월에는 직원의 60~80%가 무급 휴가를 냈다는 소식이 들렸다.이로 인해 서포터들이 기금 마련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였으나, 12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직원 대부분이 해고되기에 이른다. 오브라이언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재정적으로 힘든 것은 맞으나 부채가 없으므로 구단 운영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롱 아일랜드의 코스모스 사무실의 대금 미납으로 고소를 당하는 등 재정난은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오브라이언은 2016년 메디컴의 CEO인 로코 B. 코미소에게 구단을 판매하기로 결정한다. 계약은 2017년 마무리되었으며, 이로 인해 뉴욕 코스모스는 2017년 NASL에 참가할 수 있었다.
2018 시즌, 새로운 NASL 마저 수익성 문제로 시즌이 취소되자 코스모스는 리그 참가를 중단하고 나섰다. 이후 코스모스 B 팀이 뛰고 있던 NPSL에서 잠깐 시즌을 치렀고, 2020년 NISA 참가를 결정하였으나 또 다시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후 현재까지 뉴욕 코스모스는 소속 리그와 소속 선수 없이 방황하고 있다.
3. 선수 명단
뉴욕 코스모스 2018 시즌 | ||||||
등번호 | 국적 | 포지션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생년월일 | 비고 |
출처: 뉴욕 코스모스 공식 홈페이지, 마지막 수정 일자: 2018년 10월 19일 |
4. 영구 결번
뉴욕 코스모스 영구결번 | |
No.9 조르조 키날리아 | No.10 펠레 |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개의 번호가 결번이 되어있는데[14], 그 이유는 1970년의 뉴욕 코스모스의 역사를 이어 받아 결번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9번 결번의 주인공인 조르조 키날리아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코스모스에서 뛰었던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신 선수로 213경기에서 193골을 넣은 전설적인 선수다.
10번 결번의 주인인 펠레는 전 세계 모두가 다 아는 축구의 황제이기도 하고 (구)뉴욕 코스모스의 명성을 전 세계로 알렸으며 (현)뉴욕 코스모스의 재창단을 주도하였고 명예 회장까지 오른 상징적인 인물이다.
5. 홈구장
2013년 가을 리그에 참가할 때 홈구장은 호프스트라 대학교의 제임스 M 슈어트 스타디움을 빌려 사용했다. 그러나 2016년 챔피언십에서 경기장 일정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였고 2, 200석 규모의 세인트 존스 대학의 Belson 스타디움을 빌려 챔피언십을 치러야 했다.파일:MCU_Park_NY_Cosmos.jpg
2017년 봄 시즌에는 브루클린 최남단 코니 아일랜드의 MCU 파크를 홈구장으로 썼었다. 이 경기장은 뉴욕 메츠 산하의 마이너리그 팀인 브루클린 싸이클론스가 홈 구장으로 쓰는 야구장이기도 하다.
2019년부터는 미첼 애슬레틱 컴플렉스(Mitchel Athletic Complex)라는 종합 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른다.
세입자 신세를 면하기 위해 퀸스 인근의 벨몬트 공원의 주차장에 25,000석 규모의 전용구장 사업을 제안하였으나 무산되었다.
6. 여담
- 리그는 다르지만 같은 지역을 연고로 하고있는 MLS의
뉴저지뉴욕 레드불스와 뉴욕 시티 FC와 라이벌 관계에 있다. 특히 뉴욕 시티와는 팀의 약자가 NYC로 같아서 누가 진짜 NYC인지 신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실제로 양 구단 간의 경기가 있을 때는 코스모스를 COS로 표기하거나 뉴욕 시티 FC를 NFC로 표기하여 구분한다.
- 원조 코스모스 재건 사업에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덕분에 팀이나 팬들 노선이 다른 MLS나 NASL 구단보다 훨씬 유럽 정통파 성향에 가까우며 현 MLS의 노선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MLS의 반승강제 노선에 대한 반대, NASL 등 하부 리그 구단의 MLS의 마이너리그화에 불만을 제일 많이 표시하고 유럽식 승강제 도입과 샐러리캡, 드래프트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 이 때문인지 NASL이 존폐 위기가 오자, 급기야 그보다 밑의 리그인 NPSL에 임시로 참가했다가 독립축구리그인 전미독립축구협회(National Independent Soccer Association) 리그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1] 과거 북미프로축구리그(NASL)에서 활약했던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 12월 10일에 창단했으며, 뉴욕 코스모스라는 이름은 1971년 2월 4일부터 사용했다.[2] 소속은 되어 있으나 2020 시즌을 끝으로 리그에 참가하고 있지는 않다.[3]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본인의 소망은 잠재성이 높은 이탈리아 세리에 A 구단을 맡는 게 소망인 유벤티노이고 꾸준히 AC 밀란 인수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밀란 인수에 실패했으나 결국 2019-2020 시즌 ACF 피오렌티나의 사실상 새로운 구단주가 되었다.[4] 2022년 12월 30일(한국 시간) 펠레 (Pelé)의 작고로 공석이 되었다.[5] NASL은 스프링 챔피언십(전반기)과 폴 챔피언십(후반기)로 이루어지는데 사커 보울은 전후반기 챔피언끼리의 플레이오프 결승전이다.[6] 홍콩축구협회가 매년 설날에 여는 이벤트 대회. 칼스버그사가 장기간 스폰서를 맡아 칼스버그컵으로 알려졌다.[7] 왼쪽부터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조르조 키날리아. 베켄바워는 카이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역대 최고의 수비수, 펠레 역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자 1960년대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조르조 키날리아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신 공격수로 라치오에서 209경기 98골이라는 걸출한 기록을 바탕으로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 213경기 193골을 집어넣으며 뉴욕 코스모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꼽힌다.[8] 이 때 뉴욕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제출한 퀸스의 마틴 반 뷰렌 고등학교의 교사 메이어 딜러와 알 카펠리는 부상으로 유럽 여행권을 받았다.[9] 펠레는 1974년 산토스에서 이미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이후 시도한 투자가 실패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뉴욕 코스모스가 14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의하자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다.[10] 이때 라치오 팬들은 '키날리아가 탈 비행기 바퀴 앞에 누워버리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적에 반대했다.[11] 이 때 많은 팀들이 뉴욕 코스모스가 MLS에 참가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MLS의 총재인 돈 가버는 "뉴욕의 두 번째 팀 이름은 코스모스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심지어 기존 참가중이던 메트로스타즈는 레드불에 인수되기 전 코스모스의 브랜드를 문의하기도 하였다.[12] 다만 위의 팀들은 NASL의 역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재창단으로 취급받는다.[13] 이후 2017년 3월 구단과 칸토나는 78만 유로에 합의하게 된다.[14] 이탈리아의 명문 AC밀란의 결번이 2개이다. 유럽과 미국의 결번 문화가 다른 것도 있지만 10년도 채 안 된 구단이 결번이 두 개인 것은 이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