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zam-ı Cedid[1]
1. 개요
셀림 3세가 단행했던 오스만 제국의 개혁정책. 이름은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뜻하는 옛 튀르키예어이며, 그 내용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 개혁 전반 부문에 대한 서구화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오스만 제국에까지 닿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제국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2. 군사부문
셀림 3세의 니자므 제디드 개혁으로 오스만 제국군에 창설된 니자므 제디드 군대(Nizam-ı Cedid Ordusu)는 니자므 제디드 개혁의 핵심이자,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이다.
예니체리의 권위가 날로 강해져 단순히 군사 부문뿐만이 아닌 정치 부문에까지 그 손을 뻗기 시작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셀림 3세가 예니체리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 영향을 받아 창설한 신식 군대로, 당대 유럽의 군제에 맞추어 완벽한 전열보병식 훈련을 받았으며, 대포 또한 유럽의 것을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기병대의 경우 창기병과 용기병의 형태로 훈련받았으며[2], 오스만 제국의 전통에 따라 중앙군과 지방군의 형태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상단의 그림에서 붉은 복장을 입은 병사들이 중앙군, 푸른 복장을 입은 병사들이 지방군이다.
3. 창설 배경과 몰락
18세기 말~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정국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여파로 영토는 줄어들고 국가 재정은 파탄날 대로 파탄나게 되었으며, 아예 군사 부문을 넘어서 정치 부문에까지 개입하는 예니체리들에 의해 황제의 권위는 날로 약해졌다. 더군다나 예니체리들은 앞서 언급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그 허약함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만방에 증명하는 것이었다. 예니체리들의 약화와 부패의 이유는 해당 항목 참조.이렇듯 군사력이 약해진, 아니 군대가 정치집단으로 변모하려는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몇몇 황제들은 예니체리들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이미 막강한 위세를 지녔던 예니체리들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곤 하였으며, 조금만 강하게 밀어붙이려고만 하면 예니체리들은 아예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죽이는 초강수까지 두며 개혁을 극렬히 반대하였다.[3]
이처럼 빈번히 실패하는 예니체리 개혁의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던 셀림 3세는 즉위와 동시에 군제 전반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단행한다. 그는 육군학교와 해군학교를 창설하여 유럽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장교들을 훈련시키고 유럽식의 군제와 장비를 도입한 신식 군대를 창설하는데, 이렇게 양성된 장교와 군인들로 이루어진 신식 군대가 바로 니자므 제디드였다. 그러나 이 때 만들어진 니자므 제디드는 당연하게도 예니체리들의 극렬한 반대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예니체리들과 정치적인 유착이 있었던 수구파 정치인들의 반대에도 직면하게 된다.[4] 이에 셀림 3세는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대의 명칭을 구식 군대의 이름을 포함시킨 '세크바느 제디드(Sekban-ı Cedid, 신식 호위대)'[5]로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고작 이런 조치들에 만족할 수구파와 예니체리들이 아니었다.
결국 1805년, 발칸 반도의 에디르네에서 군제 개혁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이 일으킨 하극상을 시작으로 하여 예니체리들을 위시한 수구파들도 이에 가담하여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1807년에는 셀림 3세 그 자신이 반란군에게 붙잡혀 투옥되고 만다. 하지만 불가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이 쿠데타에 반발한 바이락다르 무스타파(Bayrakdar Mustafa, 1765~1808)[6]가 총독으로서 지휘하고 있던 군단을 이끌고 코스탄티니예로 진군하였고, 셀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무스타파 4세를 폐위하고 그 동생으로 개혁파였던 마흐무트 2세를 옹립했다.[7] 그리고 마흐무트와 그 아들로 뒤를 이은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을 계속했고, 마침내 이러한 개혁은 탄지마트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담으로, 실전 경험이 있기는 하다. 바로 나폴레옹 전쟁 중 이집트 원정에서의 활약으로, 제자르 파샤의 지휘를 받으며 아크레 공성전에서 활약,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 승리에는 때맞춰 적절히 지원을 온 시드니 스미스 경 휘하의 영국 해군과 프랑스군을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풍토병 등의 요인들도 한 몫을 했다.
4. 대중매체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는 매체에 간혹 등장하는데, 구식 군대인 예니체리와 비교되어 매우 강력한 군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1] 현대 터키어로는 Yeni Düzen.[2] 보병에 비해 규모가 작아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기병대는 황실 근위대인 카프쿨루 시파히가 많았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후반부터 기병의 규모를 축소하고 예니체리를 비롯한 보병의 수를 늘리는 개혁에 착수해서, 이 시점에서 주력 기병대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3] 이렇게 폐위된 황제들로는 예니체리 군단의 막장화를 처음으로 파악했던 오스만 2세, 시파히를 이용하여 예니체리를 견제하려다 폐위당한(이를 에디르네 사건 이라고 한다) 무스타파 2세, 본 항목에서 소개하는 셀림 3세 등이 있다.[4]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정이 좋지 못해 니자므 제디드의 창설 및 훈련 비용이 기득권 지배층으로부터 몰수한 땅과 새롭게 부과된 세금으로부터 충당되었기 때문이었다.[5] 세크반 자체는 페르시아어로 개 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이 고용한 용병대였으며, 처음에는 화약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부대를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점차 비정규부대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주로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에 고용된 이들이었지 충성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었기에 상대가 더 큰 보수를 제시하면 언제든 오스만을 향해 칼을 들이댈 위험도 내포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과 갈등을 겪게 된 예니체리들은 폭동을 일으켜 황제를 갈아치우기도 했다. 이밖에 이전 항목에서는 예니체리 부대의 65번째 연대의 별칭이었다는 소개도 있다.[6]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Alemdar Mustafa Paşa)라고도 불린다.[7] 여담으로 당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들은 각자 맡은 지방에 대한 행정권과 집행권(재판권은 중앙 정부가 임명한 지방 법관에게 있었다), 군사권을 보유했다. 당연히 불가리아 총독인 무스타파 파샤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군을 지휘하는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흐무트 2세는 제멋대로 임지를 이탈하여 임무를 방기한 무스타파 파샤를 처벌하기는 커녕 재상으로 삼았다. 다만 마흐무트와 무스타파의 개혁에 반대하는 예니체리들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된 지 넉 달 만에 살해당했고(정확히 1000명이 넘는 예니체리들이 집으로 습격하자 무스타파는 집에 가득한 화약에 불을 붙이고 자폭해버렸다. 400명이 넘는 예니체리를 길동무 삼았다.), 마흐무트는 잠시 개혁을 중단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