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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3:19:03

니카라과 사건

1. 개요2. 사건 개요3. ICJ 재판 진행
3.1. 재판 과정3.2. 잠정조치 및 선결적 항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3.3. 국제관습법상 무력 사용 금지 원칙에 대한 판단3.4. 국제관습법상 국내 불간섭 금지 원칙에 대한 판단3.5. 미국의 자위권 주장에 대한 판단3.6. 판결
4. 뒷이야기

1. 개요

Military and Paramilitary Activities in and against Nicaragua (Nicaragua v. United States of America)

니카라과 사건은 니카라과의 반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 및 직접적 무력 사용 행위를 둘러싼 국제 분쟁을 의미한다. 해당 사건에 대해 ICJ가 1986년 내린 판결은 무력 행사와 집단적 자위권, 국내 문제 불간섭 원칙의 국제 관습법 확인 등에 있어 중요한 판례로 꼽힌다. 동시에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함께 레이건 정부의 가장 큰 외교적 실책 중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기도 하다.

2. 사건 개요

먼로 독트린 이래 미국은 지속적으로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내정 간섭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이는 니카라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9년 이후로 니카라과의 정부는 끊임없는 미국의 개입에 시달려야 했다.

1934년 니카라과 헌병군(National Guard)의 수장이었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Anastasio Somoza García, 일명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반미 무장조직 수장 산디노(Augusto César Sandino)를 나포해 살해하고[1] 1937년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후 소모사 가문은 친미적 독재 정권을 펼치며, 1979년까지 군림하였다.[2] 그러나 공금 횡령 사건[3]이 결정타가 되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조직되어 反소모사 투쟁에 들어갔고,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를 주축으로 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소모사 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이 집권하게 되었다.

당초 미국은 소모사 독재체제를 전복시킨 니카라과의 신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산디니스타는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동시에 엘살바도르 등 주변 국가의 반미/반정부 게릴라 세력을 지원하였기에 당시(1981년 1월) 새로 출범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 등 반정부 세력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이유로 소모사 정권 이래 계속되던 니카라과行 경제 원조를 중단하였으며, 동해 12월부터 산디니스타 정권을 반대하는 우파 성향 반군, 일명 "콘트라 반군"(Contras)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지원은 상당한 수준으로 재정지원, 군사고문단 파견 및 훈련, 무기 제공, 첩보, 병참 지원까지 포함되었다. 콘트라 반군은 코스타리카 및 온두라스 등 주변 국가에 거점을 두고 반정부 무력 투쟁을 개시하였다.[4] 여기에 미국은 1984년 초부터 니카라과의 몇몇 항구에 기뢰를 설치하고 항만, 석유시설, 해군기지에 대한 무력 공격에 나서고 영공을 침범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 니카라과 정부는 1984년 3월 말 미국의 침략 행위가 본격화되고 있다며 UN 안보리에 분쟁 조정을 부탁하였다. 4월 4일 니카라과 수역 내 기뢰 부설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결의안이 상정되었으나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해당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이렇게 되자 니카라과는 미국의 현 직접적 공격 행위는 국제 관습법 및 일반 국제법의 위반이며, 니카라과 자국에 대한 주권 침해라며 ICJ에 재판을 청구하였다.

3. ICJ 재판 진행

3.1. 재판 과정

3.2. 잠정조치 및 선결적 항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3.3. 국제관습법상 무력 사용 금지 원칙에 대한 판단

3.4. 국제관습법상 국내 불간섭 금지 원칙에 대한 판단

3.5. 미국의 자위권 주장에 대한 판단

3.6. 판결

<출처>한국일보 [기억할 오늘] 국제사법재판소 니카라과 판결(6.27)|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레이건 정부의 콘트라반군 지원 및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 전복 시도에 대해 국제법 위반–피해 보상을 선고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사법 재판소의 판결을 묵살했고,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상임이사국 거부권을 행사했다.

4. 뒷이야기



[1] 1927년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과 당시 니카라과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유혈 운동이 일어났고 산디노는 이 운동의 주도자였다. 당시 니카라과에는 내정 간섭을 위해 미국 측에서 파견한 해병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1933년 니카라과에서 손을 떼고 떠났다. 이후 니카라과 국내 치안은 헌병군 소관으로 넘어갔다.[2] 소모사 가문은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3대 43년간 이어진 뿌리깊은 부정 독재 정권이었다. 여담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모사를 두고 1939년 "그가 개자식은 맞지만 그는 우리 개자식이다"(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라고 발언했다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는데, 상당히 유명한 발언이지만 관련 공식 문서가 남아있지 않아 확실하진 않다.[3] 1972년 니카라과에 지진이 발생하여 국제적으로 구호금이 들어왔는데, 소모사 정권은 구호금 중 수백만 달러를 횡령하였다.[4] 당시 책임자였던 국가안전보장이사회의 올리버 노스(Oliver North) 중령은 지원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적성국인 이란에게 미국산 무기를 고가로 판매하는 등 불법적 방안까지 동원하였고, 이게 들켜 레이건이 탄핵 직전까지 가는 등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상당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게 그 유명한 이란-콘트라 스캔들 사건이다.[5] 다니엘 오르테가는 2021년 11월 니카라과 대선에서 다시 집권에 성공하며 4연임 대통령이 되었고, 국제 사회는 제재 강화를 예고하였다. 니카라과의 대선에 대한 대한민국 외교부의 성명(20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