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1:14:49

윤학자

다우치 치즈코에서 넘어옴
<colbgcolor=#003865><colcolor=#fff>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윤학자
尹鶴子 | Yoon hak-ja
파일:윤학자 여사.jpg
본명 타우치 치즈코 (田内千鶴子 たうち ちづこ) ➜ 일본식 성명
윤학자 (尹鶴子) ➜ 한국식 성명
출생 1912년 10월 31일
일본 제국 고치현 고치시 와카마츠초
사망 1968년 10월 31일[1] (향년 5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성모병원[2]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귀화)
직업 고아원 원장
가족 남편 윤치호
장녀 정미
장남 윤기
차녀 향미
차남 영화
종교 개신교
학력 야마테공립심상소학교[3] (졸업)
목포고등여학교[4] (졸업)
경력 前 목포정명여학교[5] 음악교사
상훈 문화훈장 국민장 (1963)
목포 시민의 상 (1965)
남수포장 (1967)
별칭 목포의 어머니 「木浦の母」
한국고아의 어머니 「韓国孤児の母」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1999)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 출신 교육가 겸 복지 활동가.

한국 이름은 '윤학자(尹鶴子)'인데 남편의 성씨였던 윤씨에 자신의 이름 치즈코(千鶴子)의 鶴子를 따서 조합한 이름이다.

2. 생애

1912년에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아버지 타우치 토쿠지(田内徳治)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목포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1930년에 아버지가 급사하였으나 그녀와 어머니는 한국 땅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1932년부터 목포시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목포에는 윤치호(尹致浩, 1909 ~ 1951?)[6]라는 전도사가 1928년에 공생원이라는 보육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어 교육이 필요했으나 윤치호는 선생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가 1936년에 그녀의 은사였던 타카오 마스타로(高尾益太郎)가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목포 교외에 공생원이라는 고아원 원장을 맡고 있는 크리스천 청년이 일본어 선생님을 찾고 있네. 애들이 웃는 얼굴이 없다는구만. 이러한 고아가 생겨난 것에는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는 우리 일본인의 책임이 있어. 자네가 가서 웃는 얼굴을 되찾아주면 안 될까?
그녀는 이 제안을 받고 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외면받던 거지,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그녀를 두고 일본인 친구들은 외면하고 빈정대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1938년에는 윤치호에게 청혼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7]

파일:윤학자.jpg

젊은 시절 윤치호와 찍은 신혼사진.

1945년 8.15 광복 이후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헌신을 지켜봤던 마을 주민들이 인간방패 역할을 해 막아서 고초를 면했다. 1946년 9월에는 어머니를 일본에 살던 이모에게 모셔다드리고 다시 목포로 돌아왔다.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고 목포에도 조선인민군들이 몰려들자 다른 이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공생원에 그대로 남았다. 그로 인해 이들 부부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이번에도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남편 윤치호는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자 인민군 부역자로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역시 지역민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윤치호는 식량난 때문에 전남도청이 있었던 광주광역시[8] 구호 요청을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실종 당시 당국자에게 지원 요청을 한 직후 여관에 찾아온 청년들이 끌고 갔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는 전시라서 치안이 대단히 나빴고 기독교 전도사면서 일본인의 배우자라는 처지, 강제로 인민위원장을 맡은 전적 때문에 좌우 어느쪽에서든 밉보여 억울하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자초지종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공생원 운영은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겨졌고 그녀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생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공생원 운영이 어려워지자 1960년에는 목포에 살다가 일본으로 귀국한 히키아게샤들의 모임인 '목포회'의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울러 한일간 왕래가 다소 자유로워진 1961년 4월에는 고향 고치현의 양로원에 있었던 어머니를 만나고 도움도 호소할 겸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인이 한국에 남아 수많은 고아들을 돌본다는 소식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어 아사히신문 및 여러 일본 언론에 그녀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이에 따라 목포회 회원들은 1962년 9월에 그간 모금한 200만엔[9]을 주일한국대표부를 통해 전달한다. 1964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공생원 후원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일을 넘나든 그녀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1963년 8월 15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문화훈장 국민장[10]을 수여받았다. 1967년에는 일본 정부가 남수포장(藍綬褒章)을 수여하기도 했다. 목포시에서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수여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인망을 얻었다고 한다.[11] 이에 따라 1965년 목포시 시민의 상 일반공로상을 수상하였다.

파일:external/hankukmail.com/1453673126-85.jpg

1967년 10월 19일 아이들을 돌보다가 그녀는 갑자기 졸도하였다. 30년 넘게 고아들을 돌보면서 격무에 시달려 건강을 해친 것이다. 이후 병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더 이상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없자 1968년 9월 20일에 공생원으로 돌아왔으며 1달여만이자 본인의 생일인 10월 31일 새벽 2시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11월 2일에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졌고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1968년 당시 목포시의 인구는 대략 16만여 명이었으니 과장 좀 보태 전 목포가 울었던 셈이다. 생전 32년간 그녀가 길러낸 고아는 총 2,995명에 달한다고 하며 세상을 떠나던 순간에도 공생원에서는 158명의 버림받은 갓난아기와 212명의 고아를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묘지는 남편 윤치호의 고향인 함평군 대동면 옥동마을에 있다.

3. 여담

1995년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한일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졌다.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시다 에리가 타우치 치즈코 역, 길용우가 윤치호 역을 맡았다. 한일합작영화임에도 당시 일본 영화의 상영길이 막혀 있었던 한국에서는 개봉을 못했다가 1998년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로 제일 먼저 수입허가를 받았다. 이 영화를 관람한 오부치 게이조일본 총리가 후술하듯이 매화나무를 보낸 것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생원은 지금도 목포에서 운영 중이며[12] 일본 정재계 인사들이 내한하면 종종 방문하기도 한다. 일본항공(JAL) 한국지점 같은 곳에서는 이미 몇십년째 후원하고 있기도 하며 JAL에서 지어준 JAL 마크가 그려진 건물도 존재한다.# 공생원 홈페이지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는 그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도 생전에 공생원에 고향 군마현에서 매화나무 20그루를 공수해 선물로 보내고 2008년 공생원 창립 80주년 행사가 열렸을 때 아내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을 받아 방문하기도 했다. 게이조 본인도 방문을 원했으나 병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녀의 고향인 고치시에 그녀의 업적을 기린 한글로 쓴 비석이 있다.#

슬하에 장녀 윤정미(尹靜美), 장남 윤기(尹基), 차녀 윤향미(尹香美), 차남 윤영행(尹栄幸)의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윤기(일본명 타우치 모토이(田內基))는 공생원 운영을 이어가다가 1983년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에서도 재일교포 노인들을 돌보는 '고향의 집'을 운영하면서 복지사업을 펼쳤다.#

2023년 10월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생복지재단 9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윤학자와 공생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4. 참고 문서



[1] 공교롭게도 기일이 생일과 같은 날짜였다.[2] 폐암으로 투병하다가 별세했으며, 장례식은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진행되었다.[3]목포유달초등학교[4] 現 목포여자중학교[5]목포여자고등학교[6]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치호(尹致昊, 1864~1945)와는 다른 사람이니 유의하자.[7] 이때 윤치호가 처가에 데릴사위 형식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들의 자녀는 대한민국 독립 후에도 일본 국적이 유지되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공생원을 맡은 장남인 윤기(타우치 모토이)는 자신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에야 자신이 한국 국적이 아닌 일본 국적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 2005년에 전남도청을 무안군으로 옮겼다.[9] 목포회 회원들이 기증한 돈과 당시 회장을 맡고 있었던 히노 키스케(日野喜助)가 운영하던 파칭코에 모금함을 놓고 모은 돈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10] 현재 국민훈장 동백장으로 승계(상훈 기록상 전중천학자로 기록됨).[11] 일부 후보들은 윤학자가 후보라고 하자 자발적으로 후보에서 빼 달라고 요청했다.[12] 지금의 원장은 윤치호, 윤학자 부부의 외손녀이자 장녀 윤청미(타우치 키요미)의 딸인 정애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