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원
대일통(大一統)이라는 단어는 《춘추공양전》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이다. 《춘추》의 첫 머리인 '元年, 春, 王正月'를 '元年者何 君之始年也 春者何 歲之始也 王者孰謂 謂文王也 曷為先言王而後言正月 王正月也 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라고 해석하면서 대일통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비록 대일통이라는 단어는 《춘추공양전》을 통틀어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춘추와 춘추공양전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2. 의미
대일통이라는 말은 하나로 통일됨을 드높인다는 의미로 이는 공자가 바라던 주나라 천제로 모든 제후들이 통일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존속하더라도 오직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는 수평전 정통관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과 그가 바라던 이상 국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한 명의 왕 아래 모든 것들이 질서 있게 유지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정치적으로 통일된 영토와 문화적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덕치가 포함된 개념이다.3. 한무제의 대일통
대일통이라는 말은 한무제 때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동중서는 한 무제 시기 때 《춘추》를 연구하는 공양학을 주도하면서 한나라의 정통성을 높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황제를 만들기 위하여 대일통 사상을 사용한다. 이후 대일통 사상은 공양학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4. 사마천의 대일통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그의 대일통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통일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중원 통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통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나열한다. 사마천은 춘추공양전의 대일통 사상을 발전시켜 주변 외국과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국가와 민족의 대일통 사상을 제시한다. 황제를 한족은 물론 주변 민족들의 공동 조상으로 설정하여 모두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통일된 상태를 강조하고, 이러한 평화공존의 상태를 깨는 무리한 정벌 전쟁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5. 건륭제의 대일통
건륭제의 치세 60년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일통을 추구하고 완성한 시대였다. 청나라는 중원 입성 이전부터 영토의 확장과 통일 작업에 착수했다. 홍타이지 시대에는 내몽골을 병합했고, 강희제 때부터 건륭제 시대까지는 서몽골에 웅거한 준가르와 70여 년에 걸쳐 격돌하여 승리했다. 또한 회부(1758년~1759년, 준가르 정벌까지 합쳐서 전비 3300만 냥 소모)와 대금천(1747년~1749년, 전비 2000여 만 냥 소모), 소금천(1771년~1776년, 전비 7000여 만 냥 소모), 미얀마(1762년~1769년, 전비 900만 냥 소모), 베트남(1788년, 전비 100만 냥 소모), 네팔(1791년~1792년, 전비 1052만 냥 소모)을 공격했고, 타이완에서 일어난 임상문의 난(1756년, 전비 800만 냥 소모)을 진압했다. 참고로 당시 1760년대 청의 연간 재정 수입은 은 4500만 냥 내외였다.
유교적인 덕치는 《사고전서》 편찬을 통해 실현되었다. 정통적인 관점에서는 《사고전서》 편찬을 사상 탄압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사고전서》 편찬은 건륭제의 덕치 이념을 상징적으로 실현한 사업이기도 하다. 왕조가 장기간에 걸쳐 번영하자 재야의 고증학자조차도 성세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건륭제와 고증학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사고전서》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이리하여 대일통의 문화적 측면이 완성도었다.
대일통 세계에서 구현된 평화를 바탕으로 도시와 농촌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각종 물자의 생산과 유통, 소비도 확대되었다. 또한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건륭 중반기에는 호부가 관할하는 은 저장고에 2년치 세입에 상당하는 8000만 냥의 은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건륭 후반기에 들어서자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곡물 수입 지역인 강소, 절강, 복건, 광동 등지는 물론 곡물의 유출 지역인 호남에서조차 식량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미곡 수입지에서는 곡물 수요가 충족되지 않고, 유출지에서는 양식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곡식을 외지로 팔았기 때문이다. 관료 사회에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다. 그 정점에는 건륭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화신이 있었다. 또한 기존의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백련교도 허난성의 향촌 일대에서 깊숙이 뿌리내리며 청조를 쇠퇴의 길로 몰아갈 채비를 차렸다.
건륭 연간 전반기는 유례없는 대일통이 실현된 시기였다. 그러나 후반기는 번영의 이면에 내재된 각종 모순들이 분출하면서 사회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불러일으킨 근원적 요소는 청대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늘어나버린 3억 가량의 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