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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fff {{{+1 데사}}} }}} {{{#fff Деса}}} | |
출생 | 미상 |
사망 | 1165년 이후 |
재위 | 세르비아 대공 |
1153년 ~ 1155년 | |
세르비아 대공 (복위) | |
1162년 ~ 1165년 | |
아버지 | 우로시 1세 |
어머니 | 안나 디오예니사 |
형제 | 옐레니, 우로시 2세, 벨로시, 마리아 |
가문 | 부카노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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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4대 대공.2. 생애
세르비아 대공국 2대 대공 우로시 1세와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의 손녀인 안나 디오예니사의 3남이다. 형제로 옐레니, 우로시 2세, 벨로시, 마리아가 있었다. 누이 옐레니는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의 왕비였으며, 마리아는 즈노이모 공작 콘라트 2세의 부인이었다. 형제 벨로시는 누이 옐레니의 후광을 받고 1141년부터 헝가리 왕국의 궁정백이 되었으며, 데사는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1143년 또는 1144년에 두클랴의 영토였던 트라부니야와 제타의 통치자로 세워졌다. 1144년 또는 1145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큰형 우로시 2세가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으며, 1146년 동방 원정을 떠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를 돕기 위해 보조병 300명을 보냈다.1143년에서 1149년 사이, 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두클랴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 크냐지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와 의 형제들을 밀어내고 두클랴 시를 점거했고, 라도슬라프와 두 형제는 코토르 주변으로 이동한 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가 통합되면 제국에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해 그전에 응징하기로 했다. 1149 ~ 1150년 마누일 1세의 2차례 공세를 버티지 못한 우로시 2세는 몸소 황제를 알현해 그 앞에 엎드려 영원히 로마인의 노예로 남겠다고 서약했다. 또한 미래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황제에게 전사 2,000명을 보내고,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전처럼 300명이 아닌 500명의 전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데사가 자신의 뜻에 반하여 제국을 적대했으니,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우로시 2세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줬고, 데사가 두클랴에서 물러나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달마티아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걸 허용했다. 그 후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화려한 옷을 입은 세르비아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내세운 개선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115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헌장에는 데사가 두클랴, 트라부니야, 자훔리예의 군주로 언급되었고, 1151년의 헌장에도 다시 언급되었다.
이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를 도운 헝가리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1151년부터 1155년까지 일련의 원정을 벌였고, 우로시 2세는 그런 황제를 도왔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우로시 2세가 동로마 제국에 납작 엎드린 것에 반감을 품었다. 특히 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기껏 얻었던 두클랴를 내준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누이 옐레니가 헝가리 왕비였고 형제 벨로시가 헝가리 궁정백으로 활동하는 만큼, 헝가리 왕국이 동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는 걸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1153년, 데사는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의 후원에 힘입어 우로시 2세를 축출했다.
1155년 9월 헝가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은 마누일 1세는 1155년 또는 1156년 헝가리 귀족들을 압박해 데사를 축출하고 우로시 2세를 복위하도록 했다. 그 대신, 데사에게 라스 인근의 덴드라 일대를 영지로 수여했다. 1162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우로시 2세를 폐위하고 벨로시를 새 대공으로 세웠다. 벨로시는 곧 대공위를 데사에게 넘겼다. 마누일 1세는 이를 승인했지만, 덴드라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데사는 덴드라를 넘기길 거부했고,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의 지원을 토대로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1165년 여름, 마누일 1세는 데사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데사는 이에 제대로 맞서보지 못하고 라스 인근에서 생포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이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분할하기로 했다. 자비다의 장남 티호미르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삼고, 차남 스트라치미르를 서모라바 공작, 삼남 미로슬라프를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아의 공작으로 삼았으며, 사남 스테판 네마냐를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레케의 영주로 삼았다. 이후 데사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