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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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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
파일:Zur Genealogie der Moral.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87년

1. 개요2. 니체의 요약3. 내용
3.1. 제 1 논문 : 선악의 개념3.2. 제 2 논문 : 양심의 가책3.3. 제 3 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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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1] (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후기 저서로서, 《선악의 저편》에서 말한 "도덕에서의 노예반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내용을 확장시켜, 3개의 논문으로 작성된 책이다. 내용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귀족적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전도시킨 것이 노예적 가치(도덕)인데, 이 내면화 과정에서 발생한 양심이 신에 대한 '부채의식'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종교적 '금욕주의'를 탄생시켰고, 사제들은 이러한 금욕주의를 이용하여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제1논문에서 선악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바뀌고 전도되어 왔는가를 추적하고, 제2논문에서는 그런 선악의 개념이 '양심의 가책(죄책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면서, 양심의 가책이 그리스도교 신에 대한 부채의식에 어떤 식으로 적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3논문에서는 그러한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금욕주의적 이상이 사실 일종의 '힘에의 의지'임을 분석하고,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금욕주의의 '힘에의 의지'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제1논문은 개요에 해당하고, 제2논문에서 본격적인 내용이 밝혀지며, 제3논문은 앞선 내용을 응용하여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준다. 그래서 제2논문만 읽는 사람들도 많은데, 니체 특유의 서술 때문에 제2논문의 주장들마저도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어서 이야기가 딴 길로 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 연결되는 내용이니, 하나하나 집중해서 읽고 요약해서 종합해야 제대로 된 파악이 가능하다.

2. 니체의 요약

니체는 자신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서 《도덕의 계보》를 이렇게 요약한다.
첫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교를 규정하는 심리의 진실을 폭로한다. 그리스도교는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 아니라 원한의 정신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반동이며,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맞선 거대한 봉기다.

두번째 논문은 양심의 심리학을 제시한다. 양심은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잔인함의 본능이 자신을 외부로 방출할 수 없게 되자 자기를 향하게 된 것이다. 잔인함이라는 것이 가장 오래되고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문화의 토대라는 사실이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혀지고 있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주의적 이상, 즉 성직자의 이상이 극히 해로운 이상이고 종말을 향하는 의지이며 데카당한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갖는 엄청난 힘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대한 답은,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처럼 신이 성직자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제까지 유일한 이상이었으며 그것과 경쟁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2]

3. 내용

3.1. 제 1 논문 : 선악의 개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ㆍ선함(gut)'이라는 단어에 대한 어원학적 탐구를 통해 그것의 원래 의미를 찾아나간다. '좋음(gut)'은 원래 귀족을 가리키는 '고귀한', '기품 있는', '특권을 지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좋음'과 관련된 단어들과 어근에서는, 귀족들이 스스로를 '강력한 자', '지배하는 자', '명령하는 자'라는 뉘앙스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립하는 단어인 'schlecht'라는 독일어는 원래 평민을 가리키는 '소박한', '단순한'이라는 뜻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가 없었다. 즉, 귀족들은 스스로를 '좋은 것(gut)'으로 평가하고 나서, 이후에 그렇지 못한 평민들을 '나쁜 것(schlecht)'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반면 gut에 대립하는 또 다른 단어, '악함(böse)'은 귀족이 생각해낸 단어가 아니다. 넘쳐흐르는 자신감과 활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은 자신의 넘치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므로 경멸할 점이 전혀 없고 존경할 점이 매우 많은 자만을 자신의 적으로 삼기 때문에 '(상대가) 악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악함(böse)'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우리는 모든 귀족적인 종족의 근저에서 맹수, 즉 전리품과 승리를 탐욕스럽게 찾아 헤매는 야만인(Barbar)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미치광이 같고 비이성적이고 갑작스럽게 표출되는 '대담함',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그들이 행하는 모험의 예측 불가능함, 안전ㆍ육체ㆍ생명ㆍ안락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경멸, 온갖 파괴를 자행하고 승리와 잔인함을 탐닉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전율할 정도의 쾌활함과 깊은 쾌감 등을 말이다. 그들 기사적 귀족에게는 강한 육체, 젊고 왕성하며 넘쳐흐르기까지 하는 건강, 그러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투기와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다. 반면 이러한 귀족들에게 억압당하고 짓밟히고 능욕당한 자들은 무력감에서 비롯된 복수심 서린 간계(奸計)로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악한 자들과는 다른 존재, 선한 존재가 되자!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우리처럼 인내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자이다."

즉, 약한 자들은 가장 깊은 증오와 원한(르상티망)을 가지고, 자신의 적과 정복자들의 가치(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를 철저하게 '악한 것(böse)'으로 전도시킨 것이다. 이른바 노예도덕에서는,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 가득찬 비굴함은 '겸손'으로 바뀌며, 자신이 증오하는 자들에 대한 복종은 '순종'으로 바뀌고, 약한 자의 비공격성, 그가 풍부하게 지닌 비겁함 자체, 문 앞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내'로 바뀐다. 여기에선 복수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 싶어 하지 않음이라고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라고까지 불린다.

3.2. 제 2 논문 : 양심의 가책

니체는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 '양심의 가책(죄책감)'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양심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서 '형벌'을 우선 살펴본다. 머나먼 과거에 형벌이라는 것은,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보상으로,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채권자가 그 쾌감을 맛보게 하고 피해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잔인함이라는 것이 고대 인류의 거대한 축제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것이었던가. 그것은 오늘날에도 정신화되고 신성화되어서 이어져오고 있다. 실로 냉혹한 명제이긴 하나,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한 일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역사는 '잔인함이 없이는 축제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형벌에도 축제적인 성격이 참으로 많이 존재한다! 이런 자들에게서 '양심의 가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하다. 반대로 형벌을 당하는 입장에 있는 '죄 지은 자'에게서 형벌은, 대체로 인간을 비정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범죄자는 재판 절차나 집행 절차를 실제로 목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행위와 행위방식을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행동만 놓고 보면, 자신의 범죄나 공동체의 형벌이나 그 폭력적 행위 자체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벌이 죄를 지은 자에게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역사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저 수천 년을 생각해본다면, 죄책감의 발달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한 것은 도리어 형벌이었다고 주저 없이 단정할 수 있다.

그럼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지배자의 폭력에 자유를 억압당한 약자들이, 외부로 향하던 그 자유의 본능을 그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내면세계에 폭발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바깥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 하는 병에 걸린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박해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이 은밀한 자기 학대, 이러한 예술가적인 잔인성, 자기라는 둔중하고 반항적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소재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에 의지, 비판, 모순, 경멸, 부정을 새겨 넣는 이 쾌감, 자신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분열시키는 영혼의 이러한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 전체야말로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들의 진정한 모태로서 수많은 신기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쾌감은 잔인성의 일종이다.

한편, 종족 공동체에서 현재의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으로 존속한다는 확신에서 조상에게 그러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법률적 의무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빚을 지불하기 위해, 제물, 축제, 예배당, 의례, 특히 조상이 만든 모든 관습에 대한 복종함으로서 그 의무를 행했다. 조상과 그의 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 조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이러한 종류의 논리에 따라 종족 자체의 힘이 증대되는 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필연적으로 커진다. 가장 강력한 종족들의 선조는 증대되는 공포 자체의 상상에 의해서 종내에는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지게 되고,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신으로 변형된다. 아마도 여기에 신들의 기원 자체가, 즉 공포로부터의 기원이 존재한다!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신성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의 조직 형태가 몰락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저 널리 퍼져 있던 노예들과 예속된 주민들은 강제에 의해서든 굴종과 모방에 의해서든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의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수천 년에 걸쳐서 부단히 성장했다. 그것은 항상 지상에서 신 개념과 신에 대한 감정이 성장하고 고양되는 것에 비례해서 성장했다. 세계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투쟁과 통합의 역사는 또한 항상 보편적인 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독립적인 귀족계급을 제압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전제 정치는 항상 어떤 일신교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도달된 최대의 신인 그리스도교 신의 출현과 함께 또한 최대의 부채의식이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비관적인 일이지만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져버린데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은 그 빚을 자신의 고통으로 변제하려고 한다. 즉, 신에 대한 죄(빚을 갚지 못해서 생긴 죄)라는 생각이 그에게 고문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본래 '양심의 가책'에는 귀족들의 가치(대담함, 공격성, 자신감, 욕망)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약자들의 기억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신에 대한 부채의식'에 적용되자 인간은 자신의 떨쳐버릴 수 없는 동물적 본능들 자체를 신에 대한 죄로 해석하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 일어날 때마다 '신'과 '악마'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마침내는 빚을 상환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어떠한 벌로도 자신이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즉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영원한 벌'의 사상이 싹튼다. 인간은 이러한 이상을 세움으로써 그와 같은 이상 앞에서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침함을 분명히 확인하려고 든다. 그렇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의 의지[3]를 억제하려고 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탄생이다.

3.3. 제 3 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자기 파괴를 하는 삶의 적대자이지만, 이 파괴의 대가, 자기 파괴의 이 대가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경우에도, 그는 바로 이 상처 자체에서 그로 하여금 살아가게끔 하는 힘을 얻고 있다. 사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인간은 대체로 보아 하나의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괴로워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져 있기만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받고 고통 자체를 찾기까지 한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준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무를 의욕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생명력 일반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리는 수단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지배하는 불쾌감과 투쟁한다. 가능하면 의욕도 소망도 다시는 갖지 말 것. 흥분시키거나 '피'를 끓게 하는 모든 일을 피할 것.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 것, 평정심을 유지할 것, 복수하지 말고, 부자도 되지 말며, 일하지 말 것, 구걸할 것, 가능하면 여자를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거나 가능하면 적게 가까이 할 것 등. 그들은 이 도움으로 저 깊은 생리적 우울증에서 정말로 벗어났다. 기계적 활동 역시 반복되는 하나의 활동만이 의식에 들어오며 이에 따라 고통이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게 됨으로써 고통스러운 생존이 상당한 정도로 경감된다. 우울증과 싸우는 좀 더 귀중한 수단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작은 기쁨을 처방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줌으로써(선행을 하고, 선물을 주고, 짐을 덜어주고, 도와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상을 주는) 기쁨을 느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선행을 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고, 도와주고, 상을 주는 이 모든 행위에 수반되는 '가장 작은 우월감'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생리적으로 장애를 갖는 자들이 상용하는 가장 강력한 위로 수단이다. 무리를 형성하는 것도 우울증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진보이며 승리이다.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개인에게도 새로운 관심이 강화되고, 이러한 새로운 관심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주 그 자신이 가장 사적으로 느끼는 불쾌감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넘어서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순진한 수단이다. 더 흥미롭고 '순진하지 않은' 수단들도 있다. 그것들이 겨냥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무절제한 감정 상태'를 유도하는 것이다. 모든 격렬한 감정, 즉 분노, 공포, 음욕, 복수심, 희망, 승리감, 절망, 잔인함과 같은 감정을 갑자기 폭발시키므로써 인간을 만성적인 우울로부터 깨어나게 하고 단지 잠깐이라도 숨 막히는 고통과 지속적인 비참함을 쫓아버리게 한다. 이것은 뭘 하든 따분하고 재미를 잃어버린 오래된 고통을 잊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마취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순진한 수단이든 순진하지 않은 수단이든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금욕주의적 이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과 욕망을 찾지 못하게 된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삶과 욕망을 굳이 쫓아야 하는지도 물어볼 것이다. 그것은 '길들었다', '약화되었다', '용기를 잃었다', '심약해졌다', '연약해졌다', '거세되었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한 번 살펴보라.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이러한 치료법을 적용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병은 놀라운 속도로 심화되었고 확산되었다. 그 '결과'는 항상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병든 상태에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는 대규모로든 소규모로든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일어났다. 우리는 참회와 구원을 위한 훈련의 결과로서 무서운 간질병이 유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날에도 금욕주의적 죄악설이 다시 큰 성공을 거둘 때는 항상 감정의 동일한 변화가 곳곳에서 동일한 간격과 반전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감정을 유약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병든 자들이 건강한 자들을 병들게 하는 수법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철학자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간호사나 의사가 되는 것, 그리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 말을 하거나 그들을 고취시키기 위해 채찍질을 드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철학자가 자신의 임무를 그런 것으로 여긴다면 이보다도 더 심하게 오해하고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삶이 각자의 고통을 만드므로, 그 고통이 무엇인지는 진정 각자만이 알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도 진정 각자에게 달려 있다. 외부의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남의 병을 고칠 수는 없다. 그의 섣부른 위로나 채찍질은 병든 자를 더 병들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할은 단지 병든 자들이 건강한 자들을 병들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상에 있어서 최고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한 자들이 병든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병든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하며, 건강한 자들이 자신을 병든 자들과 혼동하지 않게끔 하는 그 모든 일이 필요하다. 고귀한 자(건강한 자)가 스스로를 저열한 자(병든 자)의 도구로 격하시키게 놔둬서는 안 된다! 거리의 파토스가 양자의 임무를 영원토록 분리시켜야만 한다! 고귀한 자들의 생존권, 불쾌한 소리만 내는 깨져버린 종에 대해서 완벽한 소리를 내는 종이 갖는 특권은 실로 천배나 더 크다. 오직 그들만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병든 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해야 하는 것을 그들이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은 병든 자들의 의사나 위안자 혹은 '구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4. 여담


[1] 이 책은 친구인 파울 레 박사가 쓴, 《도덕감정의 기원》이란 책에 대한 논박서로 기획되었다.[2]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11~214[3] 동물적 본능까지 포함해서.[4] 물론 『도덕의 계보』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우상의 황혼』에서도 산발적으로 얘기하고,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아예 건강과 데카당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한다.[5] 교회는 어떻게든 절단이라는 방식으로 정열과 싸운다. 교회가 제시하는 처방과 '치료법'은 거세다. 교회는 결코 '어떻게 하면 어떤 욕망을 정신화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중략)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것은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고 너무나도 퇴락하여 스스로 절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욕망과 싸울 때 본능적으로 택하는 방법이다. 즉 그러한 방법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라 트랍 수도원을 필요로 하는, 다시 말해 자신과 열정 사이에 일종의 궁극적인 적대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단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인 것이다. 극단적인 수단이 불가결한 사람들은 퇴락한 사람들뿐이다. 의지의 약함,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자극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의 결여도 다른 형태의 퇴락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55~56)[6] 모든 비정신성, 모든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충동에도 따르는 것이다.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많은 경우 이미 병약함과 쇠퇴와 쇠진의 징후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94)[7] 병들어 있다는 것, 허약하다는 것에 대해 무언가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상태에서는 진저한 치유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줄 모르고 아무석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며 어떤 것도 퇴치할 줄 모르게 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과 사물이 집요하게 그에게 달라붙고, 체험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병들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원한 자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병자는 오로지 하나의 위대한 치료법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숙명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하지도 않으며 자기 속으로 흡수하지 않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47~48)[8]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명예와 여자와 돈 때문에 애쓰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44년을 살고 나서도 명예와 여자와 돈 때문에 애쓴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들을 얻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00)[9] 물론 한 사람의 내부에는 여러 의지가 상존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우선 순위(위계)'가 가장 윗순위인 의지의 욕망(자신의 사명과 과제로 여기는 것)을 쫓으라는 것.[10] 여기서 개인주의자란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