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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02:35:38

힘에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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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2.2. 니체의 '힘에의 의지'
3. 논란
3.1. '권력에의 의지'가 맞다? 틀리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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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용어. 독일어로는 "der Wille zur Macht",[1] 영어로는 "the will to power". 정확한 개념은, 무언가를 넘어서려고 하는 의지를 말하며, 이를 통해 성장한다는 느낌을 얻고자 한다.[2][3][4]

2. 상세

2.1.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삶에의 의지(will to live)'가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지배한다고 파격적으로 주장한다. '삶에의 의지'란, '욕망(본능)'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맹목적인 욕망이 세계의 본질(본체계)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기존 철학으로 대표되는 헤겔은 세계의 본질이 '이성'이라고 보았지만,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이성'적이지 않으며 '욕망'으로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외부가 나에게 드러나는 표상'을 지배하는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will)'이며, 이 의지를 통해 세상은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삶에의 의지'는 다른 말로 '욕망'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고통에 빠지고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에 빠지게 되는데, 인간은 이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삶은 결국 허무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끝이 없는 욕망은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명상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 것을 주장한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5]

2.2. 니체의 '힘에의 의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 우상의 황혼 中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will to live)'를 약간 비틀어서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주장했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란, 더 높은 것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 '스스로 그 사건에 대해서 자신만의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니체가 말했듯이 '창조하는 행위'이다. 즉, 사람들은 평가를 통해 각자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며, 이러한 가치의 평가는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로 다툴 수 밖에 없다.

이 가치들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의지가 곧 '힘에의 의지'가 된다. 자신만의 평가를 내려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나의 이런 가치를 '남들의 가치'보다 더 높은 곳에 두고자 하는 의지. 가치의 경쟁을 통해 서로의 가치가 자극받고 다듬어져서 점점 높아지며, 이윽고 높아진 자신의 가치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하는 의지. 그것이 바로 니체가 바라는 '힘에의 의지'이다.

따라서 니체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가치들을 언제든지 파괴하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신, 도덕, 국가, 이념 등의 절대적으로 숭배되는 것이라도 말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숭배되고 있는 이러한 가치들은 '자신의 가치'를 옭아매는 '타인의 가치'에 불과하며, 자신의 삶을 도리어 옭아매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신, 도덕, 국가, 이념은 니체 생존 당시에도 절대적인 이성으로 추종받았는데, 니체는 이것을 사정없이 부수어 버린 것. 결국 철학사에서 니체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주류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니체를 두고 망치를 든 철학자라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가치의 경쟁에서 패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증오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상대의 가치는 나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자 촉진제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의 가치 역시 발전할 수 있다. 나의 가치를 높혀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가치가 존재하는 덕분이다. 따라서 나는 '가치'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경쟁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를 옭아매는 이러한 기존 가치들을 '중력'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중력'은 우리의 몸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력'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즉, 이 '힘'이란, 기존 가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힘'을 말하며, 또한 이 '힘'은 우리가 기존 가치를 재평가하여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낼 때 생겨난다. 이러한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힘에의 의지'이며, 이를 통해 몸은 가벼워지고 춤출 수 있는 자유(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치로 살아가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남이 만들어 놓은 가치들에게 지배당하지 말고, 자신이 평가한 자신의 가치를 따르자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기존 가치의 재평가는, 니체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창조'이며, 일종의 '놀이'인 셈.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굴종하여 가식적인 겸손과 사랑으로 외치는 '노예 도덕'에 망치를 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존 도덕에 의해 '노예'로 사는 이런 가치체계를 모조리 뒤집어엎고는,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기를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자하는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3. 논란

3.1. '권력에의 의지'가 맞다? 틀리다?

니체가 말하는 Wille Zur Macht는 그동안 한국에서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어 왔다가, 책세상판 니체 전집의 편찬과 더불어 이에 기여한 한국의 니체 연구자들이 Wille Zur Macht를 '힘에의 의지'로 번역함으로서, 한국철학계 내에서 '힘에의 의지'라는 번역어가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몇몇 학자들은 Wille Zur Macht를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며, 예전에 널리 쓰이던 '권력에의 의지'라는 표현이 맞다는 주장을 한다.[6] 니체가 Macht를 권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한국의 주류 니체 연구가들이 '힘에의 의지'라는 번역어를 내세우는 것은, 니체를 지나치게 탈정치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 학자들의 주장은 곧바로 반박을 받는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Macht는 독일어로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맞고 니체도 그런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니체의 저작에서 Kraft와 Macht라는 용어가 정확하게 그것들에 상응하여 사용된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뿐더러,[7]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 개념 자체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권력의 의미와 다르므로,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니체는 지배와 복종 관계에 있어서 다른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자유 개념을 주장하는데, 니체에 의하면 자유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극복할 어떤 것에 시간이나 정성을 쏟아붓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다.[8] 즉, 니체에게서 자유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활동을 얼마나 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니체의 정의에 따르면, 저항할 가치가 있으면서도 그 저항이 클수록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으므로, 진정한 강자는 '깊어지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삶의 고통을 찾아 낮은 데로 내려가고자 한다.[9][10] 즉, 정확하게 말하면, 니체는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게 더 많아진다는 느낌'을 추구한다. 니체는 '현실의 추잡한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커진다는 느낌,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지고 시야가 더 넓어진다는 그 느낌을 추구한다.

예컨대, 니체는 정치적으로도 카이사르 같은 폭군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1] 즉, 니체가 말하는 '건강한 권력욕'(지배욕)이란 '저항을 극복'하여 '성장한다는 느낌'을 얻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 권력의 사용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런 권력에 저항하고 넘어서기 위한 나 자신의 정당한 노력에서 성취감(성장한다는 느낌)을 얻는다. 그러므로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를 '정치 권력'를 부정하는 의미로도 많이 쓰기 때문에, 정치 권력을 추구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못하며, 따라서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대다수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니체가 정치 권력을 부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획득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고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력한 자들은!"

"보라, 이 재빠른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는 꼴을! 그들은 서로 밀치며 기어오르고, 따라서 서로를 진흙탕과 심연 속으로 끌어내린다. 그들 모두는 왕좌에 오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광기다. 마치 행복이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하다는 듯! 때로는 진흙탕이 왕좌에 앉아 있고, 때로는 왕좌가 진흙탕에 앉아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니체는 노동자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 진보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 사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개인 각각의 '의지'들이 서로 싸우고 합쳐지는 역사를 거쳐 자연스레 그 사회의 생존 조건을 구성한 것이 '권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는 '사회의 본능'이기 때문에 없앨 수 없고, 없애도 또 다른 형태로 다시 생길 수밖에 없다. 단, 마찬가지로 그 '권위'가 있어야 되는 이유는 그것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 저항하지 않고 만족하는 다수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관할 것이라는 점, 개인 각각의 판단에 따르기 때문에 점진적인 진보는 가능하지만 급진적인 혁명은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 반민주주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면모가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권위주의를 용인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니체 사상을 단체주의적인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연관시키는 것도 틀림없는 잘못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4. 여담


[1] 생략해서 ' WM '이라고도 한다.[2] 힘에의 의지를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설명 중의 하나는, 니체가 삶을 음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남의 음악을 따라만 한다면 곧 재미없어질 것이다. 음악을 대충해도 싫증날 것이다. 음악은 자신이 실제로 불러야 재밌고, 또한 열정적이고 힘이 있어야 재밌다. 삶도 그렇다. 힘이 없고 축처지고 모든 것이 권태롭고 매사가 뻔한 삶을 원하는가? 고통스럽고 위험해보이고 예측불가능하고 열정적인 삶을 원하는가? 니체는 후자가 더 좋은 음악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니체는 이렇게 주장한다. 음악에 열정이 없다는 것은 그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3]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니체의 지배욕은 약자를 짓밟으라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파토스에 따라서 '자신 보다 더 뛰어난 사람(또는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려고 하는 지배욕이라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데, 바로 이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배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적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과는 단지 거리를 둘 뿐이고, '경멸할 점이 전혀 없고 존경할 점이 매우 많은 자'만을 자신의 적으로 삼는다. 쉬운 예를 들자면, 올림픽에 나간 운동선수들은 강력한 경쟁자들과 함께 싸우는 것에서 자신이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지, 평범한 일반인을 이긴다고해서 기쁨을 느끼지는 않는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상대를 증오하지도 않는데, 대등한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자신도 발전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즉, 지배욕은 '극복할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다. 거기에는 '자신의 고통'도 포함된다.)[4] 이러한 '힘에의 의지'의 추구는 '타인의 의지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살아갈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되며, 이것은 결국 개인주의로 귀결된다. 니체는 이를 주권자로서의 개인이라고 칭하는데,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관습의 도덕에서 다시금 벗어난 개인이며,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인(왜냐하면 '자율적'과 '윤리적'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지닌 인간, 자신의 가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인간,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다. 즉, 지배욕이라고 해서 타인에게 함부로 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자기 규율과 자아 극복을 전제로, 자신이 존경하는 상대를 극복하려는 의지인 것이다.[5] 쇼펜하우어는 이라는 관념 또한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객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살아 남고자 하는 갈망 자체가 신이라는 망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 이것은 또한 쇼펜하우어의 무신론적 입장인데 쇼펜하우어는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했다.[6] 니체의 원문에서도 Macht(권력)와 Kraft(힘)가 명백히 구분되어 쓰이고 있으며, 니체의 'Kraft'는 강자/약자, 지배자/노예를 구분하는 질적 차이를 부여하는 가치판단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Macht'에는 이러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고 약자나 강자건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권력'을 추구한다고 보는 니체의 사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김진석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252~253p.)[7] "김진석은 Kraft가 자연적ㆍ존재론적 ‘힘’을, Macht가 정치적ㆍ사회적 ‘권력’을 각각 의미한다고 보는데, 니체의 저작에서 Kraft와 Macht라는 용어가 정확하게 그것들에 상응하여 사용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김주희의 논문 『니체의 사유에서 영혼의 위계와 힘의 척도들』)[8] "자유에 대한 나의 개념 . – 어떤 것의 가치는 때로 당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성취하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이 그것에 대해 지불하는 것, 즉 우리에게 드는 비용에 있다. (중략) 개인에게서나 민족에게서 자유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극복해야 하는 저항의 크기, 높은 곳에 머무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노고의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 Mein Begriff von Freiheit. – Der Wert einer Sache liegt mitunter nicht in dem, was man mit ihr erreicht, sondern in dem, was man für sie bezahlt – was sie uns kostet. (...) Wonach mißt sich die Freiheit, bei einzelnen wie bei Völkern? Nach dem Widerstand, der überwunden werden muß, nach der Mühe, die es kostet, oben zu bleiben.)[9] "지배욕: 그것은 순수함과 고독에까지도 유혹적이며 자족한 높이에까지 올라간다. 지상의 천국에 진홍빛 행복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어떤 사랑과도 같이 불타면서. 지배욕: 그것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힘을 갈망할 때, 누가 그것을 병적인 욕망이라 부르겠는가! 진실로 그와 같은 욕망과 하강에는 아무런 유약함의 흔적도 없다. 고독한 봉우리가 영원히 고립되는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 산이 골짜기로 내려오는, 봉우리에서 낮은 곳으로 부는 그 바람. 오, 누가 그와 같은 갈망에 대한 올바른 세례명과 덕의 이름을 발견하랴! ‘선사하는 덕’ —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을 이렇게 불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Herrschsucht: die aber lockend auch zu Reinen und Einsamen und hinauf zu selbstgenugsamen Höhen steigt, glühend gleich einer Liebe, welche purpurne Seligkeiten lockend an Erdenhimmel malt. Herrschsucht: doch wer hieße es Sucht, wenn das Hohe hinab nach Macht gelüstet! Wahrlich, nichts Sieches und Süchtiges ist an solchem Gelüsten und Niedersteigen! Daß die einsame Höhe sich nicht ewig vereinsame und selbst begnüge; daß der Berg zu Tal komme, und die Winde der Höhe zu den Niederungen: O wer fände den rechten Tauf- und Tugendnamen für solche Sehnsucht! »Schenkende Tugend« – so nannte das Unnennbare einst Zarathustra.)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n drei Bösen」[10] 강함의 비관주의(염세주의)가 있지 않을까? 현존의 가혹함ㆍ전율ㆍ악함ㆍ문제성에 탐닉하는 지적 편향은 현존의 안녕ㆍ넘치는 건강ㆍ충만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혹시 넘침 자체로 인한 고난이 있는가? 눈초리가 아주 매서운 유혹자와도 같은 대담함에서 공포스러운 것을, 제 힘을 검증해볼 수 있는 적, 존경할 만한 적으로서 염원하는가? "공포"가 무엇인지를 한 수 가르쳐줄 적으로서? (비극의 탄생 「자기 비판의 시도」 ㅡ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출곤·박술 옮김, 읻다, 2023(개정판), p.12)[11] 개인에게서나 민족에게서 자유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극복해야 하는 저항의 크기, 높은 곳에 머무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노고의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의 유형은 가장 큰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고 있는 곳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곧 폭군의 정치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리고 예속이라는 위험의 문턱 가까이에서. 이것은 특히 '폭군'이라는 말이 일종의 무자비하고 끔찍한 본능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최대의 권위와 규율을 요구하는 본능으로 이해됐을 때, 심리학적으로 참이다. ㅡ 폭군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참이다. 확인해보려면 역사를 한 번 둘러보기만 해도 된다. 어느 정도라도 가치가 있었거나 가치를 갖게 된 민족은 자유주의적 제도 아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외경할 만한 무엇인가로 만들었던 것은 커다란 위험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4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