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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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체 대 바그너 : 어느 심리학자의 문서 (Nietzsche contra Wagne r: Aktenstücke eines Psychologen)』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8년 말에 쓴 마지막 저서로서, 자신의 이전 책들에서 바그너를 비판한 부분들만을 따로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2. 상세
바그너를 비판한 책 『바그너의 경우』를 출판한 이후, 니체는 바그너를 추종하는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는다.[1] 니체는 한때 열혈한 바그너 찬미자였었으나, 바그너가 죽고 나니까 돌변하여 혹독한 비판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니체는 바그너가 죽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예전부터 바그너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항변한다. 니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예전에 썼던 자신의 책들 중에서 바그너를 비판하는 부분들을 싹 다 모아 한권의 책으로 편집한 것이 바로 이 책 『니체 대 바그너』이다.1888년 12월 15일, 니체는 원고를 라이프치히의 나우만 출판사로 보냈다. 그리고 12월 20일, 출판사에서 『이 사람을 보라』를 먼저 출판하고 그 다음에 『니체 대 바그너』를 출판하겠다는 전보가 왔다. 그런데 이틀 후인 12월 22일 니체는 마음을 바꾸어 『니체 대 바그너』의 출판을 포기하려고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미 자신과 바그너의 관계에 대해 결정적인 부분까지 밝혀놨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2]
그래서 니체는 출판사에 『니체 대 바그너』의 출판을 중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지만, 그 사이에 출판사가 완성시킨 교정 원고가 토리노에 이미 도착해버렸다. 이 교정 원고의 도착은 니체의 기분을 다시 바꾸어놓아 니체는 다시 교정을 보고 12월 25일에 출판을 승인한다. 이로부터 불과 9일 후[3],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광증이 발작해 미쳐버렸다.
3. 내용
※ 책의 내용은 니체 자신의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즐거운 학문』,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바그너를 비판한 부분만 발췌하여 정리하고 편집한 것으로, 각 챕터에 대한 출처는 다음과 같다.
순서 | 챕터 제목 | 출처 |
1 | 서문 | 새로 작성한 글 |
2 | 내가 경탄하는 곳 | 즐거운 학문 87절 |
3 | 내가 반박하는 곳 | 즐거운 학문 368절 |
4 | 간주곡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7절 |
5 | 위험으로서의 바그너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 134절 |
6 | 미래 없는 음악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 171절 |
7 | 우리 대척자들 | 즐거운 학문 370절 |
8 | 바그너가 속한 곳 | 선악의 저편 254, 256절 |
9 | 순결의 사도 바그너 | 선악의 저편 256, 도덕의 계보 3부 2, 3절 |
10 | 내가 바그너에게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 서문 3, 4절 |
11 | 심리학자가 말한다 | 선악의 저편 269, 270절 |
12 | 후기 | 즐거운 학문 서문 3, 4절 |
13 | 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 디오니소스 송가 |
4. 바그너와 니체의 관계에 대해서
젊은 시절, 니체가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호평을 내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그너가 니체의 인생 초반에 미친 영향은 여러 면에서 결정적이었다. 니체와 바그너 사이에는 여러 공통분모가 있었다. 니체는 10대 시절부터 바그너의 음악을 알고 있었고, 바그너의 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바그너와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바그너는 1854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그의 철학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깊이 반영했다. 무식한(?) 음악쟁이가 무슨 철학이냐는 편견이 강했는지, 과거에는 바그너가 일방적으로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잘못된 견해가 일반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에 가깝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바그너보다 쇼펜하우어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니체는 바그너와 교류하기 불과 3년 전인 1865년 처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 니체는 바그너와의 토론을 통해 철학에 깊이 빠지게 되어 문헌학자로서가 아닌 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후 서서히 여러 가지 이유로 니체는 바그너 예술에 회의를 품게 된다. 바그너 작품들 자체가 내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불일치에 대해 점차 회의를 가지고 혐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바그너가 25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여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초연을 보고 나서 바그너에 대한 회의가 심화되었다.[4] 니벨룽의 반지에서 신의 의지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은 모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주인공 지크문트와 지크프리트의 연이은 실패와 죽음, 그리고 이로 인해 결국 염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삶의 긍정을 외치는 니체의 철학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결국 1882년에는 바그너의 유작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는 바그너가 기독교에 굴복했다고 비판하며 그를 데카당스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니체는 광증으로 정신을 잃기 전까지 『바그너의 경우』[5], 『니체 대 바그너』 등 바그너를 공격하는 저서를 계속해서 저술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바그너의 모든 것을 부정했고, 그래서 사상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니체의 바그너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을 근거로 그들의 관계를 단절로 정리하는 일은 섣부른 일일수도 있다. 야스퍼스의 말처럼, 니체의 바그너 비판은 시대비판의 의미를 지닌다. 창조적 인간의 가능성과 문화의 고양이라는 과업이 바그너와 함께 가능해진다고 여겨지는 한 니체는 바그너의 사람이자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이다. 그러나 최고의 인간과 고양된 문화의 실현이 바이로이트에서실패했다고 판단한 이후로 니체의 작업은 자신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유고들은 이들의 관계가 급격하고 가차 없는 단절로 파국에 이르렀다고 보는 그간의 일방적인 견해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 동안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유고들에 나타난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견해와 입장에 근거해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 데중요한 관계라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니체의 관점에서 단절이 아닌 정신적 해방과 확장으로 해석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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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이나 한 때 가장 존경했던 사람의 적으로 남아야 했던 일은 힘들었어. 그러기에는 내가 충분히 막돼먹게 생기지 않았잖아. 결국, 내가 싸워야 했던 것은 늙어가는 바그너였어. 실제적인 바그너에 관해서는, 나는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그의 상속자가 될 거야.” [6]
니체가 늙어가던 바그너와 구분하기를 원하고 자신이 그의 죽음 후에도 계속해서 후계자이기를 원했고 기념했던 바그너의 이상은 그의 희망처럼 유약하고 지친 늙은 바그너와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니체가 결별하기를 원했던 바그너와 달리, 니체가 바그너와 공유했던 이상을 통해 영원히 그와 결부되기를 원하는 실제적인 바그너는 니체 철학에서 여전히 고귀한 문화를 위해 투쟁하는 예술가로서 기능한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
초기 바그너의 모습을 니체가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후기 바그너의 초심 잃은 모습을 공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바그너와의 사이를 별들의 우정이라고 말하면서 별은 서로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듯이, 니체는 바그너를 친구로 보면서도 동시에 라이벌로도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6년 동안이나 한 때 가장 존경했던 사람의 적으로 남아야 했던 일은 힘들었어. 그러기에는 내가 충분히 막돼먹게 생기지 않았잖아. 결국, 내가 싸워야 했던 것은 늙어가는 바그너였어. 실제적인 바그너에 관해서는, 나는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그의 상속자가 될 거야.” [6]
니체가 늙어가던 바그너와 구분하기를 원하고 자신이 그의 죽음 후에도 계속해서 후계자이기를 원했고 기념했던 바그너의 이상은 그의 희망처럼 유약하고 지친 늙은 바그너와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니체가 결별하기를 원했던 바그너와 달리, 니체가 바그너와 공유했던 이상을 통해 영원히 그와 결부되기를 원하는 실제적인 바그너는 니체 철학에서 여전히 고귀한 문화를 위해 투쟁하는 예술가로서 기능한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
[1] 『바그너의 경우』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에서도 바그너를 비판하고 있다.[2] 12월 22일에 니체는 《니체 대 바그너》 대신에 《디오니소스 송가》를 출판하려 한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페터 가스트에게 보낸다. "《니체 대 바그너》를 나는 인쇄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을 보라》가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이미 결정적인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출판해볼까 한다." (니체전집 15, p.580)[3] 1889년 1월 3일[4] 니벨롱의 반지는 소재적으로 니체와 접점이 매우 많은 작품이다. "신들의 멸망", 그리고 "신의 의지를 초월한 자유로운 인간"의 출현을 고대하는 바그너의 이 작품은 니체를 상징하는 "신은 죽었다", "위버멘쉬"의 개념과 매우 깊이 연관된 것이다.[5] 이 책에서 니체는 바그너를 비판하고 대신 오페라 '카르멘'과 그 작곡가 조르주 비제를 예찬한다.[6] Friedrich Nietzsche, KSB, Band 6, 333-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