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 |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 프리드리히 니체 |
장르 | 철학 |
언어 | 독일어 |
발매일 | 1873년 ~ 18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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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시대적 고찰』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발표한 네 편의 글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1873년에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1874년에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와 3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1876년에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를 썼다.2. 내용
2.1.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니체는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독일 문화도 그에 걸맞게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군사적 승리가 문화적 승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1] 전쟁 이후 독일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행복과 품위 그리고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사회는 더욱 격식을 차려 엄숙하게 말하고, 독일 민족에게 고하기를 좋아하고, 고전 양식에 맞춰 전집을 간행하고, 또한 스스로를 독일의 모범적 저술가라고 선언하기도 한다.[2] 이들은 이러한 '독일식 교양'이 성공했다고 칭송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많이 안다는 것, 무언가를 많이 배웠다는 것, 더 엄격한 훈련 및 더 냉정한 복종이라는 도덕적 자질은 교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것은 문화의 필수적 수단도 아니고 징표도 아니다.[3]문화는 무엇보다 어떤 민족의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이다. 미술관, 음악회, 극장 및 박물관의 사교 모임에서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형식들, 색채들, 생산물과 진기한 물품 등 '가능한 모든 양식의 무질서한 뒤죽박죽'을 품위있게 감상하는 이 "현대성 그 자체"는, 문화가 아니라 단지 문화와 대립하는 야만에 불과하다.[4] 이른바 '교양의 속물들'은 모든 가능한 양식의 그로테스크한 나열을 많이 아는 것, 이에 대한 온통 동일한 욕구와 유사한 견해, 교양 있는 사람의 똑같은 암묵적인 동질성,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즉시 터져 나오는 전체 합주를 문화라고 망상한다.[5] [6] 그러나 지배권을 장악한 체계적 속물 문화는 바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직 문화가 아니다.[7] 문화의 활력은 '하나의 양식으로 조화를 이루려 하는 다양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모두를 똑같게 만드는 체계의 엄격한 강제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8]
'똑같아지려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신에게 말해주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증오한다. 즉 그는 힘 있고 창조하는 모든 사람, 회의하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 피로에 지친 모든 사람,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 이 모든 싱싱한 새싹의 '탐구'하는 정신을 증오한다.[9] 그렇기에 그들은 유명한 고전 작가들을 내세워서 콘서트홀이나 극장에서 돈만 내면 얻을 수 있는 감동을 주거나, 또 입상을 세우고 이름을 따서 제전 또는 협회의 명칭을 붙이는 식으로 귄위를 높여서, 더 이상 이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고 창조적인 것을 탐구하지 않아도 되도록 여론을 형성한다.[10]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속물의 모습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자가 바로 다비드 슈트라우스[11]다.
2.2.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동물은 과거의 기억을 곧잘 잊어버리지만, 인간은 항상 과거에 매달려 있다. 과거의 기억은 어두운 짐으로 그를 짓누른다. 그래서 인간은 권태도 없이, 고통도 없이,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며, 꾸밀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매 순간 진정 있는 모습 그대로인 '동물'처럼 '비역사적'으로 살고 싶다. 다른게 아니라 우리가 아이였을 때 그렇게 살았었다. 하지만 아이는 곧 커감에 따라 과거를 상기시키는 그 말, 스스로를 부정하고 소모하고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그 말 ㅡ "그랬다"는 말을 배우게 된다.[12]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13]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안개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그는 자신을 맹목적이라고 느끼고, 그 맹목성의 위험을 경고해도 그저 귀를 막은 것처럼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자각할 뿐이다.[14] 그 속에서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행동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다면,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역사가 이런 비역사적 분위기에서 발생한다.[15]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은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역량에 달려 있다. 각각의 인간이나 민족은 자기 목표나 힘, 고난에 따라 과거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과거를 살아 있게 만들고 그것으로 미래와 현재에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는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하느냐를 구분짓는 하나의 분명한 선이 필요하다.[16] 그리고 그 선의 한계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달라진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조형력이 작은 사람은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나 불의로도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지만, 조형력이 큰 사람은 자신이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알아 가장 거칠고 끔직한 삶의 재난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17]
즉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하고 만다.[18] 간단히 말해서, '역사의 과잉'은 살아 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19] 첫째, 학문은 낯선 것과 연관성이 없는 엄청난 양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데, 이 학문에 근거한 현대의 '교양'로 인해 혼동에 빠진 내면은 실제의 진정성과 직접성을 지닌 외면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자신의 감각을 추상적으로 장식하고 위조하기에만 급급해진다.[20] 교양은 단지 우리를 백과사전으로 만들 뿐, 행위의 동기로서 우리를 진정 살아 있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가능한 한 가볍게 받아들이고 다시 재빨리 내던져버리는 습관이 생기고, 그로 인해 '인격'이 약해진다.[21] 둘째, 역사가들은 '객관성'을 내세우면서 마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에 대해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일인양 망상에 빠지지만, 자신의 주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순수한 객관성이란 있을 수 없다.[22] 셋째,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주변에 어떤 분위기, 비밀스러운 안개 층이 필요한데, 역사적 검산이 폭력적으로 그 환상을 없애버린다면, 창조하려는 본능은 무력해지고 용기를 잃게 된다. 예컨대 역사적 지식으로 변해버린 예술과 종교, 모든 민족과 모든 인간은 그 길의 끝에서 파괴될 것이다.[23] [24] 넷째, 역사적 교양에 의해 인류는 뒤돌아보기, 대략 훑어보기, 마무리하기, 과거의 기억에서 위안을 찾기, 간략히 말해 우리는 늙었다는 믿음,[25] 그리고 우리는 아류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러운 생각을 본능적으로 가지게 된다.[26] 다섯째, 삶이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미래를 결정짓게 놔두면 젊은이들의 정직성과 대담성은 회의로 병들게 되고, 냉소주의에 빠진 개인은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대신 계산과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27]
이러한 '역사적인 것의 과잉'에 대처할 수 있는 해독약 중 하나가 앞서 말한 비역사적인 것이다. '비역사적인 것'이란 잊을 수 있고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을 말한다. '비역사적인 것'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역사적인 것'의 과잉을 제한하고 역사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28] 그리고 이렇게 사용하는 한에서, 역사는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진정한 봉사가 되며,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29]
첫째, 시대의 체념에 대항하여 행동하고 추구하기 위해서 '기념비적' 역사가 필요하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순간들 중 최고의 것이 내게는 아직 생생하고 밝고 위대하다는 것, 과거에 있었던 위대한 것이 어쨌든 한번 가능했으며, 그래서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는 자신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30] 그러나 과거에 가능했던 것이 두 번째에도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차이점들이 간과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는 변화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되어 자유로운 창작에 가까워지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31] 또한 기념비적인 것의 권위를 무력한 자와 활동하지 않는 자가 쥐게 되면, 도리어 그 권위로 새로운 기념비적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데 악용되기도 한다.[32]
둘째, 자신의 실존에 대한 해명을 얻고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충성과 사랑으로 과거를 보존하고 존경하는 '골동품적' 역사가 필요하다. 그는 경건함으로 자신의 현존재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이 생겨난 조건을 자기 뒤에 올 이들을 위해 보존하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작은 것, 제한된 것, 진부한 것과 낡은 것은 고유한 품위와 불가침성이라는 영혼을 획득한다. 이 영혼은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곳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느끼게 하고 과거에 대해 존경의 감정을 가지게끔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옛 것에 대한 존경의 감정은 심지어 자신의 거칠고 궁색한 상태를 잊게 하고 더 나아가 만족하게 할 정도의 감동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33] 물론 골동품적 감각은 과거의 가치를 과장하며, 삶을 보존할 뿐 생산할 줄 몰라서 종종 생성하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까닭에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위험이 항상 가까이 있으므로, 현재의 신선한 삶이 그것에 혼을 불어넣지 않고 감동을 주지 않는 순간, 이제 경건함은 고갈되고 단지 고물 수집벽과 만물 수집벽으로 타락하게 된다.[34]
셋째, 인간은 살기 위해 때에 따라 고통스런 과거를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비판적' 방식이 필요하다. 모든 과거는 유죄 판결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의 일이란 항상 그 안에 인간적 폭력과 약점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살 수 있기 위해서, 삶은 어떤 사물의 존재가, 즉 어떤 특권이나 어떤 계급, 어떤 왕조의 존재가 얼마나 부당한지, 이런 것이 얼마나 당연히 몰락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 다음 그것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사람들은 그 뿌리에 과감하게 칼을 댄다.[35] 그러나 새로운 습관, 새로운 본능, 제2의 천성을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동시에 언제나 삶에게도 위험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과거의 결과인 탓에,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과거를 파괴한다는 것은 항상 그 자신을 허약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러나 가끔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고, 삶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심지어 이상한 위안도 있다. 다시 말해 저 첫 번째 천성도 언젠가 두 번째 천성이었고, 저 승리하는 두 번째 천성도 언젠가 첫 번째 천성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는 위안이 그것이다.[36]
'역사적인 것의 과잉'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은 초역사적인 것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적'인 것의 밑바탕에 있는 '비역사적'인 것의 맹목성과 부당성에 역겨움을 느꼈고, 또한 하나의 강력한 정신 ㅡ 소멸되지 않는 하나의 영원하고 동일한 예술적ㆍ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므로, 역사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37] [38]
마지막으로 니체는 하나의 비유를 든다.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따라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다시 자신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 이는 우리 각자를 위한 비유다. 이로써 내면도 외면도 없고 가식도 관습도 없는 개선된 새로운 자연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 삶과 사유와 외관과 의욕의 일치로서의 문화 개념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 진실성이 때때로 지금 존경받는 교양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도 있고, 장식 문화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39]
2.3.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우리 시대의 여론과 교양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은 여론과 교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사실, 자신이 단 한 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이상한 우연도 그토록 기이하게 다채로운 갖가지를 뒤흔들어 섞어 그 같은 하나의 존재를 두 번씩이나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으로 있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편안하기 때문이요,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즉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정직성과 솔직함을 강요할지 모를 이 부담을 무서워한다.[40]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이제까지 나의 영혼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무엇이 나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지를, 이 일련의 소중한 대상들을 서로 비교했을 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어떻게 보완하고 확장하고 능가하고 미화하는지를, 어느 것이 이제까지 나 자신에게로 기어올라갔던 사다리의 제일 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나의 진정한 본질은 내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사다리의 훨씬 더 높은 곳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이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41]
니체에 따르면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쇼펜하우어와 몽테뉴가 그런 진정한 교육자다.[42] 그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자기 자신과 말을 한다. 여기에는 모방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있다.[43] 게다가 그는 정말 기분을 즐겁게 만들고 생기를 북돋아주는 명랑함이 있다. 그는 불만이 잔뜩 밴 몸짓, 떨리는 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아니라 확실하고 단순하게, 용기와 힘을 가지고, 기사처럼 강하게, 어쨌든 승리자로 행동한다.[44] 그의 힘은 자신의 축으로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 자유롭고 거침없는 자연 존재로서, 불안과 초조에 떨지도 않고 흔들림도 없이 위로 솟아오른다.[45]
하지만 그 같은 정신이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46]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와 정직성인데, 그런 천성의 사람은 가식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하여 화산처럼 폭발적이고 위협적이게 되고, 그로 인해 고독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고독으로 그는 쉽게 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47] 또한 그는 삶의 그림을 하나의 전체로서 해석하기에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 시대의 학자들처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계산적으로 삶의 단편만을 분석하는 데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48] 마지막으로 그는 동경과 재능이 균형잡혀 있기 때문에 동경에 파괴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경직된 문화를 만들지도 않았다.[49] 이 세 위험으로부터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방어했고, 건강하고 꼿꼿하게 그 투쟁에서 벗어났다. 물론 투쟁으로 얻은 흉터도 많고 상처도 생생하며, 종종 너무 신랄하고 호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런 불완전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면이 우리를 그와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거부감이 드는 천재의 위엄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 고통의 동지를 보기 때문이다.[50]
근대가 정립한 세 가지 인간상이 있다. 루소적 인간은 분노하며 대중에 영향을 끼친다. 그는 가장 귀하고 가장 희귀한 것을 영혼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위로 불러낼 줄 알지만 폭주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다. 괴테적 인간은 저 위험한 분노를 진정시키는 소수이다. 그는 높은 품격의 명상가이지만, 자연의 야성을 드러낼 필요가, 즉 화낼 필요가 있는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그의 약점이다. 쇼펜하우어적 인간은 화낼 줄도 알고 냉정해질 줄도 안다. 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진실성의 고통'을 스스로 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존 문화의 가식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 악마(메피스토펠레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실성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케 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사실 그는 삶을 좀더 높은 다른 법칙으로 깊이 긍정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51]
우리의 교육자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진실된 인간이어야 한다. 동물의 맹목성과 부당성(비역사적인 것)에서 벗어나 마음을 국가에, 돈벌이에, 사교나 학문에 두는 것(역사적인 것)이 불안과 초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자 ㅡ 즉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초역사적인 것)이 우리의 교육자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52] 이들은 자연의 자기 인식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그 감동을, 그 고양된 상태를, ㅡ 굳이 말하자면 사물의 심판자로서, 가치의 측정자로서 스스로를 완전하고 무한하다고 느끼는 명료한 내적 확신을 ㅡ 증명해주는 모범이기 때문이다.[53] 그러나 국가의 현재 교육 제도는 이들이 나타날 수 있는 자유의 전제 조건 자체를 지배하고 억압한다.[54]
2.4.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니체에 의하면, 하나의 사건이 위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건을 일으킨 행위자의 감각과 그 사건의 위대함을 포착할 수 있는 수용자의 감각이 일치해야 한다. 지금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는 위대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고, 바그너 주변에는 그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비록 여론과 교양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바그너가 처음부터 위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 그는 쉽게 감각에 빠져 들었고 피상적인 것에 만족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나서부터 그의 본성은 '권력 의지'와 '정절'이라는 두 개의 충동으로 무서울 정도로 단순화되었다.바그너는 연극의 혁신자, 예술의 위치를 발견해낸 자, 과거의 인생관을 시적으로 설명해낸 자, 철학자, 역사가, 미학자이자 비평가, 언어의 거장, 신화학자이자 시인 ㅡ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의 지식을 모으고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개별화되어 있고 연약해진, 버려져 있는 것을 모두 묶어 서로 연결해서 합성해내고는 동시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즉 세계를 단순하게 조형해냈다. 그는 '음악과 삶의 관계'를 발견해냄으로써 이와 같은 것을 실행해냈는데, 첫째, 그것은 병든 '언어'를 음악으로 치유하는 것이었고, 둘째, 그러한 음악을 '체조'라는 시각적인 영역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가상이 현실보다 더욱 진실한 것으로 보이는 바그너의 비극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삶에 부과된 긴장에 해방되는 듯한 묘한 기분 속에서 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심지어 그의 비극을 보다 보면 가상과 현실이 교차되면서 가상이 익숙해지고 현실이 도리어 무시무시하게 보일 때가 생기는데, 여기서 사랑을 발견해내고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이, 바로 그의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는 젊었을 때 권력과 명예를 갈망했었고 중간 단계에 '사회의 혁명가'이자 '시를 짓는 민중'으로서의 예술(신화와 음악)을 추구했었다. 하지만 그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이 시대에 더 이상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는 대신 더욱 비인격적으로 변화한 채 사물의 본질 속에 놓여 있는 고뇌를 응시했고, 이전 상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예술적 창작 상태로 전환했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을 통해서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이야기할 뿐, 더 이상 관객이나 민중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단 한 가지, 음악으로 철학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
바그너의 예술은 이성적이지 않다. 극의 등장인물들은 어쩌면 악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이나 악에 있어서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말한다. 즉 스토아주의와 위선보다는 열정이 훨씬 낫다는 것, 인습의 윤리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악한 일에서조차 정직한 것이 훨씬 낫다는 것, 자유로운 인간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자연의 수치이며 천상의 위로나 지상의 위로를 얻지 못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에 의하여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자유는 기적의 선물로 안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의 명제 말이다. 이것이 아무리 날카롭고 섬뜩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미래의 예술은 진실로 이것을 필요로 하고 이것으로부터 진실된 만족을 기대할 것이다. 이것이 그만의 고유한 믿음, 그의 고뇌, 그의 탁월함인 것이다. 그를 찬양하든 비난하든 간에 그는 그런 동시대인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바그너의 예술에서 '민중'이라는 저 상징을 발견해낸다고 할지라도, 민중에게 바그너가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를 우리는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즉 그는 그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던 미래의 예언자가 아니라, 과거를 해석하고 변용하는 자인 것이다.
3. 니체 사상의 핵심 단초들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는 후기까지 이어지는 여러 핵심 개념의 초기 단초들이 있어 니체 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핵심 텍스트로 여겨진다.3.1. 진리의 기원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또 저 에워싸는 안개구름 안에서 밝은 섬광이 발생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반시대적 고찰』[55]
『반시대적 고찰』[55]
역사적 인간은 현존재의 의미가 어떤 과정이 경과하면서 점점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믿으며, 바로 그 때문에 이제까지의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더 강력하게 열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뒤를 되돌아본다. 그들은 모든 역사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신들이 비역사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그들의 역사 연구도 순수한 인식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봉사한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반시대적 고찰』[56]
니체는 '역사적인 것'의 밑바탕에 '비역사적인 것(맹목성ㆍ부당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즐거운 학문』, 『선악의 저편』 등에서 '진리의 기원은 비진리(오류)'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반시대적 고찰』[56]
3.2. 힘에의 의지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직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반시대적 고찰』[57]
여기서 말하는 '조형력'은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의 의지를 설명하면서 나오는 '정신의 근본의지'와 매우 비슷하다.『반시대적 고찰』[57]
아마 내가 바로 위에서 '정신의 근본의지'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대중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저 명령적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주인으로서 느끼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다양성으로부터 단일성에 이르려는 의지, 즉 결합하고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며 실제로 지배하는 의지를 갖는다. 그것의 욕구와 능력은 생리학자들이 살아 있고 성장하며 번식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욕구와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오래된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일화하고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강력한 경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낯선 것이나 '외부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의 특정한 윤곽이나 특징을 자의적으로 강조하고 자신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새로운 사물들을 기존의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즉 성장하는 데 있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성장한다는 느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데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충동도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한 충동이란 무지와 고의적인 자기 폐쇄를 향한 갑작스런 결단, 자신의 창문을 닫아버리는 것, 이런저런 사물들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 인식될 수 있는 많은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방어 태세에 들어가는 것,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만족하는 것,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들 모두의 필요성은 정신의 동화력,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의 '소화력'의 정도에 비례한다. 실로 '정신'은 위장과 가장 많이 유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때때로 자신을 기만하려는 정신의 의지도 정신의 근본의지에 속한다. 이러저러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라고 멋대로 추측하는 것,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을 좋아하는 것, 일부러 은밀하고 좁은 구석에 머무르면서 근시안적이고 피상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확대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재배치하고 미화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면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 이렇게 자신의 힘을 모든 방식으로 자의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도 정신의 근본의지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정신들을 속이고 다른 정신들 앞에서 자신을 위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세와 창조하고 형성하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지속적인 압력과 충동도 정신의 근본의지에 속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은 자신의 가면을 다양하게 바꾸는 능력과 교활함을 즐기며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느낌을 즐긴다.
『선악의 저편』[58]
『선악의 저편』[58]
3.3. 영원회귀
피타고라스 학파의 믿음이 정당할 경우에만, 근본적으로 과거에 가능했던 것이 두 번째로 가능해진다. 이 학파는 천체가 동일한 위치에 있을 경우 지상에서도 동일한 것이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시 반복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별들이 서로 일정한 위치에 있을 경우 언제나 스토아 학파의 한 사람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한 사람과 결탁하여 로마 황제를 암살하며, 다른 위치에 있을 경우에 언제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다. 지구가 자신의 연극을 5막이 끝난 후 항상 다시 시작한다면, 주제의 동일한 매듭짓기, 동일한 기계장치 신, 동일한 파국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 된다면, 오로지 그럴 때만, 힘있는 자는 기념비적 역사를 완전한 구상적인 진실성으로, 다시 말해 모든 사실을 그 정확한 모양 그대로의 고유성과 유일성으로 갈망해도 될 것이다. 아마 천문학자가 점성술사가 되기 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기념비적 역사는 저 완전한 진실성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다른 것을 유사하게 만들고, 일반화하고 끝없이 동일시할 것이며, 원인을 희생시켜 결과를 기념비적으로, 다시 말해 전범으로 그리고 모방할 만한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 주제와 동기의 차이점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기념비적 역사는 가능한 한 원인을 간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느 시대에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조금 덜 과장해서 "효과 그 자체"의 집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명절이나, 종교나 전쟁 기념일에 경축하는 것은 바로 그런 "효과 자체"다. 바로 이것이 야심가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기업가의 마음에 부적처럼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진정한 역사적 결합이 아니다. 이 결합이 완벽하게 인식된다면, 그것은 미래와 우연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결코 동일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역사서술의 정신이, 강한 자가 그로부터 끌어내는 커다란 동기에 있는 한, 과거가 모방할 만한 것,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두번째에도 역시 가능한 것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한, 과거는 변화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창작에 가까워지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반시대적 고찰』[59]
기념비적 역사를 이용하기 위해선 피타고라스 학파가 말하듯 '동일한 것이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시 반복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영원회귀'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반시대적 고찰』[59]
3.4.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무력한 자와 활동하지 않는자가 그것을 소유해서 이용한다면, 이 역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종종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예를 한번 들어보자. 전혀 예술적이지 않거나 예술가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념비적 예술사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어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은 이제 누구를 향해 무기를 겨누겠는가! 그들의 철천지원수, 강한 예술 정신의 소유자, 다시 말해 저 역사로부터 진실로, 즉 삶을 위해 배울 수 있고 배운 것을 고차원적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향해 겨눌 것이다. 어느 위대한 과거의 기념비를 반쯤 이해하고는 "보라 이것이 진실한 예술이야, 그것이 너희 생성하는 자, 소망하는 자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 주변을 우상을 섬기듯 열심히 돌고 춤추는 사람들에게 길은 막히고 공기는 암울해진다. 이 춤추는 무리들은 심지어 "좋은 취향"의 특권까지 누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자는 구경만 하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항상 불리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엉터리 정치 이론가가 통치하는 정치인보다 더 현명하고 더 공정하고 더 사려 깊었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예술 분야에 국민 투표와 다수결 관습을 적용하고 예술가를 심미적인 무위도식자의 법정 앞에 억지로 세워 자기 변론을 시킨다면, 맹세코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이 기념비적 예술, 다시 말해 기존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시대에나 "효과를 발휘했던" 예술의 규약을 장엄하게 선포했음에도, 아니 선포했기 때문에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이 재판관들에게는 현대적이라서 아직 기념비적이지 않은 모든 예술은, 첫째 욕구가, 둘째 순수한 소질이, 셋째 역사의 권위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본능은 예술이 예술에 의해 타도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기념비적인 것은 다시 생겨나서는 안 되는데, 이 일에 유용한 것이 바로 기념비적인 것의 권위를 과거로부터 빌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예술 자체를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예술 애호가들이며, 의사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독살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혀와 취미를 단련시켜, 영양가 많은 예술 음식 중에서 자신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까다로운 식성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위대한 것의 탄생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봐라, 위대한 것은 이미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 존재하는 이 위대한 것은 앞으로 생겨날 위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중요치 않다. 그들의 삶이 바로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기념비적 역사는 그들이 그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증오를 지난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감탄으로 포장하는 가면무도회 의상이다. 이 의상을 입고 그들은 저 역사적 고찰의 진정한 의미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그들이 이를 분명하게 알든 모르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표어가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인 것처럼 행동한다.
『반시대적 고찰』[60]
예술가적 정신에 있어서의 약자가 권력을 쥐게 되면 기념비적 역사를 악용하여 예술가적 정신의 강자를 억압한다는 내용인데, 이는 『도덕의 계보』에서 나오는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과 유사하다.『반시대적 고찰』[60]
3.4.1. 강자(귀족 도덕)
진실로 정의에 대한 충동과 힘을 소유한 사람보다 우리의 존경을 더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의 안에서는 모든 방향에서 흘러오는 조류를 받아들여 삼켜버리는 심해처럼 가장 희귀한 지고의 미덕들이 서로 합쳐지고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저울을 들어도 재판의 권한을 가진 정의로운 자의 손은 떨리지 않는다. 그는 가차 없이 자기 자신에게 추를 쌓아 올리며, 저울의 접시가 올라가고 내려와도 눈은 흐려지지 않고, 선고를 선포할 때에도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들리지도 않고 낙담한 듯이 들리지도 않는다. 그가 차가운 인식의 마귀라면, 그는 주변에 초인적으로 무서운 위엄의 냉혹한 분위기를 퍼트릴 것이다. 우리는 이 분위기를 존경하지는 않아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이며 경솔한 회의에서 엄격한 확신으로, 너그러운 온화함으로부터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명법으로, 용기라는 드문 미덕으로부터 가장 희귀한 정의라는 미덕으로 날아오르려 한다는 것은, 그리고 처음에는 불쌍한 인간에 불과했지만 이제 저 마귀와 비슷해진다는 것, 그리고 특히 매 순간 자신의 인간 존재를 속죄해야 하고 이 불가능한 미덕에 비극적으로 병들어간다는 것 ㅡ 이 모든 것이 인간 종의 가장 존경할 만한 표본으로 그를 고독한 정상 위에 높이 세운다. 그는 진리를 원하지만, 결과 없는 차가운 인식으로서의 진리뿐만 아니라 정리하고 처벌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진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개인의 이기적 소유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이기적 소유물의 모든 경계석을 밀쳐버리는 성스러운 권능으로서의 진리를 원하며, 한마디로 말해 개별적 사냥꾼이 재빨리 잡은 노획물과 쾌감으로서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서의 진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반시대적 고찰』[61]
니체는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법을 만드는 자'를 귀족(강자), '도덕을 따르는 자'를 노예(약자)라고 부르는데, 『반시대적 고찰』에서도 유사하게, '(자신의) 정의로 (자신의 삶과 역사를) 심판할 줄 아는 재판관'과 '객관적 역사 인식이야말로 정의로운 것이라고 망상하는 교양인'을 대립시킨다.『반시대적 고찰』[61]
3.5. 위버멘쉬
"초역사적"이라는 말로 나는 시선을 생성으로부터 현존재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즉 예술과 종교로 돌릴 수 있는 권력이라고 이른다.
『반시대적 고찰』[62]
『반시대적 고찰』[62]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초역사적 인간은 과정 속에서 구원을 보지 않으며, 그에게 세상은 매 순간 완성되며 종말에 도달한다. 과거의 10년이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을 앞으로의 10년이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가르침의 의미가 행복인지 체념인지 또는 미덕이지, 아니면 참회인지에 대해서 초역사적 인간들은 한번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과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모든 방식에 대항하여 그들은 만장일치로 다음의 명제에 도달한다.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은 동일하다. 즉 그것은 다양하지만 유형적으로 동일하며, 소멸되지 않는 유형의 편재로서 불변의 가치와 영원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 정지된 형상이다. 수백의 다른 언어들이 유형적으로 동일한 인간의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이 욕구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언어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듯이, 초역사적 사상가는 민족과 개인의 모든 역사를 그 내부로부터 밝혀내며, 혜안으로 다양한 상형 문자의 원초적 의미를 알아내지만 항상 새롭게 밀려오는 상형 문자에 점점 지쳐서 피하려고 한다. 사건의 끝없는 범람 속에서 어떻게 그가 포만, 과포화, 구토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시대적 고찰』[63]
니체 말하는 '초역사적(Überhistorisch)'인 것은 철학, 예술, 종교 등의 변치않는 이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함으로써 자신 안의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안다.[64] 『반시대적 고찰』 3부에서 니체는 '초역사적'인 사람을 우리가 추구해야 모범으로 삼는데, 이를 위버멘쉬(Übermensch )와 비교해봤을 때, 둘은 단어의 외형(접두사 Über-)과 내용적 측면(추구해야 할 모범)에서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강자'와 '초역사적'인 것은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65])『반시대적 고찰』[63]
다만, 이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부터 니체는 철학, 예술, 종교에서의 '영원성'과 '동일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영원성'과 '동일성'의 해악도 '역사적인 것'의 해악만큼이나 해로운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을 더이상 추구해야 할 모범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는 대신 철학, 예술, 종교가 오류에 불과한 것임을 알면서도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그 사람의 '기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66]
3.6. 내면화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이 돌멩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 이 덜커덩 소리를 통해 현대인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외면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이 현대인의 특성인데, 고대의 민족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아마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형식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들어보지 못한 부적당한 대립이다. 우리의 현대 교양은 이런 대립 없이는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교양은 진정한 교양이 아니라 교양에 대한 일종의 지식이고, 교양-사상으로, 교양-감정으로 머물러 있으며, 거기서 교양-결단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실제의 동기이며 행위로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종종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관습, 빈약한 모방 또는 거친 어릿광대짓으로 여겨진다. 내면에는 뱀과 같은 느낌이 자리 잡고 있다. 즉 토끼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다음 조용히 햇볕에 누워 가장 필요한 동작 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뱀의 느낌 말이다.
『반시대적 고찰』[67]
『도덕의 계보』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설명하면서 잔인한 본능의 내면화 과정을 말하는데,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외면과 내면의 불일치를 말하고 있어서, 이 두 책에서 말하는 '내면성'이 완전히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도 '내면성'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반시대적 고찰』[67]
3.7. 기독교 비판
특히 최근의 신학은 너무나 순진해서 역사와 관계를 맺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볼테르식의 때려 부수는 일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신학의 뒤에 힘찬 새로운 건설-본능이 있다고 추측하지 않는다. 새로운 본능이 있다면, 소위 신교도-연합을 새로운 종교의 모태로, 또 법률가 홀첸도르프를 요르단 강가의 세례 요한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동안은 늙은 머릿속에서 아직 연기를 내뿜고 있는 헤겔식의 철학은 "기독교의 이념"을 그 다양하고 불완전한 "현상 양식들"과 구분하고, 점점 더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다가 결국 현재의 자유 신학자들의 머릿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투명한, 그래서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념의 애호"라고 변명함으로써 순진성의 보급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장 순수한 기독교 종파가 과거의 순수하지 못한 기독교 종파들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태와 무관한 청중은 아마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ㅡ 이제 우리는 무엇에 관해 생각해야만 하는가? "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기독교를 "모든 실제의 종교와 몇 개의 가능한 종교들 속으로 들어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종교라고 말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 그리고 "진정한 교회"는 "어떤 윤곽도 없는 곳에서, 모든 부분들이 여기에 있다가 저기에 있으며 모든 것이 평화롭게 서로 섞이는 곳에서 흐르는 듯한 집단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ㅡ 다시 한번, 우리는 무엇에 관해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기독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다루어진 영향으로 둔감하고 부자연스럽게 되었으며, 그래서 결국 완벽하게 역사적인, 즉 공정한 취급은 그것을 기독교에 관한 순수한 지식으로 해체하며 그로써 그것을 파괴한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서 연구할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것이 철저하게 해부되고 고통스럽게 병에 걸려 산다면, 우리가 그것으로 역사적인 해부 연습을 한다면, 그것은 살기를 멈춘다.
『반시대적 고찰』[68]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의 기독교 비판 핵심은 '객관적 역사로 바라본 종교는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후기 사상에서 '도덕으로 바라본 종교는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게 된다'는 명제로 살짝 바뀐다.『반시대적 고찰』[68]
3.8. 국가 비판
우리는 원자의 시대에, 원자적 혼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중세에는 교회가 적대적인 힘들을 어느 정도 통합하고 있었고, 이 힘들은 교회가 행사하는 강한 압력으로 인해 서로 동화되기도 했다. 그 끈이 찢어지고 압력이 약해지자, 하나는 다른 것에 대항하여 일어선다. 종교 개혁은 많은 것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로, 종교적 사상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선포했다. 바로 이것이 종교 개혁이 살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훨씬 더 종교적이던 고대가 반대했던 기독교가 역시 생존을 위해 비슷한 대가를 지불했던 것처럼. 종교 개혁 때부터 분리는 점점 더 확대된다. 이제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것은 가장 거칠고 악한 힘들에 의해, 즉 영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군사적 폭력 지배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폭력 지배자들의 손에 놓인 국가는 영리주의자들의 이기주의처럼 자기 힘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저 모든 적대적 힘들을 하나로 묶고 압력을 행사라고자 한다. 다시 말해 국가가 바라는 바는, 사람들이 교회에 그렇게 했듯이 자신을 우상처럼 숭배해주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69]
'이기주의'와 '국가'는 선뜻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지만, 니체는 재밌게도 자신의 여러 책에서 원자론적 개인의 이기주의를 국가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반시대적 고찰』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70]『반시대적 고찰』[69]
[1] 최근 프랑스와 치른 전쟁이 남긴 모든 나쁜 결과들 중에서 아마 가장 나쁜 것은 널리 확산된 일반적 오류일 것이다. 그것은 독일 문화도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처럼 특별한 사건과 성과에 어울리는 화환으로 독일 문화를 장식해야 한다는 여론과 그러한 여론에 맞춰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오류다. 이 망상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망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ㅡ 왜냐하면 아주 유익하고 다행스러운 오류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ㅡ 이 오류는 우리의 승리를 완전한 패배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승리가 "독일 제국"을 위한 독일 정신의 패배, 아니 근절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83)[2] 전쟁 이후 이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행복과 품위 그리고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사회는 "독일 문화의 성과"에 따라 보증과 인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는 더욱 격식을 차려 엄숙하게 말하고, 독일 민족에게 고하기를 좋아하고, 고전 양식에 맞춰 전집을 간행하고, 또한 실제로 자신에게 예속된 신문에 자기 사람 몇몇을 새로운 독일 작가이자 모범적 저술가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아마 독일의 교양 있는 사람들 중 보다 사려 깊고 학식 있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성과의 오용이 초래하는 위험들을 인식하거나, 혹은 적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연극이 보기 민망하다고 느낄 것이라고 기대해야 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86)[3] 만약 우리가 독일적 교양으로부터 이 독일적 학식을 분리하고자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독일적 교양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더 엄격한 훈련 및 더 냉정한 복종이라는 도덕적 자질들은 교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예를 들자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양이 있던 그리스 군대와 상대했던 마케도니아 군대의 특징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누가 독일의 교양과 문화의 승리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가 혼동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 혼동은 독일에서 문화의 순수한 개념이 상실되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문화는 무엇보다 어떤 민족의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이다. 많이 안다는 것과 많이 배웠다는 것은 문화의 필수적 수단도 아니고 징표도 아니며,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화와 대립하는 야만, 즉 무양식성 혹은 모든 양식의 무질서한 뒤죽박죽과 잘 조화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87)[4] 문화는 무엇보다 어떤 민족의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이다. 많이 안다는 것과 많이 배웠다는 것은 문화의 필수적 수단도 아니고 징표도 아니며,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화와 대립하는 야만, 즉 무양식성 혹은 모든 양식의 무질서한 뒤죽박죽과 잘 조화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87)[5] 나는 이런 권력, 이런 종의 인간들을 다음과 같이 명명하려 한다 ㅡ 그들은 교양의 속물들이다. 속물이란 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학생 생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아주 통속적인 넓은 의미에서 예술을 관장하는 신 뮤즈의 아들, 예술가, 진정한 문화인의 반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교양의 속물은 ㅡ 그 유형을 연구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경청하는 일이 지금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되었다 ㅡ 하나의 미신을 통해 "속물"이라는 종의 일반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다. 즉 그는 스스로가 뮤즈의 아들이고 문화인이라는 망상에 빠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90)[6] 사교 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예의 범절과 몸가짐의 근본을 자각할 것이며, 미술관에 드러가고 음악회, 극장 및 박물관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그는 모든 가능한 양식의 그로테스크한 나열과 겹침을 자각할 것이다. 독일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형식들, 색채들, 생산물과 진기한 물품 등을 자신의 주위에 쌓아 올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저 현대적인 세시의 다채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독일 학자들은 이 다채로움을 "현대성 그 자체"로 고찰하고 서술해야만 한다. 독일인 자신은 이러한 모든 양식들의 혼란 속에서 마냥 태연한 채로 머물러 있다. 문화에 대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무감각 상태에 불과한 이런 종류의 "문화"를 가지고는 어떤 적도 굴복시킬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88)[7] 그는 주위에 온통 동일한 욕구와 유사한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가 어디로 가든, 종교와 예술을 비롯하여 많은 사물에 관한 암묵적인 협정의 끈이 금방 그를 둘러싼다. 이 인상적인 동질성,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즉시 터져 나오는 전체 합주는 여기에 하나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믿도록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지배권을 장악한 체계적 속물 문화는 바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직 문화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91)[8] 그런데 만약 진정한 문화가 반드시 양식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또 추하고 변질된 문화조차 하나의 양식으로 조화를 이루려 하는 다양성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면, 교양의 속물이 가진 망상에서 나타나는 혼동은 아마 그가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과 똑같은 특징을 재발견하고 모든 "교양 있는 사람"의 똑같은 특징에서 독일적 교양의 양식 통일성, 즉 문화를 추론하는 데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90~191)[9] 그는 자신을 속물로 취급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신에게 말해주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증오한다. 즉 그는 힘 있고 창조하는 모든 사람의 장애, 회의하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의 미궁, 피로에 지친 모든 사람의 수렁,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족쇄, 싱싱한 모든 새싹을 해치는 안개, 탐구하며 신생을 갈망하는 독일 정신을 말려 죽이는 사막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92)[10] 이에 반하여 그들에게 "고전 작가"라는 숙고할 필요가 있는 이름을 붙이고 이따금 그들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 일, 그것은 콘서트홀이나 극장이 돈을 내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는 그 시원찮은 이기적 감동에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또 입상을 세우거나 그들의 이름을 따서 제전 또는 협회의 명칭을 붙이는 것 ㅡ 이 모든 것은 그들을 더 이상 이해하지 않고, 특히 그들의 뒤를 쫓아 계속 탐구하지 않아도 되도록 교양의 속물이 그들과 씨름하며 지불하는 대가의 여운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속물들의 슬로건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193~194)[11]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Strauß, 1808~1874)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1836년에 펴낸 《예수의 인생》에서 그는 복음서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헤겔 학파를 좌ㆍ우파로 분열시켰고 슈트라우스는 좌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슈트라우스가 말년에 지은 《옛 신앙과 새로운 신앙》이다.[12] 풀을 뜯어먹으며 네 옆을 지나가는 가축 떼를 한번 보라. 그들은 어제가 무언지, 오늘이 무언지 모르고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먹고 쉬고 소화하고 다시 뛴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자신들의 호불호에, 다시 말해 순간의 말뚝에 묶여 있으며, 그래서 우울함도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 이를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인간임을 동물 앞에서 자랑하면서도, 동물의 행복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ㅡ 그는 동물처럼 권태도 없이, 고통도 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의 바람은 헛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너는 왜 너의 행복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고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가? 동물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야 ㅡ 그러나 동물은 이 대답 역시 곧 잊어버렸고 침묵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망각을 배우지 못하고 항상 과거에 매달려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멀리,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슬은 함께 따라다닌다. 어느 순간 여기 있다가 휙 지나가버리는 순간, 그 이전에도 무였고 그 이후에도 무인 순간은 유령처럼 다시 오고, 나중에 어느 순간의 휴식을 훼방한다. 시간의 두루마리에서 한 장씩 끊임없이 풀려서 떨어져 나와 훨훨 날아간다 ㅡ 그리고 갑자기 다시 훨훨 날아든다. 인간의 품속으로. 그런 다음 인간은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면서, 곧 잊어버리고 매 순간이 정말 죽어서 안개와 밤 속으로 가라앉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보는 동물을 부러워한다. 이렇게 동물은 비역사적으로 산다. 기이한 분수를 남기는 어떤 수처럼 동물은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며, 꾸밀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매 순간 진정 있는 모습 그대로다. 다시 말해 동물은 정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과거의 커다란 하중, 점점 더 커지는 하중에 저항한다. 이 과거의 하중은 그를 짓누르거나 옆으로 휘게 만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짐으로 그의 앞길을 힘들게 한다. 그는 이 짐을 겉으로는 부인할 수 있고 자기 또래들과 교제하면서, 이들의 부러움을 사려고 곧잘 부인하기도 한다. 그래서 풀을 뜯는 가축을 보거나 가까운 주변에서 과거를 부인할 필요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울타리 사이에서 행복한 맹목성 속에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는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놀이도 방해를 받고야 만다. 너무 일찍 아이는 망각으로부터 불려 나온다. 그리고 아이는 "그랬다"라는 말을, 투쟁, 고통, 권태와 함께 인간에게 다가와 그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ㅡ 결코 완성되지 않는 미완료 과거임을 상기시켜주는 저 암호를 배운다. 죽음이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망각을 가져다주지만, 죽음은 동시에 현재와 현존재를 앗아가며, 그로써 현존재는 단지 끊임없이 있었던 것, 스스로를 부정하고 소모하고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저 인식에 날인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0~291)[13]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2)[14]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또 저 에워싸는 안개구름 안에서 밝은 섬광이 발생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5)[15] 여자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의 세계는 그에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자신의 맹목적이라 느끼고, 옆의 낯선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는 그저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가 지각한다 해도, 마치 모든 감각으로 동시에 포착하듯이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지각하지는 못하며, 화려한 색채를 느끼지도 못하고, 미세한 음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지각하지는 못한다. 모든 가치 평가는 변했고, 가치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느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이제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문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낯선 말과 낯선 의견을 지닌 바보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지치지 않고 하나의 원을 돌지만 너무 약하고 너무 피곤해 이 원 밖으로 한 걸음도 뛰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상태이며, 과거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배은망덕하며, 위험에 대해 맹목적이고 경고에 귀를 막는 것이며, 밤과 망각의 죽은 바다에서 생동하는 작은 소용돌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ㅡ 철저하게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이지만 ㅡ 부당한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행위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고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위자는,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양심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우헤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그렇게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최고의 행위는 그처럼 사랑의 충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행위의 가치가 다른 면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5~296)[16]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4)[17]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직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3~294)[18]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2~293)[19] 삶이 역사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증명하게 될 명제, ㅡ '역사의 과잉은 살아 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라는 명제만큼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1)[20]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이 돌멩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 이 덜커덩 소리를 통해 현대인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외면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이 현대인의 특성인데, 고대의 민족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아마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형식 결여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들어보지 못한 부적당한 대립이다. 우리의 현대 교양은 이런 대립 없이는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교양은 진정한 교양이 아니라 교양에 대한 일종의 지식이고, 교양-사상으로, 교양-감정으로 머물러 있으며, 거기서 교양-결단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실제의 동기이며 행위로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종종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관습, 빈약한 모방 또는 거친 어릿광대짓으로 여겨진다. 내면에는 뱀과 같은 느낌이 자리 잡고 있다. 즉 토끼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다음 조용히 햇볕에 누워 가장 필요한 동작 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뱀의 느낌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8)[21] 그렇게 현대 교양 전체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다. 그래서 제본업자는 책 표면에다 이렇게 인쇄했던 것이다. 외면적인 야만인을 위한 내면적 교양 안내서. 내면과 외면의 이런 대립은 외면적인 것을, 야만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거친 욕구에 따라 성장했을 때보다 더 야만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것을 제압할 만한 어떤 방법이 천성에 남아 있겠는가? 있다면 단 하나의 방법, 가능한 한 가볍게 받아들여 다시 재빨리 제거하고 내던져버리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실제 사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약한 인격"이 생겨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9~320)[22]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해석한다 해도 거기에는 어떤 환상이 함께 작용하지 않는가? 역사가가 어떤 사건의 동기와 결과를 너무나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주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될 때, 이 역사가의 상태를 우리는 객관성이라고 이해한다. 그 말로 우리는 저 심미적인 현상, 즉 화가가 번개와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풍경 속에서 또는 일렁이는 바다에서 자기 내면의 이미지를 관조하면서 개인적인 관심에서 해방되는 그런 현상을 생각한다. 즉 객관성이란 사물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물이 그런 기분의 사람들 내면에서 드러내는 이미지가 사물의 경험적 존재를 재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아니면 그런 순간에 사물은 스스로 활동하여 순수한 수동태 위에 자신을 복사하고 모사하고 영상을 남기는 것인가? 이것은 신화이고, 게다가 나쁜 신화다. 더욱이 우리는 저 순간이 한 예술가의 내면에서 가장 힘에 넘치고 자기 활동적인 생산의 순간이며 최고 종류의 구상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이 순간의 결과는 역사적으로 진실한 그림이 아니라 아마 예술적으로 진실한 그림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극작가의 은밀한 작업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연결하여 사유하고, 낱개를 전체로 엮는 것 말이다. 여기서 항상 전제되는 것은 계획이 어떤 사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획의 통일성을 사물 안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과거의 거미줄을 짜고 과거를 제어하며, 그렇게 그의 예술 충동이 ㅡ 그의 진리 충동이나 정의 충동이 아니라 ㅡ 표출된다. 객관성과 정의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37~338)[23] 역사적 감각이 억제되지 않은 채 지배하면서 모든 책임을 진다면, 그것은 미래의 뿌리를 제거할 것이다. 그것은 환상을 파괴하고 기존의 사물들이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분위기를 그것들에게서 빼앗기 때문이다. 역사적 정의가 정말 순수하게 심정적으로만 행해진다 해도, 그것은 항상 살아 있는 것을 파괴하고 몰락시키기 때문에, 무서운 미덕이다. 역사적 정의의 심판은 항상 파괴다. 역사적 충동 뒤에 건설의 충동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희망 속에 살아 숨쉬는 미래가 해방된 토대 위에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없도록 파괴되고 청산된다면, 정의가 혼자서 지배한다면, 창조하는 본능은 무력해지고 용기를 잃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순수한 정의의 지배 하에서 역사적 지식으로 변해야만 하는 종교, 철저히 학문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종교는 그 길의 끝에 가서는 파괴될 것이다. 역사적 검산에서 잘못된 것, 거친 것, 비인간적인 것, 어리석은 것, 폭력적인 것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경건한 환상의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 속에서만, 사랑의 환상에 둘러싸여서 창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완벽하고 정당한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만 창조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사랑하지는 말라고 강요당한 사람은 자기 힘의 뿌리를 잘린 것이다. 그는 말라버릴 것이다. 즉 그는 부정직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역사에 예술이 대립한다. 역사가 예술 작품으로의 변형을, 즉 순수한 예술적 형상이 되는 것을 견딘다면, 그것은 아마 본능을 유지하거나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역사 서술은 우리 시대의 분석적이고 비예술적인 특성과 모순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 시대는 그것을 날조된 허위라고 느낄 것이다. 내면적인 건설 충동의 인도를 받지 않고 파괴하기만 하는 역사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도구들을 둔감하게 만들고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런 인간들은 환상을 파괴하고, "자기 내면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환상을 파괴하는 자에게 자연이 엄격한 독재자로 벌을 내릴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44~345)[24]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주변에 어떤 분위기, 비밀스러운 안개 층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베일을 걷어버리면, 또 우리가 어떤 종교나 예술, 천재가 분위기 없는 천체로서 공전하라는 판결을 내리면, 그것이 급작스럽게 말라버리고 딱딱해지고 불모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스 작스가 〈마이스터징거〉에서 말하듯이, "망상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모든 위대한 사물의 경우는 그렇다. 그러나 성숙해지고자 하는 모든 민족, 모든 인간은 그렇게 에워싸는 망상, 보호하고 감추는 구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성숙해지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삶보다 역사를 더 존경하니까. 그렇다, 이제 우리는 "학문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하다. 이를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지배당한 삶은 가치가 별로 없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런 삶은, 지식이 아니라 본능과 강력한 망상이 지배했던 과거의 삶보다 훨씬 적은 삶이고, 미래에도 훨씬 적은 삶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완성되고 성숙해지고 조화를 이룬 인격의 시대가 아니라 가능한 한 유용한 공동 노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인간은 시대의 목적에 맞게 길들여짐으로써, 가능한 한 제때에 노동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성숙하기 전에, 아니 오히려 성숙하지 않도록 보편적인 공리의 공장에서 일해야만 한다 ㅡ 왜냐하면 성숙은 "노동 시장"에서 상당량의 힘을 빼앗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47~348)[25] 역사적 교양은 정말 일종의 선천적 백발이며, 어릴 적부터 이 표식을 몸에 달고 있는 자는 아마 인류의 노년에 대한 본능적 믿음에 도달할 것이다. 노년에는 이제 노인과 같은 일, 즉 뒤돌아보기, 대략 훑어보기, 마루리하기, 기억을 통해 과거에 존재했던 것에서 위안을 찾기, 간략히 말해 역사적 교양이 주어진다. 그러나 인류는 질기고 고집 센 물건이며 수천 년 뒤에, 수십만 년 뒤에도 자신의 발걸음이 ㅡ 앞으로나 뒤로나 ㅡ 고찰되기를 원치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로서의 인류는 한 없이 작은 원자의 점들인 개인들에 의해 고찰되기를 전혀 원치 않는다. 그 시간이 시작할 때 인류의 "청년"을 말하다가 마지막에는 벌써 "인류의 노년"을 말할 수 있으니 이삼천 년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시들어가는 인류에 대한 이런 마비시키는 믿음 속에는 오히려 중세로부터 상속받은 기독교 신학적인 관념, 임박한 세계 종말,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심판에 대한 사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53~354)[26] 피렌체 사람들이 사보나롤라의 참회하라는 설교에 영향을 받아 그림, 문서와 거울, 가면을 희생의 제물로 불태웠던 그런 일을, 기독교는 모든 문화에, 즉 계속 노력하라고 권유하고 "삶을 기억하라"를 표어로 삼는 모든 문화에 행하고 싶어 한다. 이를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즉 우세한 힘으로 행할 수 없을 경우, 기독교는 역사적 교양과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맹을 맺고, 역사적 교양이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생성하는 모든 것을 어깨를 움츠리며 거부하고, 생성하는 것은 너무 늦게 온 아류, 즉 태생이 백발이라는 감정을 확산시키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일어난 모든 것은 무가치하며 세상은 심판을 받을 만큼 무르익었다는 가혹하고도 너무나 진지한 고찰은, 더 좋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라는 회의적 의식으로 희석되었다. 이렇게 역사적 감각은 자신의 시종을 수동적이고 회고적으로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55)[27] 사람들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 과잉을 이용하여, 어디서나 추구하는 이기주의의 장년적 성숙에 이들을 길들이려 하고 또 장년적-비장년적 이기주의를 미화하거나, 즉 학문적으로 마술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적의를 분쇄하려 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역사의 우세를 통해 역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ㅇ느 그것을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불, 오기와 자기 망각, 사랑이라는 젊은이들의 강한 본능의 뿌리를 제거하고, 그들의 정의감의 열기를 가라앉히며, 서서히 성숙하려는 욕망을 빨리 끝내고 빨리 쓸모 있고 생산적이 되려는 반대 욕망으로 억압하거나 퇴치하려 하며, 감각의 정직성과 대담성을 회의로 병들게 한다. 그렇다. 역사는 젊은이의 가장 아름다운 특권, 믿음으로 위대한 사상을 자신 속에 심고 더 위대한 사상이 자신에게서 자라나게 하는 그들의 힘을 속여서 빼앗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과잉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때 사용하는 역사의 방법은 지평-관점을 끊임없이 이동하고 주변을 덮고 있는 분위기를 제거함으로써 비역사적으로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평의 무한성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즉 가장 작은 이기적인 영역으로 후퇴하고 그 안에서 말라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아마 그는 영리해지지만 결코 지혜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는 말귀를 빨리 알아듣고 계산하고 사실적인 것과 타협하며, 흥분하지 않고 눈짓을 보내고 자신이나 자기편의 이익을 남의 이익과 불이익 속에서 찾을 방법을 안다. 그는 쓸데없는 수치심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점진적으로 하르트만식의 "장년"과 "노인"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76)[28] 역사적인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약은 ㅡ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이다. 이 이름들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고찰이 시작되던 평안의 시점으로 돌아가자. "비역사적인 것"이란 잊을 수 있고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을 말한다. "초역사적"이라는 말로 나는 시선을 생성으로부터 현존재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즉 예술과 종교로 돌릴 수 있는 권력이라고 이른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84)[29]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한, 그것은 비역사적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종속 관계에서는 수학처럼 그렇게 순수한 학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삶이 역사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한 인간과 한 민족, 한 문화의 건강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들과 근심거리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나칠 경우 삶은 붕괴되고 타락하며, 삶의 타락으로 인해 역사 자체도 타락한다. 그러나 삶이 역사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증명하게 될 명제, ㅡ '역사의 과잉은 살아 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라는 명제만큼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는 살아 있는 것에 속한다. 역사는 행동하고 추구하는 자로서,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로서, 고통 받고 해방을 요구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것에 속한다. 이런 세 가지 관계는 세 가지 역사의 종류와 일치한다. 구별이 허용된다면,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골동품적 방식, 비판적 방식을 구별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1)[30] 그것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것의 상관성과 연속성에 대한 믿음이며, 세대 교체와 무상함에 대한 저항이다. 과거에 대한 기념비적 고찰, 지나간 시대의 고전적인 것과 희귀한 것을 다루는 일이 어떻게 현대적인 것에 이익이 되는가? 그로부터 현대적인 것은 과거에 있었던 위대한 것이 어쨌든 한번 가능했으며, 그래서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낸다. 현대적인 것은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가 마음이 약해졌을 때 그를 사로잡았떤 의구심, 자신이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이제 격퇴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4)[31] 기념비적 역사는 가능한 한 원인을 간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느 시대에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조금 덜 과장해서 "효과 그 자체"의 집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명절이나, 종교나 전쟁 기념일에 경축하는 것은 바로 그런 "효과 자체"다. 바로 이것이 야심가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기업가의 마음에 부적처럼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진정한 역사적 결합이 아니다. 이 결합이 완벽하게 인식된다면, 그것은 미래와 우연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결코 동일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역사서술의 정신이, 강한 자가 그로부터 끌어내는 커다란 동기에 있는 한, 과거가 모방할 만한 것,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두번째에도 역시 가능한 것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한, 과거는 변화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창작에 가까워지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5~306)[32] 그런데 무력한 자와 활동하지 않는 자가 그것을 소유해서 이용한다면, 이 역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종종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예를 한번 들어보자. 전혀 예술적이지 않거나 예술가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념비적 예술사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어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은 이제 누구를 향해 무기를 겨누겠는가! 그들의 철천지원수, 강한 예술 정신의 소유자, 다시 말해 저 역사로부터 진실로, 즉 삶을 위해 배울 수 있고 배운 것을 고차원적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향해 겨눌 것이다. 어느 위대한 과거의 기념비를 반쯤 이해하고는 "보라 이것이 진실한 예술이야, 그것이 너희 생성하는 자, 소망하는 자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 주변을 우상을 섬기듯 열심히 돌고 춤추는 사람들에게 길은 막히고 공기는 암울해진다. 이 춤추는 무리들은 심지어 "좋은 취향"의 특권까지 누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자는 구경만 하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항상 불리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엉터리 정치 이론가가 통치하는 정치인보다 더 현명하고 더 공정하고 더 사려 깊었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예술 분야에 국민 투표와 다수결 관습을 적용하고 예술가를 심미적인 무위도식자의 법정 앞에 억지로 세워 자기 변론을 시킨다면, 맹세코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이 기념비적 예술, 다시 말해 기존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시대에나 "효과를 발휘했던" 예술의 규약을 장엄하게 선포했음에도, 아니 선포했기 때문에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이 재판관들에게는 현대적이라서 아직 기념비적이지 않은 모든 예술은, 첫째 욕구가, 둘째 순수한 소질이, 셋째 역사의 권위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본능은 예술이 예술에 의해 타도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기념비적인 것은 다시 생겨나서는 안 되는데, 이 일에 유용한 것이 바로 기념비적인 것의 권위를 과거로부터 빌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예술 자체를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예술 애호가들이며, 의사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독살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혀와 취미를 단련시켜, 영양가 많은 예술 음식 중에서 자신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까다로운 식성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위대한 것의 탄생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봐라, 위대한 것은 이미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 존재하는 이 위대한 것은 앞으로 생겨날 위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중요치 않다. 그들의 삶이 바로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기념비적 역사는 그들이 그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증오를 지난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감탄으로 포장하는 가면무도회 의상이다. 이 의상을 입고 그들은 저 역사적 고찰의 진정한 의미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그들이 이를 분명하게 알든 모르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자신드르이 표어가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인 것처럼 행동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7~308)[33] 두 번째로 역사는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곳을 뒤돌아보는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에 속한다. 이런 경건함으로 그는 자신의 현존재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는 예로부터 있어온 것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돌보면서 자신이 생겨난 조건을 자기 뒤에 올 이들을 위해 보존하려 한다 ㅡ 그런 식으로 그는 삶에 봉사한다. 이런 영혼에게서 선조의 가구를 소유한다는 개념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 가구가 오히려 영혼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 제한된 것, 진부한 것과 낡은 것은, 골동품적 인간의 보존하고 존경하는 영혼이 이 사물들 안으로 옮겨 가서 그 안에 보금자리를 꾸미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품위와 불가침성을 획득한다. 그가 자란 도시의 역사는 그에게 그 자신의 역사가 된다. 그는 성벽과 성문, 평의회 법령, 축제를 소년 시절의 그림 일기처럼 생각하고 이 모든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힘과 자신의 근면과 자신의 욕망, 자신의 판단과 어리석음과 장난기를 다시 발견한다. 여기서 살았다, 여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앞으로도 살 것이다. 우리는 끈질기고 하룻밤 사이에 꺾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라고 그는 혼잣말을 한다. 그렇게 그는 이 "우리"로써 무상하고 기이한 개별적 삶 너머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가족의 정신으로, 일족의 정신으로, 도시의 정신으로 느낀다. 그는 때때로 저 멀리 어둡고 혼란스러웠떤 세기들을 넘어 자기 민족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으로 생각하고 인사한다. 통찰하여 느끼고 추론으로 알아내는 것, 거의 지워진 흔적의 냄새를 맡고 그렇게 덧씌워진 과거를 본능적으로 바르게 읽어내는 것, 두 번 쓰인 양피지, 아니 여러 번 쓰인 양피지라도 재빨리 이해하는 것 ㅡ 그것은 그의 재능이고 미덕이다. 이런 미덕을 가지고 괴테는 에르빈 폰 스타인바흐의 기념비 앞에 섰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 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역사적 구름의 베일이 찢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독일의 작품이, "강하고 거친 독일의 영혼으로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런 의미와 특성이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들을 인도했고 그들의 시인들에게 고대 이탈리아의 천재성을 다시 일깨웠으며, 그렇게 하여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말했듯이 "태고의 현악기를 멋지게 재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은 역사적-골동품적인 존경의 감정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나 한 민족이 사는 소박하고 거칠고 궁색하기까지 한 상태를 넘어 단순하고 감동적인 즐거움과 만족감을 퍼트린다. 예를 들면 니부어가 솔직하게 고백했듯이 역사를 가진 자유로운 농민들은 늪지와 황무지에서도 즐겁게 살고 예술이 업삳고 한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혜택을 덜 받은 일족이나 주민들을 그들의 고향과 고향의 관습에 연결시키고 정착시키며, 좀더 좋은 것을 찾아 이국을 헤매지 못하게 하고 더 좋은 것을 놓고 서로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역사가 삶에 더 잘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개개인을 이 무리와 환경에, 이 힘든 습관에, 이 벌거벗은 산마루에 마치 나사로 고정시키듯 묶는 것이 때때로 고집과 몰상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ㅡ 그러나 그것은 가장 유익한, 전체를 장려하는 몰상식이다. 전체 민족의 이동에서 모험을 찾아서 이주에 나선 결과가 무섭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사람 또는 자시느이 먼 과거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쉴 새 없이 전 세계의 시민이 되어 항상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찾는 일에 그것을 희생시켰던 민족을 가까이 보았던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감정, 나무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느끼는 쾌감, 자신이 완전히 자의적이고우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속인으로서 꽃과 과실로서 과거로부터 성장하여 그로써 자신의 실존에 대한 해명을 얻고 정당성을 얻는 행복감 ㅡ 이런 것이 우리가 이제 즐겨 진정한 역사적 의미라 부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9~311)[34] 골동품적 역사는 현재의 신선한 삶이 그것에 혼을 불어넣지 않고 감동을 주지 않는 그 순간 퇴화해버린다. 이제 경건함은 고갈되고, 학자적 습관은 경건함 없이 존속하며 이기적으로 자족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을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과거에 한번 존재했던 것을 맹복적으로 수집하고 쉴 새 없이 긁어모으는 역겨운 연극을 구경할 것이다. 곰팡내가 인간을 감쌀 것이다. 이 냄새는 좀더 중요한 재능과 고상한 욕망조차 골동품적 방식으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좀더 정확하게는 고물 수집벽과 만물 수집벽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종종 인간은 너무나 깊이 추락해서 결국 어떤 먹이에도 만족하게 되며 참고 문헌 잡동사니에 쌓인 먼지조차 기꺼이 삼켜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타락하지는 않더라도, 또 골동품적 역사가 자신을 유일한 삶의 구원으로 만드는 뿌리인 토대를 잃지 않더라도, 항상 위험은 도처에 도사린다. 다시 말해 골동품적 역사가 너무 강력해져서 과거를 고찰하는 다른 방식들을 가려버릴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면 말이다. 골동품적 역사는 삶을 보존할 뿐 생산할 줄 모른다. 그래서 골동품적 역사는 생성하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왜냐하면 ㅡ 기념비적 역사가 가진 그런 본능, 즉 생성하는 것을 어떤 것인지 탐지해내는 본능이 골동품적 역사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힘찬 결단을 방해하며, 행위자로서 항상 경건함을 손상하거나 손상할 수밖에 없는 행위자를 마비시킨다. 어떤 것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그것은 불멸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런 골동품들이 ㅡ 선조의 옛 관습, 종교적 믿음, 상속받은 정치적 특권 ㅡ 존재하는 동안 어떤 것들을 경험했는지, 개인과 세대가 보내야 하는 경건함과 존경의 총계가 얼마인지 계산한다면, 그런 골동품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거나 경건함과 존경의 숫자 더미에 생성 중에 있는 현재의 것 한 자릿수를 대비하는 것은 잘못 계산한 것처럼 또는 파렴치한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2~314)[35]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에게는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와 함께 과거를 고찰하는 세 번째 방식, 즉 비판적 방식이 필요하며, 그것도 삶에 대한 봉사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과거를 파괴하거나 해체할 힘을 가져야만 하고 때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과거를 법정에 세우고 고통스럽게 심문하고 마침내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 모든 과거는 유죄 판결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ㅡ 인간의 일이란 항상 그렇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항상 그 안에는 인간적 폭력과 약점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정에 앉아 있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여기서 평결을 내리는 것이 은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삶, 저 어둡고 몰아대며 지칠 줄 모르고 스스로를 갈망하는 권력이다. 그의 선고는, 인식의 순수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무자비하고 항상 부당하다. 그러나 설령 정의가 선고된다 해도, 대개의 경우 같은 선고가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생겨나는 모든 것은 소멸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살 수 있기 위해서, 어느 정도 살 것인가와 어느 정도 부당할 것인가는 같다는 점을 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루터도 세상은 오로지 신의 건망증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신이 '중화기'에 관해 생각했다면, 그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망각이 필요한 바로 그 삶이 때때로 이 망각의 파괴를 요구한다. 그렇게 되면 삶은 어떤 삶은 어떤 사물의 존재가, 즉 어떤 특권이나 어떤 계급, 어떤 왕조의 존재가 얼마나 부당한지, 이런 것이 얼마나 당연히 몰락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 다음 그것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사람들은 그 뿌리에 칼을 대며, 잔인하게 모든 경건함을 짓밟고 넘어간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4~315)[36] 이것은 언제나 위험한, 즉 삶에게도 위험한 과정이다. 과거를 재판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삶에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시대들은 항상 위험한 그리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과 시대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과거 종족의 결과인 탓에 또한 그들의 과실, 열정과 오류, 심지어 범죄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연쇄 고리로부터 풀려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과실에 유죄를 선고하고 거기서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우리가 그것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적 천성과 우리의 인식이 서로 충돌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에전부터 교육받은 것이나 타고난 것을 좀더 엄격하게 훈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새로운 습관, 새로운 본능, 제2의 천성을 심어서 이 첫 천성이 시들어 죽게 만들 수 있다. 이는 나중에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과거와 반대로 그로부터 자신이 유래하고 싶은 과거를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ㅡ 과거의 부정에 한계를 설정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또 두 번째 천성은 첫 번째 천성보다 항상 허약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위험한 시도다.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직접 행할 수는 없어도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을 인식은 해도 실제 행하지는 않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러나 가끔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고, 삶을 위해 비판적 역사를 이용하는 사람들,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심지어 이상한 위안도 있다. 다시 말해 저 첫 번째 천성도 언젠가 두 번째 천성이었고, 저 승리하는 두 번재 천성도 첫 번째 천성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는 위안이 그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5~316)[37]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초역사적 인간은 과정 속에서 구원을 보지 않으며, 그에게 세상은 매 순간 완성되며 종말에 도달한다. 과거의 10년이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을 앞으로의 10년이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가르침의 의미가 행복인지 체념인지 또는 미덕이지, 아니면 참회인지에 대해서 초역사적 인간들은 한번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과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모든 방식에 대항하여 그들은 만장일치로 다음의 명제에 도달한다.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은 동일하다. 즉 그것은 다양하지만 유형적으로 동일하며, 소멸되지 않는 유형의 편재로서 불변의 가치와 영원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 정지된 형상이다. 수백의 다른 언어들이 유형적으로 동일한 인간의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이 욕구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언어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듯이, 초역사적 사상가는 민족과 개인의 모든 역사를 그 내부로부터 밝혀내며, 혜안으로 다양한 상형 문자의 원초적 의미를 알아내지만 항상 새롭게 밀려오는 상형 문자에 점점 지쳐서 피하려고 한다. 사건의 끝없는 범람 속에서 어떻게 그가 포만, 과포화, 구토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7~299)[38] "초역사적"이라는 말로 나는 시선을 생성으로부터 현존재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즉 예술과 종교로 돌릴 수 있는 권력이라고 이른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84)[39]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 이는 우리 각자를 위한 비유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함으로써 자신 안의 카오스를 조직해야 한다. 그의 정직, 그의 근면하고 진실한 성격은 언젠가 한번은 단지 따라 말하고 따라 배우며 모방하는 것에 반기를 들 것이다. 그는 문화가 삶의 장식, 즉 근본적으로 항상 가장하고 은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장식은 장식된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화의 그리스적 개념이 ㅡ 로마의 개념과는 반대로 ㅡ 베일을 벗고 그에게 드러난다. 즉 내면도 외면도 없고 가식도 관습도 없는 개선된 새로운 자연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 삶과 사유와 외관과 의욕의 일치로서의 문화 개념이 그에게 드러난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인이 다른 모든 문화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한 것은 윤리적 자연의 보다 높은 힘이었으며, 진실성의 증대는 항상 진정한 교양을 장려하고 준비한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다. 이 진실성이 때때로 지금 존경받는 교양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도 있고, 장식 문화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87~388)[40] 세상 사람들은 모두 풍속과 의견 뒤에 숨는다. 자신이 단 한 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이상한 우연도 두 번씩이나 그토록 기이하게 다채로운 갖가지를 뒤흔들어 섞어 그 같은 하나의 존재로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나쁜 마음인 것처럼 그걸 숨긴다. 왜? 이웃이 무서워서, 인습을 요구하고, 온통 인습에 휩싸여 있는 이웃이 무서워서. 이웃을 무서워하라고,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자히 말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중 몇 명의 특이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편암함이요, 타성이며, 요컨대 여행자가 말했던 게으른 습성이다. 그는 옳았다. 인간은 겁도 많지만 그보다 더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정직성과 솔직함을 강요할지 모를 부담을 가장 무서워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91)[41]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어두운,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다. 토끼의 껍질이 일곱이라면, 인간은 일흔 번 곱하기 일곱 번씩이나 껍질을 벗겨야 하며, 그래도 "그게 정말 너야, 이제 껍질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파헤쳐서, 가장 가까운 질로 무리하게 자기 본질의 수직 갱도로 내려가는 것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을 만큼 심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의 친구와 적, 우리의 시선과 악수, 우리의 기억과 망각한 것, 우리의 책과 필적,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본질에 관해 증언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심문 작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젊은 영혼은 삶을 돌아보고 이렇게 묻는다.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고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 이 일련의 소중한 대상들을 상상 속에 떠올려보라. 그러면 아마 그것들은, 그 본질과 그 결과를 통해 하나의 법칙, 즉 네 진정한 자아의 근본 법칙을 너에게 알려줄 것이다. 이 대상들을 서로 비교해보라. 하나가 다른 것을 어떻게 보완하고 확장하고 능가하고 미화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 대상들이 네가 이제까지 너 자신에게로 기어 올라갔던 사다리가 되었는지를 보라. 왜냐하면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보다 훨씬 높이, 적어도 네가 보통 너의 자아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진정한 교육자와 형성자는 네 본질의 진정한 근본 의미와 근본 소재가 무엇인지, 교육할 수 없고 조형할 수 없는 것, 어쨌든 접근하기도 구속하기도 또 위축시키기도 힘든 것이 무엇인지 네게 말해줄 것이다. 너의 교육자는 너를 해방시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모든 교양의 비밀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94~395)[42] 정직함이 중요하고 더욱이 미덕에 속한다는 것은 여론의 시대에는 금지된 사적 의견이다. 따라서 내가 쇼펜하우어가 정직하며, 작가로서도 정직하다고 거듭 말한다면, 그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다. 정직한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글을 쓰는 인간들을 모두 불신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정직이라는 문제에서 쇼펜하우어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정직한 작가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바로 몽테뉴다. 그런 사람이 글을 썼다는 사실로 인해 이 지상에 사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03~404)[43] 쇼펜하우어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세상에 기만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적어도 '아무도 속이지 마라, 너 자신도 속이지 마라'를 자신의 법칙으로 만든 철학자임에야! (중략) 여기에는 모방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02)[44] 정직함 외에 쇼펜하우어와 몽테뉴의 공통점이 또 있다. 그것은 정말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명랑함이다.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자신에게는 지혜를. 그것은 명랑함에도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그가 진심을 말하든 농담을 하든, 또는 인간적 통찰을 표현하든, 신적인 관용을 표현하든, 항상 흥겹게 하고 생기를 북돋아준다. 불만이 잔뜩 밴 몸짓, 떨리는 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아니라 확실하고 단순하게, 용기와 힘을 가지고, 기사처럼 강하게, 어쨌든 승리자로 행동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04)[45] 나는 단지 쇼펜하우어에게서 받았던 생리학적 첫 인상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처음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어떤 자연 식물이 가진 가장 내밀한 힘이 다른 식물에게로 마술같이 방사되는 그런 것 말이다. 그 인상을 나중에 분해해보면, 그것이 세 요소가 섞여 이루어졌음을 나는 알게 된다. 즉 그가 정직하고 명랑하고 변함없다는 인상이 그에 대한 첫인상을 구성한다. 그는 자신에게 자신을 위해 말하고 쓰기 때문에 정직하며, 가장 힘든 일을 사유를 통해 이겨내기 때문에 명랑하며, 그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 그의 힘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불꽃처럼 똑바로 가볍게 위로 솟아오른다. 불안과 초조에 떨지도 않고 흔들림도 없이 위로 솟아오른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길을 발견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길을 찾고 있었는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그 대신 그는 마치 중력의 법칙에 못 이기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고 신속하고 불가피하게 달려온다.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 존재, 자신의 축으로 움직이는 자유롭고 거침없는 자연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현재의 우리 신화 속 자웅동체인 트라겔라프와 같은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내가 쇼펜하우어를 발견했을 때의 행복과 감탄을 이해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05~406)[46] 그러나 그가 이런 인간적 본보기로 성장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로부터, 또 내면으로부터 엄청안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약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위험에 짓눌려 질식하거나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 쇼펜하우어는 몰락하고 기껏해야 "순수 학문"을 남겨놓은 것처럼 보일 여지도 충분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잘된 경우에 그렇고, 아마 인간도 학문도 남지 않을 개연성이 가장 높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08)[47] 이 고독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ㅡ 자신들은 어디에서든 항상 생각과는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와 정직성인데, 그들 주변에는 오해의 그물망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아무리 강력히 원해도, 그들의 행동 위에 서려 있는 잘못된 견해, 순응, 어정쩡한 용납, 관대한 침묵, 잘못된 해석의 안개를 막을 수 없다. 그로 인해 그의 이마에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모여든다. 그런 천성의 사람들은 허식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죽음보다 미워하기 때문이다. 가식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하기 때문에 그들은 화산처럼 폭발적이고 위협적이 된다. 그들은 때때로 강압적인 자기-은폐, 강요된 자제에 대해 복수한다. 그들은 무서운 표정으로 동굴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폭발하고,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11)[48] 그의 위대함은 그가 삶의 그림을 전체로서 해석하기 위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삶의 그림과 마주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가장 총명한 두뇌를 가진 인물들조차 이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한 물감이나 재료를 꼼꼼히 연구하면 이 해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가 얻는 결과는 아주 촘촘하게 짜인 캔버스고, 그 위의 것은 화학 성분을 알 수 없는 물감일 것이다. 그림을 이해하려면 화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 학계는 그림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 캔버스와 물감을 알려고 혈안이 돼 있다. 삶과 현존재의 보편적인 그림을 확실하게 눈에 새겨둔 사람만이 스스로 다치지 않고 개별적인 학문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만은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조정하는 역할의 전체상이 없다면, 개별 학문은 가도 가도 끝없는, 우리 인생을 더 혼란스럽게, 미로같이 만든느 실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13~414)[49] 학자들이나 소위 교양인들 중에서 그런 동경이 없는 재능을 발견할 경우, 우리는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은 재능을 모두 쏟아 문화의 생성과 천재의 탄생을 ㅡ 모든 문화의 목표인 ㅡ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직된 상태로서, 습관적이고 냉혹하며 또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진 미덕과 가치 면에서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성스러움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리를 고수한다. 쇼펜하우어의 천성은 독특하고 극히 위험한 이중성을 지녔다. 천재가 자신 속에서 요동친다는 것을 그 정도로, 또 그만큼 단호하게 느꼈던 사상가는 많지 않다. 그 안의 수호신은 그에게 최고를 약속했다 ㅡ 근대적 인간성의 대지에 그의 쟁기가 찍어낸 골보다 더 깊은 골은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자기 본질의 절반이 성취되고 충족되어서 더 이상 욕망도 없음을 알았고, 그 힘을 확신했으며, 그래서 그는 승리를 거둔 완성자로서 위대하고 품위 있게 자신의 소명을 수행했다. 그러나 다른 반쪽에는 격렬한 동겨이 살고 있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위대한 창시자 랑세의 상에다 "이것은 은총의 산물이다"라는 말ㅇ르 하며 비통한 눈길을 돌렸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동경을 이해한다. 천재는 자신의 망루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밝게 내려다보며 인식과 존재의 화해 속으로, 평화와 부정된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또 인도인이 말한 피안으로 건너가는 까닭에 성스러움을 깊이 동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기적이 있다. 쇼펜하우어의 천성이 이 동경으로 파괴되지 않고 또 딱딱하게 굳어지지도 않았다면, 그것은 얼마나 완전하며 튼튼한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16)[50] 우리가 방금 서술한 세 위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쇼펜하우어가 완강하게 이 위험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했고, 건강하고 꼿꼿하게 그 투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점점 더 이상하게 생각된다. 물론 투쟁으로 얻은 흉터도 많고 상처도 생생하며, 종종 너무 신랄하고 호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 이 위대한 인간보다 그 자신의 이상은 더 높다. 쇼펜하우어가 모범일 수 있다는 것은 저 흉터와 오점에도 불구하고 확고하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존재에서 불완전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면이 바로 가장 인간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그와 가까워지게 만든느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천재의 거부하는 위엄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 고통의 동지를 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16~417)[51]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28~434의 내용 발췌.[5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38~443의 내용 발췌.[53] 문화에 대해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의 위에서 나보다 더 높고 더 인간적인 것을 본다. 같은 것을 인식하고 같은 것에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가 도와주려는 것처럼 그것에 도달하도록 나를 도와다오. 그렇게 하여 인식에서나 사랑에서, 관조에서나 능력에서 스스로 완전하고 무한하다고 느끼는 사람, 사물의 심판자로서, 가치 측정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자연에 매달리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을 가르치기는 불가능한 탓에 어떤 사람을 이러한 대담한 자기 인식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영혼은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시각, 자신을 분석하고 멸시하는 시선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어딘가 아직 감추어진 더 높은 자아를 온 힘을 다하여 탐색하려는 저 욕망을 얻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대한 인간에게 집착하는 사람만이 문화의 첫 축성을 영접한다. 축성을 영접했다는 것은 불쾌감이 없는 자기 수치, 편협함과 위축에 대한 증오, 이와 같은 우리의 둔감성과 무미건조함을 박차고 항상 다시 솟아오르는 천재에 대한 동정으로 나타난다. 또 생성하고 있고 투쟁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예감, 곤경에 처한 자연을 곳곳에서 마주하리라는 내적 확신, 즉 자연은 인간에게 달려들고 자연은 작품이 다시 실패했음으로 뼈저리게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멋진 단초와 경향, 형식들이 자연에게 이루어질 것이며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사는 인간들은 조각가가 고안한 귀중한 작품의 파편과 같아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해, 와라, 도와라, 완성하라, 한데 속하는 것을 모아라 하고 외치며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전체가 되기를 동경할 것이라는 확신이 축성을 영접한 기호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47)[54] 니체는 3부 후반부에 '문화를 망치는 외적 요인'에 대해서 꽤 긴 설명을 한다. 문화를 망치는 외적 요인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ㅡ ① 획득하는 자의 이기심 ② 국가의 이기심 ③ 추하거나 지루한 내용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감추려는 사람들 ④ 학문과 학자의 이기심. ㅡ 니체는 이를 종합하여 3부의 마지막에 '국가에 종속된 대학 교육'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55]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5[56]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7[57]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3~294[58]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94~296[59]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5~306[60]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07~308[61]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33~334[6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84[63]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297~299[64]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 이는 우리 각자를 위한 비유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함으로써 자신 안의 카오스를 조직해야 한다. 그의 정직, 그의 근면하고 진실한 성격은 언젠가 한번은 단지 따라 말하고 따라 배우며 모방하는 것에 반기를 들 것이다. 그는 문화가 삶의 장식, 즉 근본적으로 항상 가장하고 은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장식은 장식된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97~388)[65] 강자는 역사적인 것을 말할 때도 쓰이지만, 초역사적인 것은 애초에 역사적인 것을 배제한다.[66] 34. 안정을 위하여 ㅡ 그러나 그렇게 우리의 철학은 비극이 되지는 않을까? 진리는 삶을, 더 좋은 것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질문이 우리의 혀를 괴롭히지만 소리내어 말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 즉 사람이 의식적으로 진리가 아닌 것에 머무를 수 있을까? 또는 그래야만 한다면 죽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당위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 도덕이 당위였던 이상, 그 도덕은 우리의 고찰 양식에 의해 종교처럼 소멸된다. 인식은 동기로서 쾌감, 불쾌감, 이득, 손해를 존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동기는 어떻게 진리에 대한 감각과 화해하는 것일까? 동기 역시 오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애착과 혐오 그리고 이것에 대한 극히 불공평한 측정이 우리의 쾌감과 불쾌감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그러하다.) 인간적인 삶 전체는 진리가 아닌 것에 깊이 잠겨 있다. 개인이 삶을 이 우물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면, 이때 반드시 자신의 과거에 놓인 가장 깊은 심연에서 혐오감을 느끼고, 현재의 자신의 동기가 명예의 동기처럼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 미래와 미래의 행복을 갈망하는 정열에 대해서 조소나 멸시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결국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절망을, 이론적인 결론으로는 파괴의 철학을 이끌고 오는 사고방식만 남게 되지 않을까? ㅡ 인식의 영향에 대한 판정은 개인의 기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묘사한 것과 같은 영향과 마찬가지로 몇몇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영향, 그러나 또다른 영향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영향의 덕택으로 현재의 삶보다 훨씬 단순한 애정으로 정화된 삶이 성립될 것이며, 그 결과 처음에는 좀더 과격한 욕망이라는 낡은 동기가 오랫동안 유존되어온 습관으로 인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겠지만 정화된 인식의 영향으로 점차 약해질 것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으며 자연속에 있는 것처럼, 칭찬도 비난도 흥분도 없이, 지금까지는 공포만 느껴야 했던 많은 것을 연극을 보는 듯 보고 즐기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과장을 탈피하게 될 것이며, '인간은 단지 자연인 것만은 아니다, 또는 자연 이상의 존재다' 라는 사상이 주는 자극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좋은 기질이 필요하다. 그 기질은 확고부동하고 온화하며 근본적으로 쾌활한 영혼이고 교활한 함정과 갑작스런 감정의 폭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것을 표현할 때도 투덜거리는 소리와 화가 나 굳은 표정, 즉 오랫동안 사슬에 묶여 있던 늙은 개와 인간의, 잘 알려진 그 불쾌한 특징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 마음이다. 오히려 좀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을 벗어버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 나아가 거의 모든 것을 질투와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 도덕, 법칙, 사물에 대한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상태의 기쁨을 기꺼이 전할 것이며, 아마도 이것 외에는 전해야 할 것이 없을 것이다. ㅡ 물론 여기에는 결핍, 오히려 체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의 형제, 즉 행위의 자유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조소도 보일 것이다 : 그의 '자유'에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58~59)[67]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18[68]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345~346[69]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27[70] 이런 생각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