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도로스 2세 (영어:Thoros II, 아르메니아어: Թորոս Բ) |
출생 | 미상 |
사망 | 1169년 2월 6일 |
직위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국왕 |
반란 대상 | 마누일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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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반란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마누일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굴복했다.2. 생애
동로마 제국에 속했다가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 레온 1세의 차남이다. 형으로 루벤이 있었다. 레온 1세는 1129년 왕위에 오른 뒤 타르수스, 아다나, 모프수에스티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1136년 후반 안티오키아 공작인 푸아티에의 레몽에게 사로잡혀 아다나와 모프수에스티아, 금괴 6만 개를 바치는 대가로 석방되었다. 이듬해인 1137년 요안니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군 4만 5천 명이 쳐들어왔다. 레온 1세는 타우루스 산악 지대로 숨어들어가 몇달간 항전했지만, 결국 9월에 두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로마 제국의 관할에 들어갔다.레온 1세는 1141년경 감옥에서 사망했고, 형 루벤은 실명된 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하지만 도로스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11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한 뒤 베네치아 소속 선박을 타고 키프로스 섬으로 도망친 뒤, 안티오키아로 이동했다. 이후 사촌인 에데사의 조셀린 2세 백작의 저택으로 피신하여 추종자들을 모은 뒤 피라무스 강 인근에서 은신처를 마련했다. 그는 뒤이어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 타우루스 산맥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산악 거점에 도착하고 병사들을 본격적으로 모았고, 인근의 프랑크 영주 시몬과 동맹을 맺었다.
도로스는 병사를 수천 명 규모까지 늘린 뒤 파르체페르트(현재 튀르키예의 안드린), 바카, 시스(현재 튀르키예의 코잔), 아나자르부스, 아다나, 마미스트라를 잇달아 탈환하였고, 몇년 후 아르메니아의 수도 타르수스를 탈환하였다. 1151년, 마누일 1세는 아르메니아를 재장악하기 위해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1152년, 동로마군은 마미스트라 전투에서 도로스의 아르메니아군에게 결정적인 참패를 당했고, 안드로니코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쓸쓸히 귀환했다.
1153년,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의 술탄 마수드에게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라고 부추겼다. 도로스는 마수드에게 공물을 바쳐서 침공을 막으려 했지만, 마수드는 1154년 침공을 감행했다. 하지만 룸 술탄군이 아나자르부스를 포위하고 있을 때, 안티오키아에 파견된 투르크 약탈부대가 성전 기사단에게 섬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수드는 이에 위협을 느껴 본국으로 철수했다. 1155년 마수드는 재차 침공하여 틸 함둔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룸 술탄국과 아르메니아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마누일 1세는 안티오키아에 사절을 보내 도로스를 상대로 싸우면 새 공작 르노 드 샤티용을 인정해주겠으며, 일이 잘 되면 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르노는 이에 기꺼이 응하고, 알렉산드레타(현재 터키 이스켄데룬)으로 진격했다. 이후의 전투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한 기록에는 안티오키아가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했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르노가 패한 뒤 안티오키아로 철수했고 나중에 도로스가 성전 기사단에게 알렉산드레타 요새를 넘겨줬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이야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전투 후 알렉산드레타 요새가 성전 기사단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르노는 마누일 1세에게 요청대로 했으니 돈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황제는 도로스를 제대로 이기지 못하지 않았냐며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도로스와 손을 잡고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도로스는 킬리키아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동로마 요새를 공격했다. 마누일 1세는 더 놔두었다가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1158년 4~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킬리키아로 쳐들어갔다. 동로마군은 순식간에 킬리키아를 휩쓸었고, 도로스는 산속으로 도주했다. 동로마군은 뒤이어 안티오키아를 침공했고, 르노는 짧은 저항 끝에 황제에게 굴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가 중재해준 덕분에, 도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동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킬리키아에 동로마군이 주둔하는 걸 허용해야 했다. 그런데 몇년 후, 동생 스테판이 도로스가 맺은 서약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동로마 수비대를 공격하다가 타르수스에 주둔하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에우포르베노스 총독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 갔다가 피살되었다. 도로스는 동생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일으켜 마미스트라, 아나자르부스, 바카를 습격해 수비대를 살해했다. 이에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가 중재했고, 양국간 분쟁은 종식되었다. 안드로니코스 에우포르베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가 새 총독으로 부임했다.
1164년, 누르 앗 딘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포위했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는 트리폴리의 레몽 3세, 도로스,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총독에게 구원을 청했다. 구원군이 다가오자, 누르 앗 딘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보에몽이 이들을 추격하려 하자, 도로스는 함부로 쫓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보에몽은 경고를 무시하고 추격했으나 매복에 걸려 대패했다. 반면 도로스는 전력을 유지한 채 아르메니아로 돌아갔다. 그 후 도로스는 킬리키아의 지배권을 점차 굳혔고,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의 침공을 어느 정도 막아냈다. 마누일 1세는 예루살렘 왕국과 연합하여 다미에타 원정을 떠나려 하는 상황에서 아르메니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1168년 알렉산드레타 만의 항구를 영유하는 조건으로 도로스가 아르메니아에서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도로스 역시 동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통치 말기, 동생 말레가 도로스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안티오키아로 망명한 뒤 누르 앗 딘에게 귀순했다. 도로스는 이 일로 실의에 빠졌고, 어린 아들 루벤 2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드라자크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1169년 2월 6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