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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국왕 {{{#fff {{{+1 도르제 보디노비치}}} }}} {{{#fff Ђорђе Бодиновић}}} | |
출생 | 미상 |
사망 | 1131년 |
재위 | 두클랴 국왕 |
1113년 ~ 1118년 | |
두클랴 국왕(복위) | |
1125년 ~ 1131년 | |
아버지 | 콘스탄틴 보딘 |
어머니 | 자퀸타 바리스카 |
형제 | 미하일로 2세 |
가문 |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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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7대 국왕. 동로마 제국의 침략으로 2차례 폐위되었다.2. 생애
두클랴 제2대 국왕 콘스탄틴 보딘과 아풀리아 일대 노르만족 지도자 중 한 명인 바리의 아르카리스의 딸 자퀸타 바리스카의 차남이다. 형으로 미하일로 2세가 있었다. 1099년 아버지 콘스탄틴 보딘이 사망한 뒤 형 미하일로 2세가 두클랴 국왕이 되었지만, 남편 보딘의 친족들을 자기 자식의 승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이거나 해외로 추방한 자퀸타에게 반감을 품은 무리가 얼마 안가 숙부 도브로슬라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켜 미하일로 2세를 타도했다. 그 후 그는 10여 년간 어머니와 함께 잠자코 지냈다.1113년, 자퀸타는 차남 도르제를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두클랴 6대 국왕 블라디미르를 독살했다. 자퀸타는 지난날 장남 미하일로 2세를 폐위한 전력이 있었으며,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 경쟁자인 도브로슬라프 마저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거세하고 실명형에 처한 뒤 슈코더르의 성 페타르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도르제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이에 그루베샤, 드라기냐, 드라길로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디라히온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하던 삼촌 고지슬라프의 집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루베샤는 도중에 체포되어 스칸다르에 감금되었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도르제는 이들과 맞서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고 일부 측근만 데리고 라쉬카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군은 스칸다르에 수감되었던 그루베샤를 풀어준 뒤 두클랴의 왕으로 세웠다. 한편, 도르제의 어머니 자퀸타는 동로마군에 체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1125년, 도르제는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로 진군해 바르 전투에서 그루베샤를 전사시키고 두클랴 국왕에 복위했다. 이후 그루베샤의 두 형제 드라기나, 드라길로와 화해했고, 제타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했다. 그러나 그루베샤의 또다른 형제인 그라디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라쉬카로 피신했다. 얼마 후, 도르제는 우로시 1세가 친척들에 의해 지하 감옥에 보내지자,드라길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복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우로시 1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쉬카로 진군해 우로시 1세를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복위했다. 그라디냐는 자후믈례로 탈출한 뒤 디라히온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도르제는 친척들이 자기를 또다시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배제하고 싶어했다. 그는 전 왕 블라디미르의 아들 미하일로와 드라길로를 체포해 감옥에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드라기나는 세 아들 프로보시, 그루베시, 네마냐와와 함께 디라히온으로 피신했다. 그라디냐는 디라히온으로 피신한 친족들과 함께 힘을 합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두클랴를 침입해 브란지나 및 바르 일대를 공략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 수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면서, 모든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 후 그라디냐가 오블리크 요새에 머물자, 도르제는 요새를 즉시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디라히온의 새 스트라테고스로 부임한 알렉시오스 콘토스테파노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급습하자 크름니카로 피신했다. 이후 알렉시오스는 바르로 귀환하면서 그라디냐와 일부 병력을 오블리크 요새에 남겨줬다. 1131년 코토르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클랴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심해지자, 그라디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공세를 벌였다.
도르제는 오볼론 요새에 숨었고, 그라디냐는 이 요새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했다. 그 후 알렉시오스의 동로마군 마저 가세해 오볼론 요새를 압박하자, 도르제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한 뒤 디라히온 감옥에 이송되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의 지하감옥에서 옥사했다. 이후 그라디냐가 동로마 제국에 의해 두클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