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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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 공방전 영어: Siege of Dover | ||
시기 | 1216년 7월 19일 ~ 10월 14일 1217년 5월 12일 ~ 9월 11일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도버 | |
원인 | 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든 반란군 진영의 루이 왕자 추대 | |
교전국 | 존 왕 지지 세력 | 프랑스 왕국 신성교회군 |
지휘관 | 휴버트 드 버그 | 루이 왕자 |
병력 | 미상 | 수천 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존 왕 세력의 승리. | |
영향 | 램버스 조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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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16년 7월 19일 ~ 10월 14일, 12717년 5월 12일 ~ 9월 11일, 신성교회군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된 루이 왕자의 군대가 도버 성채를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성전.2. 배경
1215년 11월 30일, 존 왕은 한 달여간 이어진 로체스터 공방전 끝에 로체스터 성채를 공략했다. 그 후 존 왕은 런던에 있는 반란군 영주들을 고립시키고 플란데런에 있는 용병의 주요 공급원과 이어지는 보급로를 보호하며, 프랑스군이 남동부에 상륙하는 것을 막은 다음 반란군을 천천히 소모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군대를 분할하여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1개 분견대를 보내 런던 북쪽과 동부 앵글리아를 탈환하도록 했고, 본인은 노팅엄을 거쳐 북쪽으로 향해 북부 남작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두 작전 모두 성공적이었고, 반군 대부분은 런던에서 꼼짝 못 했다. 1216년 1월, 존은 반군과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락산더르 2세의 영지를 공략하고, 10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포위했다.존 왕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세로 궁지에 몰린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싶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왕자는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즉시 이에 응해 함대를 조성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루이가 이대로 건너가서 반란군에게 필요한 군함과 공성 무기를 가져오면 일이 틀어져 버린다고 여기고, 알락산더르 2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1216년 5월, 루이 왕자는 영국해협으로 출항했다. 존 왕은 그를 막기 위해 해군을 항구에 집결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사이, 루이 왕자는 켄트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존 왕은 루이 왕자를 즉시 공격할지 고심하다가,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이 의심되기도 했기에 루이를 즉시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존은 잉글랜드 서부로 방어를 재편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그동안 그를 따랐던 윌리엄 롱게스피를 포함한 추종자 여럿이 반군에 투항해 버렸다. 그 후 루이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반란군은 여름이 끝날 무렵에 잉글랜드 남동부와 북부 일부를 장악했으며, 루이 왕자는 귀족들에 의해 런던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루이 왕자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바로 도버 성채를 조기에 공략하지 않은 것이었다. 도버는 도버 해협이 위치한 곳으로, 고대부터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을 잇는 관문 격으로 인식되었다.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이어지는 보급 물자가 원할하게 공급되려면 도버 성채를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그러나 루이 왕자가 미처 도버 성채를 신경쓰지 않은 사이, 켄트 백작이자 존 왕의 수석 대법원장인 휴버트 드 버그가 기사와 무장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수비대를 편성해 도버의 수비를 강화했다. 얼마 후, 루이 왕자는 아버지 필리프 2세로부터 도버를 공략하지 않는 것을 질책당하자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도버 공략에 착수했다.
3. 경과
1216년 7월 19일, 루이 왕자는 도버 성채를 포위했다. 그는 성 북쪽의 고지에 본부를 세운 뒤, 그곳에서 성채 정문을 향해 공세를 펼쳤다. 공격군은 투석기로 바비칸(barbican: 문 밖에 있는 요새화된 울타리)에 바위를 퍼부은 끝에 성공적으로 점령헀다.. 이후 루이 왕자는 성의 정문에서 공병대와 광부를 동원해 땅굴을 판 끝에 동쪽 탑을 무너뜨렸다. 탑이 무너지면서 돌로 된 가파른 경사로가 생기면서, 공격군이 경사로를 올라가 요새를 습격할 수 있었다. 휴버트의 부하들이 맹렬히 저항했지만, 적군이 압도적인 군세를 앞세워 외벽을 돌파했다.하지만 휴버트는 틈새가 좁아서 한 번에 침투한 적병이 한정적인 것을 이용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공격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이후 휴버트는 나무 들보, 잔해, 흙으로 부서진 성벽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루이 왕자는 이후에도 3개월간 포위전을 이어갔지만,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윌든 궁수대가 켄트주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보급 물자가 대거 탈취되고 병력이 갈수록 줄어들자, 결국 휴버트와 협상한 끝에 10월 14일에 휴전 협약을 맺고 런던으로 철수했다.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이 뉴어크 성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 왕자는 도버에 사절을 보내 귀순을 권고했지만, 휴버트는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그를 위해 성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에 도버 수비대가 루이 왕자와 프랑스 간의 물자 공급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루이 왕자는 도버를 기필코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휴버트는 루이 왕자가 다시 포위할 것을 예상하고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로이와 연락해, 프랑스 수송 함대와 합류해 보급을 받기 위해 이동하던 루이 왕자를 루이스 시 인근에서 매복 공격하게 했다. 루이 왕자는 이 매복 공격으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고 윈첼시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프랑스 함대와 만나면서 기사회생했다.
1217년 5월, 프랑스로 돌아갔던 루이 왕자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도버 성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전에 도버 성 외곽에 진영을 세운 프랑스군 분견대가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로이의 급습으로 격파당하자, 루이 왕자는 샌드위치 항에 상륙한 뒤 그곳에서 도버 성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5월 12일 도버 성 포위전을 개시한 루이 왕자는 투석기를 포함한 공성 기계로 성벽을 공격했지만, 휴버트가 이끄는 수비대가 굳건히 버티면서 조기 공략에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력 손실이 많아지고 보급 물자가 간당간당해지자,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머물렀고 프랑스에서 파견한 지원군에 점점 더 의존했다.
1217년 8월, 수도자 출신의 용병이자 해적인 외스타슈가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상당한 함대에 지원군과 물자를 싣고 영국 해협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샌드위치 인근 해안에서 휴버트 드 버그가 편성한 잉글랜드 함대의 급습으로 파괴되었고, 외스타슈는 체포된 뒤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잉글랜드 선원들에게 처형되었다. 결국 도버를 공략할 가망이 없고, 전쟁을 이어가 봐야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루이 왕자는 헨리 3세 정권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이후 양자간 평화 협상이 이어진 끝에, 1217년 9월 11일 램버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루이 왕자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헨리 3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군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