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스타디움(東京スタジアム) | |
소재지 | 도쿄 도 아라카와구 |
홈구단 | 다이마이/도쿄/롯데 오리온즈 (1962~1972) |
개장일 | 1962년 5월 31일 |
폐장일 | 1972년 |
철거 | 1977년 |
좌석수 | 35,000명 |
크기 | 좌우 90m / 중앙 120m |
파일:external/blog-imgs-11.fc2.com/2011060600462748c.jpg |
도쿄 스타디움의 외부 |
도쿄 스타디움의 야경 |
1. 소개
도쿄 스타디움은 도쿄도 아라카와 구에 있던 야구장이다.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에 해당하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 도쿄 오리온즈 - 롯데 오리온즈가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1] 개장 10년만에 문을 닫게 된 비운의 구장이다.2. 건설과 개장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고쿠테츠 스왈로즈, 그리고 다이마이 오리온즈 3팀이 모두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하고 있어 일정 과밀화가 문제였다. 다이마이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2]는 사재를 털어 홈구장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도쿄 도 곳곳을 둘러본 결과 아라카와 구에 짓기로 결정한다.모기업은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구장은 1961년 7월 착공하여 속전속결로 건설을 진행 1년이 채 되지 않은 1962년 5월에 준공했다. 신 구장을 도쿄 스타디움으로 명명하고 퍼시픽리그 6개구단이 모두 구장에 모여서 35,000석의 스탠드를 가득 채운 채 개장식을 거하게 치렀다. 프로야구 첫 공식 경기는 개장식 날 오후 7시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였으며 개장 첫 홈런은 난카이의 강타자 포수 노무라 카츠야가 기록했다.
경기장 건축 당시 메이저리그 구장들을 벤치마킹하여 지었기에 일본식 야구장 양식인 백스톱 뒤편 기록실이 없었다. 이는 관중, 선수들로부터 모두 호평을 받았다. 야구장 뿐만 아니라 볼링장, 스케이트장도 설치되어 있었다. 구장 전면으로는 영화관, 레스토랑, 백화점을 갖춘 종합 레저 시설도 설치하려 했으나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대신 이러한 선구적이고 파격적인 설계는 이후에 건설되는 일본 야구장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리온즈 구단주 나가타는 1964년 시즌부터 회사명을 빼고 연고지 이름을 따서 도쿄 오리온즈로 개명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으니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퍼시픽리그 순위 경쟁에서도 늘 하위권을 차지했고, 당시 요미우리가 V9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라 센트럴리그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관중 동원 숫자도 낮았다.
나가타 구단주는 당시 센트럴리그,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센트럴리그의 고쿠테츠와 다이요 훼일즈에게는 도쿄 스타디움을 내주기도 했으나 요미우리에게는 경기장 대여를 거부했다. 요미우리가 오리온즈의 리그 가맹을 반대했던 역사와 고라쿠엔 시절 홈경기 배정상 불이익으로 구단 또한 요미우리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 어차피 자기네 야구장이 있었고, 실제로 요미우리는 고라쿠엔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같은 퍼시픽리그의 도에이 플라이어즈 홈경기도 이따끔씩 치러졌다. 도에이는 도쿄올림픽 때문에 홈구장을 빼앗긴 지라 나중에 고라쿠엔 입성을 전제로 1962년 메이지진구 야구장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원래 메이지진구 야구장을 사용하던 도쿄 6대학 야구연맹 일정과 겹치는 경기는 이 구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3. 폐쇄와 철거
1969년 롯데그룹에서 도쿄 오리온즈의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하며 롯데 오리온즈로 개칭하였는데 1970년 롯데라는 이름을 달고 10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3] 퍼시픽리그 우승에 고무된 롯데는 1971년 아예 구단을 매입해 버린다. 다이에이는 구단의 경영권을 롯데에 양도하면서 도쿄 스타디움의 매입도 제안했다. 그러나 롯데는 매입 대신 임차 계약 지속을 원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장은 폐쇄가 결정되었다.일본롯데가 비용을 아까워 해서 구장을 매입하지 않았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3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프로구단이 쓰기에 부적절했다. 저층 주택가 한 가운데라는 입지, 가까운 전철역까지 도보로 10분 거리인 불편한 교통[4], 좌우가 90m에 불과한 작은 크기의 필드, 성적 부진으로 인한 적자 누적 등의 문제로 쉽게 매입을 결정하지 못했다.
협소한 부지에 야구장을 짓느라 그라운드가 좁아 투수들에게 불리했다. 1972 시즌 후 감독으로 선임된 가네다 마사이치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이 구장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좌우폴대와 중앙펜스까지 거리는 짧지 않았지만 야구장 부지 자체가 정사각형에 가까웠던지라 필연적으로 좌중간과 우중간이 매우 짧아 이 쪽으로 홈런 치기 쉬웠다.
구장 상공 사진을 보면 좌측 외야 관중석 바로 뒤에 좁은 도로를 놓고 바로 주택가가 위치해 있는데 이 쪽으로 장외홈런도 제법 나와서 주민들이 걱정하기도 했다. 밤이 되면 거대한 구장에서 발하는 빛이 유독 튀어서 '빛의 구장'이라고 불렸으나 경기 종료 후 조명이 꺼지면 나방들이 경기장 주택가를 기습해서 주민들이 곤혹을 치렀다.
여기에 폐장 전 평균 관중은 5,000명도 되지 않아 11년간 쌓인 적자 또한 어마어마해서 롯데는 매입을 꺼렸고, 구장을 팔아 당장의 빚을 갚아하는 구장 운영법인 또한 롯데의 임대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양측 간 매각/임대 협상 결렬 후 1973년 운영법인 마저 해산된다. 하지만 롯데가 대안 마련없이 떠난 결과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특정 연고지를 정하지 않고 여러 군데서 홈경기를 치르는 집시 롯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구장 입지 자체가 좋지 않다보니 다이마이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지 못하다가 폐장 5년 후인 1977년 3월에 도쿄도에서 부지를 매입한 후 경기장을 해체하였다. 현재는 종합스포츠센터, 연식 야구장 등 생활체육 시설이 들어서 있다. 주거지 근처 체육공원으로 적합한 부지에 프로팀 홈구장이 들어선 결과 개장 15년만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4. 여담
- 개장식 당일 관객은 만원이었으나 사실 "구장 개장식 날에 관객이 적은 것은 부끄럽다"고 관계자들이 우려하여 구장 주변에 약 15만장의 무료 입장권을 뿌렸다고 한다.
- 1971년 5월 3일 이 구장에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례가 없던 5타자 연속 홈런이 나왔다. 도에이 플라이어즈 타자들이 기록했고 장훈은 5타자 연속 홈런 중 4번째 홈런를 쳤다.
- 일본프로야구 300승 투수 중의 한 명인 고야마 마사아키가 한신 타이거즈에서 트레이드 되어왔는데 트레이드 당시에는 투수에게 불리한 이 좁은 구장에서는 별 수 있겠냐는 평가를 들었다. 한신 시절에도 발군의 제구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야마는 팜볼을 연마해 이적 첫 해인 1964년 시즌에 리그 다승 1위(30승)을 기록했으며 그 후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 구장 개장 1호 홈런 기록자 노무라 카츠야가 술회하길, "홈런 타구가 좌익수 뒤 구장 밖으로 잘 날아갔다. 주택지에 지어진 구장이라 주민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구장 좌중간과 우중간이 짧아서 홈런을 치기 쉬웠다. 반대로 말하면 투수-포수 배터리는 그만큼 리드에 신경써야 했다.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경기 전 다이마이의 구단주인 나가타가 1루 벤치 앞에 서서 백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감회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나 명물인 구단주였다."라고 말했다. "구장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제1호 기념 부조가 남아 있었을텐데, 난 역시 화려한 것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5]"며 웃으며 말했다.
[1] 구단 역사 부분을 설명하자면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마이니치 오리온즈가 창단됐다. 1958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운영하던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 합병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마이니치)가 되었다. 1964년 도쿄 오리온즈를 거쳐 1969년 롯데 오리온즈가 되었다가 1992년 치바시로 연고이전하며 지금의 팀명으로 변경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 해당 항목에도 언급되었지만 나가타 나팔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허풍이 심했다. 기자들도 그의 말은 반 정도만 믿고 기사를 쓸 정도였으니(...). 또한 다혈질의 과격한 성격으로 1960년 일본시리즈 준우승 보고 차 찾아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 "이 멍청한 자식아" 라고 상소리를 퍼붓는 바람에 뚜껑이 열린 니시모토는 1년만에 다이마이 감독직을 내던졌던 일화가 있다.[3] 그러나 1970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 패했다.[4] 노면전차 아라카와선이 있긴 하지만 관중들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5] 본인은 퍼시픽리그에서 최고의 강타자로 활약했으나 주목은 늘 센트럴리그의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집중되는 걸 보며 그들은 해바라기, 난 달맞이꽃이라며 자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