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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0:58:37

디트리히 샤흐트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의 주인공.

원래는 21세기 대한민국독빠 청년 '윤성일'로, 정치외교학과 학생이었다가 대한민국 육군 으로 입대해서 병장 만기 전역했다. 잠들고 보니 1937년 2월 4일로 회귀해 스페인 내전에 파견된 콘도르 군단[1]독일 국방군 육군 보병 소위 디트리히 샤흐트, 경제 장관 얄마르 샤흐트의 아들로 빙의한다.[2]

2. 작중 행적

주인공이 빙의하기 전의 '진짜' 디트리히 샤흐트는 1911년 8월 15일생으로 독일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빈말로도 좋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애당초 아버지 얄마르 샤흐트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워낙 여자를 많이 만나는 등의 망나니짓을 많이 해서 눈 밖에 난 것이었다. 또 독일군 장교가 되어 스페인 내전에 간 것도 열렬한 나치 추종자여서 자원한 것이었다.

주인공이 빙의한 이후엔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이 아예 변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지만, 주인공이 끔찍한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렸다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고, 빙의 후 예전과는 달리 개념찬 행보를 보인 덕분에 주변인들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고 그냥 '뒤늦게나마 철 들었다'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실제로 디트리히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PTSD 증상을 앓기도 했다.

절친이자 동기인 클레멘스와 이런저런 일을 겪어 소위에서 중위를 거쳐 대위로 진급한다. 그 후 부족한 군사 지식으로나마 문제점과 개량안을 제안해 8,8cm FlaK 대공포를 일찍이 대전차용으로도 실전배치하는데 도움을 주며 이걸로 장거리에 있는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격파한다. 이와 동시에 있는 지식 없는 지식 긁어모아 작전을 짜내 발터 모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어, 발터 모델의 추천으로 베를린 전쟁대학에 입학한다.

발터 모델의 평에 따르면 디트리히는 지휘관으로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생각이 많아서 성공하기는 어렵지만 대신 장군참모는 어울린다고 평했는데, 장교로서의 능력은 평범했던 모양이다. 이후 독일 내전 당시 디트리히의 선동력을 보고 정치인을 추천해야 했다고 평가를 정정했는데, 디트리히의 행적을 보면 확실히 장교보다는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3]

오스트리아 병합헤닝 폰 트레슈코프를 만나며 검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들어가 핵심 실무자로서 쿠데타를 현실적으로 설계하며 이끌고 쿠데타 시 지지층을 형성할 시민 세력을 끌어들인다.

독일 내전 당시 묘사를 보면 20대밖에 안 되었고 빙의한 지 2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독일 내전을 성공으로 이끌고 융커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저지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디트리히의 능력이었다. 이 때문에 빌헬름 3세가 전제정치를 시도했을 당시 디트리히에게 접근해 비스마르크가 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부했고, 결국 융커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시민들의 동원으로 저지하자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입헌군주정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독일 내전이 3개월 만에 끝나고 대부분의 정규군이 빠르게 항복한 건 디트리히의 정치력 때문에 내전 시작부터 주요 공업 시설을 장악해서 보급난을 일으켰고 일선 장병들의 사기가 바닥을 쳐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리히트호펜과 모델은 디트리히의 연설 때문에 고민 끝에 자국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결국 항복했다.[4]

쿠데타와 독일 내전이 종결된 이후 빌헬름 3세에 의해 군부 내 계급은 중령으로 진급하고 정부 내에선 제4제국의 2인자인 재상부 차관[5]이 된다. 국방과 외교, 선전은 재상과 동격의 권한을 가지며[6] 아무리 봐도 부총리의 권한은 넘어선지라, 다른 나라들도 총리급으로 여기고 대우한다고. 샤흐트 부자에 대해 독일엔 재상이 두 명 있다, 내치의 얄마르 샤흐트, 외치의 디트리히 샤흐트[7]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결국 현역 군인이면서 정부 각료라는 기묘한 자리에 앉았음을 이용해 문민통제를 하면서 군부와 민간정부를 연결해주었다.

독일군 상대로 패배를 거듭하여 본토까지 털리던 이탈리아와의 종전 과정에서 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 측과 협상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된다. 인도 받을 전범 중에 무솔리니가 시민들에게 맞아 죽어서(...) 보노미가 무솔리니 대신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전범으로 인도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위원회 측에 여론전을 제안하여 파시스트들과 왕당파가 스스로 붕괴되도록 유도하여 위원회가 무혈 승리를 하게 만든다. 이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고 질려하며 빌헬름 3세에게 경고도 할 겸 3세를 재판에 세워서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와중에 룬트슈테트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고,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에 중재를 부탁하는 군부를 거부하고, 오히려 만슈타인에게 전역신청서를 제출하며 동부전선 피해에 대한 책임을 룬트슈테트와 같이 예편되는 형태로 지는 방식으로 전역한다. 이는 문민통제를 보이기 위해서 선례를 남기는 것 또한 있다.

귀국 후에 루스벨트가 낙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골치 아파한다. 민주당과 다르게 공화당은 고립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

이후 다시 헝가리가 비밀 회담을 하며 트란실바니아 회복에 대한 헝가리의 의지를 다시 확인하자 루마니아를 버리고 최대한 헝가리를 뜯어먹기로 한다. 점점 정치인으로 완성되고 있으며, 자신이 벌이면서 발생한 타 국가의 비극과 자신의 행보에 대한 비난을 모두 받아들이고 책임감을 느낀다. 물론, 본인의 꿈은 빨리 은퇴해서 클라우디아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독일 국내외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인물로 본인이 원치는 않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국내의 경우 아래 자민당 건을 제외하더라도 샤흐트의 연설 한번에 정치적으로 의도한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난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고, 국외의 경우 에리히 코르트가 전반적인 외교를 맡다가도 주요한 결정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디트리히 샤흐트와의 대담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디트리히의 결정으로 인해 소련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핀란드와 다른 연합국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디트리히의 지지로 연합국 내에서의 지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에티오피아는 디트리히 샤흐트에 대한 지지가 상당한 수준.

본인의 이름만으로도 색이 약한 자민당의 지지도를 10% 이상 올렸을 정도로 군인들과 국민들 모두에게 강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 독일 정부 입장에서는 군부에서 내각 일원들 중 유일하게 문민통제가 가능한 신뢰도와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 때문에 포기할래야 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모두들 어느 당이 집권하든 국방장관은 디트리히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 심지어 디트리히의 대항마로 할더를 영입한 아데나워조차 디트리히 샤흐트를 따르는 군부 인사들은 포섭할 방법이 없다며, 우선은 기민당 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하더라도 나중에 자민당과의 연정으로 타협할 생각을 하고 있다.

연합국이나 여타 중립국 및 타국에서도 재상부 차관 디트리히 샤흐트는 알아도 재상부 장관과 다른 전시거국내각 장관들의 인지도는 낮다. 타임즈지에서 미국 대선에서 당선된 자국 대통령이 아니라 먼 유럽의 독일의 2인자인 디트리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은 덤. 애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웬델 윌키가 민주당에 있다가 당의 노선에 반대해 공화당으로 이적한 인물인 데다, 그럼에도 가너의 트롤링이 아니었다면 당선이 될 가능성조차 없었다. 때문에 어부지리로 당선된 이미지가 씌인데다 정책 또한 뚜렷하게 나온 바가 없는 웬델 윌키보다는 당장 유럽의 외교를 거머쥐고 있는 디트리히 샤흐트를 선정할 당위성은 넘쳤다.

그리하여 모든 당에서 러브콜을 보냈으나, 독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막고 본인의 신념에 따라 선거에 자민당으로 출마하였다. 선거 동안 아데나워와 기민당의 경계에도 잠잠하다가 선거 당일 아침에 할더의 진실을 조간신문을 통해 전국에 터트리고 사설을 통해 기민당과 사민당의 극단적 좌우대립과 흑색선전을 비판하며 기존의 선거구도를 무너뜨린다.

물론 기민당이 그럼에도 당석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원래 기민당의 전략은 자신들만으로 단독 과반을 확보하거나 사민당-자민당을 제외한 다른 군소정당들을 끌어들여 과반 이상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이 전략이 아예 어그러졌고, 기민당의 스탠스를 알고 있던 사민당과 자민당은 미리 연정을 하기로 협약을 했었다. 21세기의 방식을 이용한 시대를 앞서 나간 선거 수단이었지만, 두 번은 안 통한다고 하며 실제로 이때 아데나워가 크게 당해서 이후에는 이 방법을 법으로 못하게 막아버렸다.

첫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 겸 선전부 장관이 된다. 원래는 자민당이나 사민당 둘 모두 나치 시절 괴벨스의 이미지가 다소 씌어있는 선전부를 꺼리고 있었으나, 아내인 클라우디아가 선전부 차관이 된다는 조건 하에 선전부 장관직을 수락한다.

가족이 전부 다른 당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고위직을 차지한 희대의(?) 정치명문가가 되었다. 첫 선거결과 국회의장, 장관, 차관을 샤흐트 가문에서 배출하였기 때문. 게다가 세 사람 모두 당내 입지가 매우 높기에 독자들 사이에서는 이 집안은 가족회의가 곧 3당회의가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진짜로 집에서 남편과 아내가 연정실무협상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부부가 선전부 장관-차관을 같이 재임하다 보니 부서 내에서 애정 행각을 벌인다는 설도 심심치 않게 도는 편.

해방 작전[8] 중 고립된 소련군을 항복시키기 위해 러시아어로 된 선전물을 공중으로 뿌리고, 우크라이나 온건파를 끌여들여 자유 우크라이나군을 만들고 우크라이나 현지인들의 봉기를 일으켜 소련의 우크라이나 내 군수공장 이전을 방해하였으며,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을 대조국전쟁으로 포장하는 것 역시 대전략 차원에서 원천차단 중이다.[9]

빌헬름 3세가 임명한 재상으로서 빌헬름 2세가 현 독일정부와 빌헬름 3세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하고, 독일로의 귀환길에서 빌헬름 2세의 마지막을 지켰다. 독소전이 종결되자 독일 주도의 전후질서를 위해 식민지 독립을 은근히 부추기고 중국이 나중에 독일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해 중국을 남북으로 분단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일본과의 종전 처리를 위해 필리핀에서 열린 연합국의 주역인 미영독 3자 회담에 독일 대표로 참석해 전후 문제에 대해 합의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을 논할 때 원래 역사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히틀러가 있었다면 이 세계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대의 주역인 셈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미국 대통령 웬델 윌키는 디트리히 샤흐트에게 "당신은 디트리히 샤흐트로서 그 자리에 있지만, 나는 미국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디트리히는 다음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독일의 평범한 국민으로 살겠다며 아예 선거날 클라우디아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명목으로 해외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 국민들이 순순히 보내줄지는 의문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콘라드 아데나워가 그냥 휴가 내면 되지 굳이 은퇴를 해야 하냐며 말리러 왔다가 클라우디아의 눈물 작전에 말려서 실패한다.

클라우디아와 서로 마주 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의 본편 엔딩을 장식한다. 마무리 장면에서 클라우디아가 디트리히에게 말을 높이지 않는데, 이는 클라우디아가 더 이상 (미래인) 디트리히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클라우디아는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디트리히가 이를 이용해 독재자가 될 것을 항상 경계해왔기 때문.

에필로그에서 은퇴 후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나는데 신혼여행이 끝나면 요식사업을 해서 독일의 백종원이 되는 게 목표라고 한다. 전 세계의 요리를 독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현지화해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애초에 전 세계적으로 여행을 간 이유는 그 나라에서 괜찮은 요리사들을 섭외하기 위해서였고 이를 바탕으로 요식업체를 세우려고 했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았는데,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아예 황실 주방장을 보내주기로 했다.

독일의 부유층들은 그의 사업에 투자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디트리히가 추진한 장원 현대화 사업으로 혜택을 본 융커들 중 몇몇은 그에게 식자재 같은 건 공짜로도 퍼주겠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디트리히가 사업을 하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닥치고 투자부터 하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고전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 생산성이 낮은 장원 체제에서 벗어나 기계화, 집약화된 농장과 축산 농가를 운영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됐다. 육군 총사령관에서 전역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양돈 사업을 키우는 데 재미를 붙였을 정도.

이후 항공모함[10]의 진수식에 왔다가 절망한다. 왜냐하면 그가 독일에 귀국한 뒤 새로 취역하는 항모 2대의 진수식이 있었는데 2번함의 이름이 디트리히의 아버지인 알마르 샤흐트, 3번함의 이름은 디트리히 샤흐트 본인의 이름이었기 때문. 샤흐트 샤흐트 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여담으로 칸즐러급의 1번함은 비스마르크였다. 작중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와의 난타전에서 격침된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의 함명을 물려받았다.

이후 스페인 전쟁의 학살, 사할린 근방에서 일어난 독일, 미국, 소련 간 3국 간의 갈등 등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스페인 민주화 이후 스페인 공산당의 당수가 된 엔리케 리스테르가 젊은 시절 스페인 내전기의 독일 전쟁범죄를 규탄하자 디트리히도 이에 동의하며 당시 전쟁범죄를 외면하던 독일에게 독일의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3. 평가

명연설가[11]이자 여론전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독일 내전 승리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현 독일 제4제국 전시 거국내각에서 아버지인 얄마르가 관심 없는 외교와 군사 쪽을 담당하였다.

그간 독일군에게 결여되었던 대전략적 우위와 보급 및 군수물자면에서 부족했던 점을 남김없이 채워주는 인사다. 당장 1차 대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빌헬름 2세의 지나친 팽창주의적 행보와 외교적 자충수로 인해 3국 협상이 이뤄졌고 군사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최악인 무제한 잠수함 공격으로 인해 미국까지 적으로 돌리며 1차대전 내내 전투에서는 이겼어도 전략적으로는 완패해 결국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불러오는 등 '군대가 나라를 가진' 독일의 최대 단점을 채워준 것이다. 독일이 군국주의로 흘렀을 때 작중에서 군부의 행보가 위험천만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폴란드에 너무 과도한 부담을 씌워 공동전선이 이탈할 위기도 있었으며,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을 과소평가해 모스크바까지 밀어버리자는 폭주를 주인공이 말려야 했다.

2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들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의 공업 생산력은 독일을 능가하고 있었기에 설령 독일군이 쾌속진격해 하리코프 모로조프 설계국, 우랄바곤자보드, 스페츠마쉬, 키로프 공장 등 소련의 주요 제조국과 설계국을 장악하더라도 소련의 방대한 국토 탓에 판세를 뒤집기 힘들어 디트리히가 전차나 항공기 등의 기술을 미리 개편해 놓지 않았더라면 소련에게 더욱 고전했을 것은 명약관화였다. 작중에서도 소련의 공업생산력을 독일의 기술력으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정도였지, 아예 소련의 전 영토를 점령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랜드리스 블러핑이 먹힐 뻔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소련이 내부적인 여러 문제+1939~1942년에 독소전을 치러서 역량이 상당히 떨어진 것도 있었는데,[12] 작중 1942~1944년 '대조국전쟁'으로 명명된 제2차 적백내전에서는 내부 정리가 끝나자 오히려 연합국과 싸웠던 시절보다 훨씬 강력해져서 백군을 완전히 압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니, 원 역사에서 보여준 독소전 후기 소련군의 모습은 2차 적백내전에서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영프 전쟁 직전에 프랑스가 영국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눈치챘고(미래에서 일본이 선전포고도 제대로 안 하고 진주만을 습격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프랑스가 벨기에를 우회하여 독일을 공격할 것도 눈치채며(이전의 슐리펜 계획과 함께 원래 역사의 독일이 내전기 시절 나치에게 했던 낫질 작전을 프랑스에 하며 승리했기 때문에) 높은 전략적 식견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러가지 이유로 현재 연합국에서는 사실상 연합군의 총괄 관리자이자 연합국의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단순하게 연합국에서의 독일의 비중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점이 포인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연합국의 성공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디트리히다. 농담이 아니라 디트리히가 개입하지 않은 연합국의 작전이나 계획은 대부분 실패했다. 심지어 독일까지도 말이다.

두 번째는 디트리히가 단순하게 독일의 이익만을 밀어붙이지 않고 연합국 전체의 이득을 중시하고 특정국가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도 크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라는 예외는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외교적 공격을 무마하기 위해 독립시켜 주었으나 독일 국내의 여론을 우려해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편입시켰으며, 루마니아는 발칸의 동맹국인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때문에 독일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에 가깝다. 유고와 헝가리 역시 독일의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독일의 명분 제공만을 목적으로 했고, 독일 역시 대 소련전선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실리를 위해 명분을 내준 것이었다.

유고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디트리히가 유고 해체에 동의해서 1940년대에 유고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이건 당시 유고 문제의 해결 방법이 도저히 없다는 구조적이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빙환트를 해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을 듣는 티토가 본작에서는 소련에 가버렸고, 유고 왕실의 실수로 유고 내전으로 확대되어 버린 이상 어차피 원 역사에서도 1990년대에 유고 내전 벌여서 해체되어 버렸겠다, 50년 전이나 후나 뭐가 다르겠냐고 생각한 것.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좀 애매한데, 국민투표에서 71%의 지지율로 합병에 찬성으로 나온 것도 있고, 이탈리아 전선을 지탱한 것 역시 독일이라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굳이 독립하느니 전후 강대국이 될 독일에 붙자는 여론이 더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이 편 논리인 민족자결주의에도 위배되는 내용이 아니기도 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를 엿먹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2차대전 도중에 약소국을 배려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핀란드와 폴란드, 에티오피아인데, 핀란드와 폴란드의 경우, 이들에 대한 지원은 내각 대부분이 반대했으나 디트리히가 밀어붙여 실행되었다.

지원이 실시된 이후에도 지원의 실효성이나 보상을 언급하며 지원을 축소 또는 아예 취소하는 게 낫다는 말이 수시로 나올 정도. 지원을 받는 두 나라도 그러한 독일의 여론을 알고 있기에 자신들이 단순한 버림패로 쓰일지 모른다고 걱정했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원해준 결과 핀란드는 소련에게 양면전쟁을 강요하여 독일-폴란드 전선에 가해지는 소련의 압력을 덜어주었고, 폴란드는 압도적 수적 우세를 자랑하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직접 피 흘리는 중요한 동맹국이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연합국 내에서 걸핏하면 아프리카의 식민지 문제 때문에 독일의 지원을 끊으라는 다른 연합국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원해주었고, 에티오피아는 아시아 전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원 역사에 비해 일본의 확장세를 크게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때 벨기에의 반대가 특히 심했는데 벨기에는 아시아 전선과도 관련이 없고, 아프리카의 식민지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 반면 아프리카에 식민지가 거의 없는 네덜란드는 반대를 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아시아 전선에 기여하는 에티오피아를 고려해서 물타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작 중의 연합국 간 협상 테이블에서 디트리히가 벨기에 대표에게 면박을 주는 게 일상이다.

프랑스도 라 로크가 디트리히와의 회담으로 본토까지 공격당하기 전에 항복할 결심을 굳혀 프랑스 본토까지는 피해가 가지 않았고, 프랑스가 대육군 해체 대신 대소련 전선에 나서겠다 자처하자 가장 도움이 필요한 핀란드 전선에 보내겠다 받아들이고 드골에게 '프랑스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 프랑스의 처지도 나아질 것'이라 귀띔해 의욕을 내게 만들어서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도 크게 깎아주고 프랑스도 대육군의 명예를 대소련 전선에서 되찾을 수 있었다. 원 역사의 '6주'가 프랑스 4공화국의 혼란으로 이어질 정도로 큰 문제였음을 고려하면 프랑스도 혜택을 본 것이다.

디트리히가 원 역사 이상으로 가차 없는 태도를 보인 건 일제와 중국공산당 정도지만, 이들은 둘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던 데다 일본도 전후에는 일본인들의 멘탈 케어를 위한 프로젝트를 실시해서 일본인들도 과거의 트라우마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암시가 있고 중국공산당도 마오쩌둥을 죽인 대신 살아남은 저우언라이와 타협해서 원 역사 마오 시절 중화인민공화국의 사건 사고들이 없어졌다고 하므로 적어도 인민들 입장에서는 더 살만했을 것이다.

본작의 후대 사람들에게는 글래드스턴을 잇는 도덕주의 외교를 완성한 사람 또는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에 입각한 국익 지상주의자라는 상반된 평을 들으면서도 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독일이 있었다는 평가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고평가하는 사람들은 2차 대전과 전후의 모든 질서에는 그가 관여한 만큼, 20세기는 디트리히 샤흐트의 시대라고까지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독일의 외교, 군사 분야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대전략가로 남아 있다고. 책에서 그를 평한 말은 한 번도 독일의 지도자인 적이 없으나, 현대 독일을 논할 때 가장 먼저 회자되는 인물.

콘라트 아데나워가 매우 싫어한다. 현대적인 고용 지침을 가미한 감성 마케팅 기법을 자기 회사에 적용하여 그의 지지기반인 자본가들의 원성을 받게 해서 관련 법안을 수도 없이 뜯어 고치게 만든 데다, 첫 의회를 끝으로 클라우디아와 정계에서 은퇴하여 결과적으로 아데나워가 한 번도 선거에서 이길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13] 추가로 그의 업적과 깔끔한 사생활 때문에 본인이 비교되어 이미지를 많이 구겼다. 이 때문에 말년에도 아데나워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다 디트리히 이야기가 나오자 피꺼솟하면서 흥분할 정도.

독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논란을 빚기는 했지만, 라 로크가 나치의 집권은 독일인들이 바라던 것이며 설령 나치에서 제4제국으로 정권교체가 되었다 해도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하지 않았으면 결국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했을 거라고 항의하자 부정하지 않거나 말년에 엔리케 리스테르가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의 전쟁범죄 규명 활동을 벌이던 당시 디트리히가 스페인 내전 당시 전쟁범죄를 방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협력했다는 것을 보아 과거의 책임을 마냥 외면하고 산 건 아닌 듯하다.

4. 기타

다른 빙의대역물의 경우 주로 주인공이나 아버지가 높으신 분으로 전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높으신 분이지만 나치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한 아버지를(그것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고 있는 일개 육군 소위로 시작한다.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걸 자기 입으로 밝힌 케이스인데, 나치가 2차대전을 일으키는 걸 막을 수 없다 생각해 멘붕했을 때 클라우디아에게 홧김에 말했다.

본인의 능력과 별개로 근본적으로 소시민적인 인물이라, 초반에는 미국에 도망치려 하기도 했고 정치에 환멸을 느껴 2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다시는 정치에 나서지 않았다. 2차대전 도중에도 빨리 다 끝나고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거나 전쟁으로 인한 PTSD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당대 독일인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 내심 냉소적으로 보거나 독일에 소중한 사람들이 없었으면 정치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라 로크와 엔리케 리스테르가 나치를 지지해서 온갖 범죄를 벌이더니 막상 때가 되니까 당사자만 없앤 뒤 나치의 과실은 다 빼가서 누리고 있다고 비난하자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1] 정확히는 산하 제1기갑사단의 1대대 소속 2중대의 중대 부관[2] 원래 역사에서의 얄마르 샤흐트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다.[3] 그래도 당대 독일군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대전략 부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외교, 대전략적 식견 때문에 국방부 장관 업무는 잘 수행했다.[4] 모델은 엄밀히 말하면 부하들의 항복을 허락하고 본인은 항복을 거부해서 체포되었다.[5] 작중 시점에서 30세도 안 된 디트리히 샤흐트를 재상은 고사하고 '부'재상으로도 임명할 수 없기에 빌헬름 3세가 우회책을 쓴 결과물. 한국으로 치면 국무총리를 국무총리부로 만들고 장관과 차관을 둔 셈이다.[6] 사실 이건 재상부 장관인 얄마르 샤흐트가 경제를 비롯한 내정 외엔 관심을 안 둬서 그의 아들 디트리히와 자연스럽게 역할이 분담된 결과였다.[7] 주인공 시점에서 한 말을 옮긴 것이다. 원래는 "외치의 아버지, 내치의 나"였다.[8] 폴란드어로 비즈볼레니야. 참고로 만슈타인이 제출했던 이름은 바르바로사 작전이었다. 물론 원 역사의 바르바로사 작전과는 차이가 크다.[9] 본작의 대조국전쟁은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물러난 뒤에 일어난 자유 러시아와의 제2차 적백내전을 뜻한다. 이때 소련군은 연합국이 물러난 뒤 안드로포프가 내실을 다시 다져서 오히려 연합군과 싸웠을 때보다 더 강해진 상태로 2년에 걸친 내전 끝에 제2차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10] 제트기를 발진할 수 있는 신형 항공모함으로 빌헬름 3세가 이렇게라도 재상을 갖겠다는 말에서 착안하여 칸즐러(재상) 급으로 명명되었다.[11] 실제로 작품을 읽던 독자들 사이에서도 사흐트의 연설에서 민주주의 뽕(?)을 제대로 맞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고로 이 연설문은 어디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닌 작가 개인이 직접 쓴 것이다! 작가의 뛰어난 집필 능력이 보이는 부분.[12] 원 역사 독소전은 1941~1945년으로 1939~1941년 당시에는 소련도 기계화 공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1942년 완성 예정) 애초에 본작 독소전은 소련이 독일과 싸우려던 게 아니라 핀란드와 폴란드만 먹고 끝내려다 일이 꼬여서 예정에 없던 독일군과 싸우게 된 거였기 때문.(스탈린은 히틀러보다는 현실적이다) 원 역사 나치 독일도 1945년에 준비가 끝날 예정이었다 1939년부터 2차대전이 시작되어 오히려 말기였던 1944년에 기계화가 정점을 달렸다.[13] 당장 전시 내각 이후 첫 선거 때부터 할더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물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