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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5 18:28:06

라구아트

파일:라구아트 성채.jpg
19세기의 성채와 시가지
1. 개요2. 역사
2.1. 모로코 / 알제리2.2. 1852년의 학살2.3. 현대
3. 갤러리

1. 개요

아랍어 الأغواط
프랑스어 Laghouat
영어 Laghwat

알제리 중북부 라구아트 주의 주도. 젤파에서 서남쪽으로 80 km, 티아레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170km 더 가면 가르다이아가 나온다. 아무르 산맥과 사하라 사막의 사이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인 라구아트는 경제 /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고, 인구는 약 15만명이다. 와디 우에드 음지 서쪽에 형성된 시가지의 서부에는 라구아트 대학교가 있고, 동부에는 방공 기지가 있다. 동남쪽 외곽에는 라구아트 공항이 위치한다. 도시 인근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천연가스 매장지인 하시르 멜이 있고, 그외에 직물업이 발전하였다.

2. 역사

파일:알제 라구아트 1.jpg
19세기 라구아트 묘사화

기원전 9천년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비록 기후 변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기원전후 무렵 다시 티즈그라린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 주민들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거나 복속하기를 거부하였고 기독교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그곳을 '반란 도시'로 일컫었다. 그러던 14세기 이븐 칼둔은 성벽이 둘러진 베르베르계 마그라와 연맹에 속한 라구아트 부족의 마을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라구아트 크셀) 다만 지명의 유래가 된 라구아트 부족은 곧 서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도시에는 베르베르계 사그린 가문과 아랍계 아흘라프 가문이 있었다.

2.1. 모로코 / 알제리

1368년 내전에서 패한 자얀 왕조의 전 술탄 아부 함무 2세가 틀렘센을 잃고 라구아트에서 병력을 모으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음자브 협곡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1650년대 일대는 알라위 왕조에 복속되었다. 다만 18세기 들어 연공 납부를 중단하자 1708년 알라위 조의 왕자 압델말레크 휘하의 군대가 도시 서쪽에 주둔한 후 연공을 거두어갔다. 다만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후 내전을 틈타 1727년 알제 총독이 일대를 복속시켰다. 라구아트 주민들이 재차 연공 납부를 거부하자 1741년 티테리의 베이가 도시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1785년에는 알제 총독의 지시로 오랑의 데이가 토벌에 나서 연공을 내게 하였다. 이후 라구아트는 1828년까지 오랑 혹은 티테르의 베이에게 꾸준히 연공을 바쳤다. 1829년에는 이집트 다미에타 출신의 셰이크 무사 이븐 하산 알 미스리가 도시에 정착하여 샤딜리야 종단을 창설하였다.

2.2. 1852년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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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라구아트 전투
파일:라구아트 거리.jpg
도시의 우울함이 느껴지는 1879년의 시가지 그림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자 이듬해 무사 알 미스리는 지하드를 선포하고 라구아트를 중심으로 저항군을 이끌었다. 1849년 비스크라 인근 자아차 공방전을 이끈 부 지안 역시 라구아트 출신이었고, 무사 알 미스리와 함께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1852년 11월 6천의 프랑스 군이 라구아트를 포위하였다. 보름 간의 저항 끝에 12월 4일 도시는 함락되었고, 프랑스 군은 수일간 잔혹한 학살을 벌였다. 장군의 전사에 대한 보복에 눈이 먼 프랑스 군은 역사상 처음 민간인에 대한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4500의 주민들 중 2/3이 죽임을 당하였다. 아랍어로 '공허함'을 뜻하는 칼리야로 지칭되는 이때의 학살은 라구아트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살아남은 여인들은 아들들이 프랑스 군에게 끌려갈까 두려워 귀걸이를 걸어주는 등 여장을 시켰고, 이 전통은 현재까지도 악령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풍습으로 남아있다. 프랑스는 라구아트를 사하라 지역 팽창의 거점으로 삼았다.

2.3. 현대

파일:라구아트 박물관.jpg
라구아트 박물관. 프랑스 지배기의 성당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베샤르와 마찬가지로 라구아트에도 영국군과 유대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수용소가 세워졌다. 다만 프랑스의 해방 후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들이 수용소에 갇혔다. 1946년에는 3년 전 폐위된 튀니스의 베이 무함마드 7세 알 문시프가 라구아트에 가택 연금되기도 하였다.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라구아트에서도 여러 현지인들이 저항하다가 순국하였다. 1957년 프랑스 장관이 도시를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냉대에 오아시스 주의 주도를 와르글라로 옮겼다. 독립 후 2011년 프랑스 시절인 1857년에 세워진 티즈그라렌 성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2012년 1월 라구아트에서는 주택과 기간시설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이에 경찰들은 최류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3. 갤러리

파일:알제 라구아트.jpg
라구아트 오아시스

파일:알제 라구아트 2.jpg
라구아트 풍경

파일:라구아트 시내.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