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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울 본영

라바울 전투에서 넘어옴
파일:라바울 6.jpg
일본군 라바울 본영의 항공사진

1. 개요2. 설립3. 라바울 전투
3.1. 라바울 무력화 작전3.2. 일본군의 수비3.3. 소강 상태3.4. 미군의 신무기 실험장3.5. 종전과 항복
4. 기타

1. 개요

라바울태평양 전쟁일본 제국의 남방 전선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라바울 소패가 이 시절 라바울에서 유래되었다.

2. 설립

라바울에 있는 큰 항구는 사실 오래된 화산의 분화구가 무너지면서 생긴 칼데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군뉴브리튼 섬 동부의 라바울을 점령한 후 이마무라 히토시 육군 대장 등의 지휘로 동남 방면의 일대 거점으로 쌓아 올려졌다. 그렇게 라바울엔 일본 항공대의 기지가 생겼고, 그 뒤로 연합군에게 '라바울 요새'로 불렸다. 그렇게 육지의 해군육전대를 합해 총 9만여 명의 일본군이 라바울에 배치되었다. 다만 1943년 들어 일본군이 점차 태평양의 근거지들을 상실해가며 라바울은 점차 고립되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격려차 라바울을 방문했으나 부건빌로 이동하던 중 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기도 하였다.

3. 라바울 전투

파일:라바울 5.jpg
불타는 라바울 시내와 폭격을 받아 침몰하는 일본군 보급선

1944년 2월에 접어들자, 라바울의 위상은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이에 미해군의 헐지 제독이 2월 17일부터 29일 사이에 평균 5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1개 구축함 분대를 동원하여 6번이나 라바울과 뉴아일랜드의 카비엥에 야간포격을 가했다. 이러한 야간포격이 일본군에게 실제로 끼친 피해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으나, 이틀이 멀다고 구축함에 포격을 당한 라바울의 일본군들은 이제 그 존재만으로도 연합군에게 위압감을 주던 일본군의 대기지로서 라바울의 위상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했다. 그린아일랜드에 기지를 둔 어뢰정들도 라바울과 캐비엥 주변을 제집 드나들듯 다니면서 일본군 주정이 눈에 보이는 대로 격침했다. 결국 라바울의 일본군은 바로 앞바다에 주정도 마음대로 띄우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라바울을 결정적으로 뇌사 상태로 빠뜨린 것은 항공전의 패배였다. 1944년 2월 17일에 미처 제독이 이끄는 제58기동부대가 트럭 섬을 공습하여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자 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은 라바울의 전투기들을 트럭 섬으로 불러들였다. 라바울의 육군항공기들은 이미 웨왁 지역으로 옮겨간 이후였으므로, 해군 전투기들의 철수는 곧 라바울 항공력의 소멸을 의미했다. 1944년 2월 19일의 공중전을 마지막으로 라바울 상공을 지키는 전투기들은 사실상 사라졌다.

2월 21일에 1대의 제로기가 이륙했고, 3월 3일에 심혈을 기울여 수리한 8대의 제로기가 요격을 실시했다. 이후 4월에 1대의 제로기가 이륙했다. 이후로는 몇 달에 한번씩 지상에서 부속품들을 모아 재생해 낸 1대 내지 2대의 전투기가 요격을 위하여 이륙했을 뿐 라바울 상공은 완전히 미군기의 독무대가 되었다. 라바울의 일본군이 마침내 항복했을 때 라바울에는 육군의 하야부사 전투기 1대와 해군의 제로기 3대, 그리고 97식 함상공격기 1대가 비행가능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3.1. 라바울 무력화 작전

파일:라바울 7.png
라바울 시내를 폭격하는 연합군

미군은 라바울의 항공력이 사실상 소멸한 뒤에도 3주일 간은 전투기의 호위 하에 라바울을 폭격했으나, 1944년 3월 8일부터는 전투기의 호위 없이 폭격을 실시했다. 항공력을 사용하여 라바울을 뇌사상태로 유지하는 임무는 주로 해병대 항공기로 이루어진 솔로몬항공사령부(ComAirSol)가 담당했다. 미군은 우선 라바울 시가지 자체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솔로몬항공사령부는 1944년 2월 28일에 라바울 시가지와 주변 지역을 일단 14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각 구역은 다시 2-3개의 소구역으로 나누어서 매일 꼼꼼하게 각 구역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조직적으로 차근차근 파괴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솔로몬항공사령부가 동원한 항공력은 상당했다. 하루 평균 B-24 폭격기 24대, B-25 쌍발폭격기 24대, SBD 돈틀리스TBF(M) 어벤저같은 단발 폭격기 80 - 90대가 출격했으며, 450kg 폭탄을 장비하도록 개조된 전투기들이 매일 50-60대씩 폭격에 투입되었다. P-39 에어라코브라P-40 같은 단발전투기들은 450kg 짜리 폭탄 1발, 쌍발의 P-38 전투기는 450kg 폭탄 2발을 운반할 수 있었다. 단 이중에서 B-24 폭격기들은 3월 24일부터 트럭 폭격 임무로 돌려지면서 라바울 폭격에서는 빠졌다.

1944년 5월부터는 에미라우 섬에서 출격하는 F4U 콜세어 전투기들이 주로 캐비엥을 폭격했다. 1944년 2월 20일부터 5월 15일까지 솔로몬항공사령부는 9,400 회의 출격을 통하여 라바울에 7,4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는 하루 평균 약 85톤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 결과 1943년 말에 1,400 동에 달했던 라바울의 건물 수가 4달 후인 4월 20일이 되자 122동으로 줄어들어 버렸고, 라바울의 일본군들은 땅에 굴을 파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3월 10일에는 24대의 호주군 소속 P-40 전투기들이 라바울 부근의 일본군 보급기지를 폭격했다. 여기에는 주로 225kg짜리 모탄에 128발의 소이탄을 수납한 집속폭탄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이후 9일 동안 P-40 전투기 외에도 SBD 돈틀리스와 TBF(M) 어벤저, 그리고 B-25 쌍발폭격기들이 소이탄을 사용하여 라바울 부근의 일본군 보급기지들을 맹폭했다. 연합군 항공기들은 9일 동안 이전까지 고폭탄을 이용한 모든 폭격보다 6배나 더 많은 보급품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라바울의 일본군들은 항복할 때까지 주로 농사를 지어서 확보한 50,000 톤의 식량 중 절반인 25,000 톤을 연합군의 공습에 의하여 상실했다.

3.2. 일본군의 수비

라바울을 공습하는 연합군 항공기에 유일한 실질적인 위협인 대공포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솔로몬항공사령부는 1944년 3월 15일부터 5월 1일 사이에 라바울의 대공포 절반 가량을 파괴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367문 가운데 274문이 종전시까지 살아남았다. 라바울 수비를 책임진 제8방면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은 연합군 항공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대공포 보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연합군 항공기의 진로를 예상하여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대공포를 집중배치했으며, 대공포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싶으면 당장 옮기고, 기존의 자리에 가짜 대공포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라바울을 방어하고 있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일본 육군에서 보기 드물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1944년 3월 15일에 라바울의 제8방면군 사령부에서 앞으로의 작전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마무라 대장은 앞으로 100년간 라바울을 방어하는 것이 목표라고 천명하고, 부하들에게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를 식량 확보라고 못박았다. 그리하여 앞으로 라바울 주둔 일본군의 일과를 1주일 중 2일은 농사, 2일은 땅굴파기, 2일은 군사훈련, 그리고 하루는 휴일로 정했다.

식량 확보를 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원 예외없이 1인당 200 평을 경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마무라 대장 자신부터 실제로 200 평의 경작지를 확보하여 농사를 지었다. 전근대 시절에나 있을 법한 둔전을 어떻게 현대전에서 하냐 싶겠지만... 라바울이 속한 파푸아 뉴기니는 6천 년 전부터 독자적이고 우수한 농경 문화를 꽃 피울 정도로 농사에 적합한 땅이라서 오히려 서양에서 농사 기술을 배워간 적도 있었다. 농사라는 게 굉장히 토지와 기후를 많이 타고 제대로 쓸 만한 농지로 만드는 데만 긴 세월이 걸려서 보통은 십만에 달하는 장병을 먹인다는 건 생각도 못하지만, 라바울은 가능했다. 이마무라 대장도 라바울의 생산력을 믿고 둔전을 실행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병들이 농민 출신으로 농사에 익숙해 빠르게 개간할 수 있었다.

총사령관이 솔선수범을 보이자 모든 부하들도 농사에 힘을 쏟아서 1944년 3월 이후 종전 시까지 잠수함만 몇 번 왔다 갔을 뿐 보급이 완전히 두절된 상황에서도 라바울의 일본군들은 2,100만 평의 경작지에서 나오는 식량으로 충분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작물은 처음에는 타로나 얌 같은 현지 작물을 심었으나, 곧 고구마같이 더운 날씨에서 잘 자라는 작물과 상추와 배추, 무 등 각종 채소들을 심기 시작했고, 장립종인 현지 벼와는 달리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단립종 벼의 종자도 들여와서 심기 시작했다. 원래 열대성 작물인 벼는 고온다습한 원래의 환경에 놓이자 쑥쑥 잘 자라서 3-4달이면 수확이 가능했다. 식량이 풍족해지자 사탕수수도 심어서 단 음식도 마음껏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다만 동물성 단백질과 의약품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가축도 사육했지만, 현지 가축은 육질이 나빠서 주로 냉동선 보급과 근해 어업으로 충당했다. 의약품의 부족으로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거의 3만명 가까운 인원이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다행히 식량이 풍족하여 기본 영양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는 드물었다. 식수는 수인성 전염병 문제로 주로 빗물을 받아 사용했다고 한다.

3.3. 소강 상태

파일:라바울 4.jpg
라바울의 당시 지도. 현대의 코코포 일대는 전부 둔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연합군 항공기들도 라바울의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경작지와 거기서 일하는 인원은 물론 경작지로 걸어서 왕복하는 인원들도 공격하지 않았다. 라바울과는 달리 호주군이 종전 이전에 항복을 받아내려 했던 부갠빌 섬에서는 호주공군이 일본군의 경작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부갠빌 섬의 일본군들은 극심한 식량부족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다만 라바울에서도 수확하여 쌓아둔 곡식이 눈에 띄면 연합군 항공기들이 즉시 달려들어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작물을 수확하는 즉시 동굴로 옮겨야만 했고, 수확량이 늘어날수록 식량 창고로 사용하기 위하여 동굴을 더 많이 파야만 했다.

이는 일본군이 군사훈련에 신경 쓰기보다 농사일과 땅 파기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만들려는 연합군의 의도였으나, 동시에 일본군의 지하 시설이 늘어날수록 라바울은 점점 더 침공하기 어려운 요새로 변해갔다. 연합군 항공기들은 또한 일본군의 트럭이 눈에 보이는 족족 달려들어 공격하여 4,900대의 트럭 중 900대를 파괴했다. 따라서, 라바울의 일본군은 4,000대의 트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간에는 수확한 작물의 수송이나 인원 수송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1944년 6월 15일이 되면서 이제까지 남태평양 해역군이 관장하던 동경 159도 이서 지역의 관할권이 다시 남서태평양해역군으로 넘어갔다. 이때쯤엔 라바울에 의미 있는 폭격 대상은 거의 사라졌고, 폭격은 주로 일본군이 밤새 정비해 놓은 활주로와 그곳을 지키는 대공포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라바울 주변의 활주로들은 1944년 4월 17일까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이후로 일본군은 매일 밤마다 라바울 주변의 활주로 중 최소한 하나는 반드시 사용 가능한 상태로 수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중에 다시 실시될 반격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부하들에게 그들이 아직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한 공격 대상을 잃어버린 연합군 항공기들이 경작지 같은 다른 목표물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적절한 표적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연합군 측에서도 라바울 활주로 폭격은 초보 조종사들의 실전 데뷔 무대로 아주 적당했다. 그곳에는 위험한 적의 전투기는 없으면서도 대공포가 있어서 충분한 실전 경험이 되었고, 사진 판독을 통하여 실전 상황에서 초보 조종사들의 폭격 정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실전사격연습장이 매일 제공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연합군이 실제로 활주로를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 효과적인 방법들이 있었다. 공습시 무작위로 맞추어 둔 시한신관이 담긴 폭탄을 활주로에 잔뜩 뿌려놓으면 야간 수리는 거의 불가능했다. 트럭 대공습 때 제58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은 이런 방식으로 공습 당일 밤새 트럭 환초의 4개 비행장에서 단 1대의 일본기도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면 부갠빌 섬에서 했던 것처럼 새벽녘에 기습적인 저공비행으로 활주로를 수리하던 인원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으면 많은 인명피해를 안겨 줄 수 있었다. 이런 방식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꾸준히 실시하면 충분히 라바울 주변의 활주로를 장기간 폐쇄시킬 수 있었으나 연합군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3.4. 미군의 신무기 실험장

라바울과 주변의 고립된 일본군 기지들은 또한 미군의 신무기 실험장의 역할도 했다. 미 해군은 1944년 9월과 10월에 걸쳐 라바울과 그 인근의 일본군 기지에 대해 텔레비전 카메라를 장착하고, 450kg짜리 폭탄을 장착한 무인기를 실험했다.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나 어벤저 뇌격기에 탑승한 무인기 조종사는 무인기가 전송하는 TV 화면을 보면서 무선으로 조종하여 목표에 명중시켰다.

시험 결과는 크게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정표적에 대하여 총 44대의 무인기가 발사되었는데 그 중의 2대는 무선통제를 벗어나서 추락했고, 5대는 텔레비젼 화면이 끊겨서 유도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5대는 기계적 고장으로 추락했으며, 3대는 일본군에게 격추되었다. 마지막까지 유도된 29대 중 18대는 목표에 명중했고, 11대는 빗나갔다.

미해군은 이 무인기가 가능성이 있으나, 앞으로 해결해야 할 기술적 문제가 많다는 평가를 내리고, 차라리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에 텔레비젼 카메라와 무선조종장치를 부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돈틀레스 개조형 무인기는 1944년 10월 26일에 완성되었으나, 아직도 유용한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를 일회용 유도 미사일로 소모하는 것은 지나친 낭비라는 지적에 따라 이후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3.5. 종전과 항복

미군 신참 조종사의 폭격연습장으로, 또한 미군의 신무기 실험장으로서 역할을 하던 라바울의 굴욕적인 상황은 종전이 되고서야 끝났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8월 9일에 소련은 일소불가침조약을 깨고, 만주를 침공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일본은 8월 15일에 항복했고, 9월 2일에는 도쿄 만에 떠있는 미국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4일 후인 1945년 9월 6일, 일본 제8방면군 사령관 이마무라 대장은 라바울 항에 정박한 영국항공모함 글로리 함상에서 89,291명의 라바울 주둔 일본군을 대표하여 호주군의 스터디 대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종전 후에 라바울의 일본군 기지를 조사한 호주군은 라바울을 침공하지 않기로 한 연합군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라바울 주둔 일본군 모두가 최소한 몇 개월 이상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들이 커다란 동굴부터 아무리 소수 인원이 거주하는 곳이라도 꼭 붙어있는 조그만 식량 저장고에 이르기까지 일본군 기지 곳곳에 가득 쌓여 있었다. 전투시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준비해 놓은 전투식량만 1,000톤이 넘었고, 의복도 3,000톤 넘게 남아있었다. 탄약도 충분하여 각종 구경의 포탄 70만 발과 소총탄 1,100만 발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식량과 탄약이 충분한 일본군의 사기도 항복시까지 아주 높았다고 한다.

4. 기타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일본군 진지 점령시에 큰 손해를 냈기 때문에, 다른 연합군에 비해 더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라바울에는 많은 수의 위안부가 끌려왔는데, 현지인에 따르면 '총알과 같은 속도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전부 일본 옷을 입고 있었고, 실제로 그중에 일본인도 꽤 있었으나 그들은 장교 전용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국인, 중국인이었다.

종전 후 한국에서는 라바울 마담이란 여성이 노량진의 적산 가옥을 불하받기도 하였다. 그만큼 1940년대에 라바울은 한국에 잘 알려진 남태평양 지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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