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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20:00:20

라파엘 카레라



파일:과테말라 대통령기.svg
과테말라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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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공화국 제4•8대 대통령
라파엘 카레라
Rafael Carrera
파일:1000026894.jpg
<colbgcolor=#0287e0><colcolor=#fff> 출생 1814년 10월 24일
누에바에스파냐 과테말라 도독령 과테말라시티
(現 과테말라 과테말라시티)
사망 1865년 4월 14일 (향년 50세)
과테말라 공화국 과테말라시티
재임기간 4대 대통령
1844년 12월 14일 ~ 1848년 8월 16일
재임기간 8대 대통령
1851년 11월 6일 ~ 1865년 4월 14일
서명 파일:Firma_de_Rafael_Carrera._Museo_Nacional_de_Historia.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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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87e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시몬 카레라
어머니 후아나 투르시오스
배우자 페트로나 가르시아 모랄레스 데가르시아
학력 무학[1]
종교 로마 가톨릭[2] }}}}}}}}}
1. 개요2. 생애
2.1. 청소년기2.2. 인생역전의 시작2.3. 과테말라의 통치자
2.3.1. 대내 정책2.3.2. 대외 정책
2.4. 사망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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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테말라의 정치인. 과테말라의 4대 대통령(1844~1848)과 8대 대통령(1851~1865)을 지냈다. 과테말라 보수주의의 핵심적인 인물로 정파에 따라 평가가 극명히 엇갈리는 인물이다. 또한 그런 정파적인 평가를 떠나 인생역정 자체는 대단히 드라마틱한 인물이기도 하다. 중앙아메리카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세력 간의 끝모를 투쟁에 휩싸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거나 몰락했는데, 카레라는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출세한 사람이면서 최고의 자리에서 안락하게 죽었다.

2. 생애

2.1. 청소년기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통치 끝물인 1814년 10월 24일 과테말라 도독령 과테말라시티의 칸델라리아(Candelaria)라는 동네에서 출생했다. 농장의 일꾼으로 일하다 1827~1829년 발발한 제1차 중앙아메리카 내전(Primera Guerra Civil Centroamericana)에 보수주의 세력 측으로 참전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한 이 전쟁에서 카레라는 원래 북 치는 고수를 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승진을 거듭했다. 전후 군을 제대하고 1835년 마타케스퀸틀라(Mataquescuintla)로 이주하여 돼지치기로 일하면서 페트로나 가르시아와 결혼했다.

2.2. 인생역전의 시작

1830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자유주의 대통령 프란시스코 모라산은 교회 추방과 재산 몰수 등 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1834년 공화국의 수도를 보수주의의 아성이었던 과테말라시티에서 자유주의의 아성인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로 옮겼다. 또한 과테말라국[3]의 수반(Jefe del Estado de Guatemala)으로 자유주의자인 마리아노 갈베스(Mariano Gálvez) 박사를 임명했다. 모라산의 조치는 과테말라 보수주의 세력 내에서 계층을 불문하고 극심한 저항을 일으켰다.

1837년 오늘날 멕시코의 치아파스 주로부터 과테말라의 남부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보수주의자들은 이 전염병을 두고 신앙심이 없는 자유주의자가 원주민을 말살할 목적으로 콜레라균을 살포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카레라는 원주민 농민들과 하급 성직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1838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자유주의 정부의 초토화 작전에도 불구 4월 13일 과테말라시티를 점령하여 과테말라의 정권을 잡았다. 인구의 과반이 거주하는 핵심국인 과테말라가 이탈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사실상 쭉정이만 남게 되었고 결국 1841년 수도 소재지인 엘살바도르마저 독립하면서 해체되었다.[4]

2.3. 과테말라의 통치자

카레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강경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로서 1840년 과테말라 내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고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1839년에 소집된 과테말라 의회는 자유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길드의 재건, 로마 가톨릭의 국교 선포 및 성직자들의 특권을 회복하면서 교육을 가톨릭 교회에 위임하였다. 한편, 1842년 멕시코측이 소코누스코 지역을 점령하여 이미 1824년에 멕시코 영토에 합병한 치아파스 지역의 일부라고 주장하여 양국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되었다.

카레라는 1844년에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되어 1847년 3월에 정식으로 과테말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중앙아메리카의 자유주의 잔존 세력은 그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카레라는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1848년 8월에 사임하여 멕시코에 망명했지만[5] 이듬해 귀국하여 자유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1851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1854년에는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종신대통령(Presidente vitalicio)으로 죽을 때까지 과테말라를 통치했다.

2.3.1. 대내 정책

카레라는 1865년 사망할 때까지 아이시네나 일족(Clan Aycinena)[6]의 협조 하에 자유주의자를 탄압하는 강력한 보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과테말라의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백인이 독점하던 정치와 군사 부문의 직책을 원주민과 메스티소에 개방했다. 행정적으로는 차상위 행정구역인 무니시피오[7]의 정부(Municipalidad)를 구성할 때 메스티소와 원주민을 혼합하되, 원주민의 요구가 있을 시에 메스티소와 별도로 원주민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카레라는 강경하고 잔인한 독재자였지만, 성직자와 상류층은 카레라 정권이 과테말라를 안정화하고 재산과 교회를 존중했다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다.

경제적으로는 1850년대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코치닐 염료의 재료인 쪽 농사가 큰 피해를 입자 대체 산업으로 커피 산업을 육성하였다. 또한 도로 건설에 주력하면서 국고의 공정한 사용 및 국가 부채의 청산에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종교적으로는 추방되었던 예수회를 다시 불러들이고 1852년 바티칸과 정교조약(Concordat)을 체결하였다. 해당 정교조약은 당시 과테말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성직자이자 학자 후안 호세 데아이시네나 이 피뇰(Juan José de Aycinena y Piñol)이 설계했는데, 정교조약에 따르면 과테말라는 가톨릭 교회를 국교로 하며 십일조를 의무로 하고, 과테말라인의 교육은 가톨릭 교회가 담당하고 주교들이 국내 출판물을 검열한다. 대신 가톨릭 교회는 1829년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몰수한 재산의 청구권을 포기하고, 교회에 대한 정부 과세를 인정하고, 과테말라의 법에 따라 성직자들이 저지른 범죄를 재판한다. 식민지 시대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일부 회복하는 동시에 가톨릭 교회과 국가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이 조약은 1871년 자유주의 세력이 혁명을 일으켜 집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3.2. 대외 정책

1856~1857년 윌리엄 워커가 일으킨 필리버스터 전쟁에 개입하여 필리버스터를 격퇴하고, 두 차례에 걸친 멕시코의 과테말라 병합 시도를 저지했다. 1859년에는 영국령 온두라스(현 벨리즈)와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의 확장 시도를 저지했다.[8] 또한 보수주의 세력의 중앙아메리카국 집권을 원조하기 위해 이들 국가의 내전에 자주 개입했는데, 단기적으로는 수차례에 걸쳐 이웃 보수주의 정권의 집권을 실현했으나, 장기적으로는 거의 어떠한 국익도 실현하지 못하면서도 이들 국가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여 발전을 저해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2.4. 사망

에스퀸틀라에서 휴식하는 중 오염된 음식을 먹는 바람에 1865년 4월 14일 과테말라시티에서 별세했다.[9] 죽을 때 남긴 유산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사후 같은 보수주의자인 비센테 세르나 이 세르나가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1871년 미겔 가르시아 그라나도스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가 영도하는 자유주의 세력의 혁명으로 실각했다. 1944년 혁명으로 호르헤 우비코가 실각할 때까지 과테말라는 이른바 자유주의 독재 시대를 겪게 된다.

3. 평가

카레라는 보수주의자에게 국가의 안정과 경제성장을 가져온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자유주의자에게는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쓸 줄 아는 반문맹이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해체시킨 주범으로 질시를 받는다. 중앙아메리카 역사 전문가 랠프 리 우드워드 주니어(Ralph Lee Woodward Jr.)는 카레라를 두고 과테말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가 일으킨 봉기를 단순히 보수주의자에 선동된 우매한 대중이 일으킨 폭동이 아니라 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항한 농민 대중의 성공적인 운동이었다고 본다.[10]
[1] 기초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이었으나 대통령이 되자마자 글 공부를 해 이름은 쓰거나 읽을 수 있었다.[2] 집권 후 십일조를 법제화하고 반가톨릭 행위를 규제하고 성직자에게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최초로 맺었던 곳이 카레라 집권기 과테말라이다.[3]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5개 구성국 가운데 하나로 현 과테말라의 전신이다.[4] 관점에 따라서는 각 구성국의 수반이 모두 공석이 된 1839년을 공화국의 해체일로 잡기도 한다. 해체년도를 무엇으로 잡건, 카레라가 반란을 일으켜 공화국을 멸망행 고속열차에 태운 확실하다.[5] 흥미롭게도 그가 몰아낸 마리아노 갈베스도 퇴임 후 멕시코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6] 오늘날 과테말라 정재계를 장악한 22대 가문은 모두 과거 과테말라 도독령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6대 일족(Aycinena, Arzú, Urruela, Díaz-Durán, Skinner-Klee, Castillo)에서 분화한 가문이다. 그 중에서 아이시네나 일족은 18세기 후반 염료 산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과테말라 최고의 부자 가문이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 과테말라를 주름잡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건만, 아이시네나 일족은 역사의 풍파를 이겨내고 21세기 지금도 과테말라의 정재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7] 일반적으로 "주"(州)로 번역되는 최상위 행정구역 데파르트멘토(Departamento)의 바로 아래 단위이다.[8] 영국의 벨리즈 영유를 인정하는 대가로 영국 자본을 도입해 과테말라시티와 벨리즈시티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기로 했으나 영국이 계속 건설을 미룬데다 보수주의 정권이 자유주의자에게 타도되면서 건설 계획도 나가리되고 말았다.[9] 바로 다음날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했다.[10] 실제로 카레라가 기존 원주민 공동체의 권리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한 것과 달리, 1871년 혁명으로 집권한 자유주의 세력은 원주민 공동체의 소유지를 몰수해서 모두 커피 농장으로 만들었다. 이들 원주민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백인 일색인 것과 달리 카레라는 메스티소였으므로 인종적으로도 더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