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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우비코


파일:과테말라 대통령기.svg
과테말라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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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공화국 제21대 대통령
호르헤 우비코
Jorge Ubico
파일:호르헤 우비코.jpg
<colbgcolor=#4997d0><colcolor=#fff> 본명 호르헤 우비코 카스타녜다
Jorge Ubico Castañeda
출생 1878년 11월 10일
과테말라 과테말라시티
사망 1946년 6월 14일 (향년 67세)
미국 뉴올리언스
재임기간 제21대 대통령
1931년 2월 14일 ~ 1944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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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997d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아르투로 우비코 우루엘라(1848~1927)
어머니 마틸데 카스타녜다 카스타녜다(1859~1906)
형제자매 1남 2녀 중 1남
누나 마리아 에스테르 우비코 카스타녜타(1876~1963)
여동생 마틸데 우비코 카스타녜다(1880~1904)
배우자 마르타 레인피에스타 도리온(1886~1976, 1905년 결혼)
복무 기간 1896년 ~ 1944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경력 토토포스테 전쟁
1921년 과테말라 쿠데타
정당 [[진보자유당(과테말라)|
진보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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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재임기2.2. 몰락
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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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테말라군인이자 제21대 대통령(1931~1944)이다. 그는 1871년부터 집권해온 과테말라 자유주의 독재정권의 마지막 독재자이다.

2. 생애

1878년 11월 10일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투로 우비코 우루엘라(Arturo Ubico Urruela)는 1871년부터 과테말라의 정계를 지배한 자유당(Partido Liberal) 소속 거물 정치인이자 부유한 대지주였다. 유학 후 귀국하여 사관학교(Escuela Politécnica)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1897년 과테말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는데 고속 승진하여 1906년에는 약관 28세에 이미 대령이 되었다. 이듬해 알타베라파스 주(Departamento de Alta Verapaz)의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1911년 레탈울레우 주(Departamento de Retalhuléu)의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 재임 시절 그는 학교와 보건시설을 비롯한 공공 인프라 개선과 청년조직을 위해 힘썼다. 1918년에는 늪지대를 간척하고 황열병 예방을 위해 무료료 의약품을 배급하여 미국의 윌리엄 크로포트 고르거스[1]의 칭찬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멕시코-과테말라 국경 지대에서 활개치는 도적떼를 효과적으로 토벌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20년 1월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 대통령에 의해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4월 8일 과테말라 국회에서 에스트레다 카브레라를 "정신적 무능자"로 선언하자 곧바로 자기도 에스트라다 카브레라의 "폭정"을 비난하면서 빠르게 손절했다. 1921년 호세 마리아 오레야나가 에스트라다 카브레라의 후임 카를로스 에레라 대통령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우비코는 오레야나 정권에서 전쟁부 장관(1922)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1926년 오레야나 대통령 사후 1926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 진보자유당(Partido Liberal Progresista) 후보로 출마했다.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이 선거에서 우비코는 득표율 11.39%에 그쳐 연합당(Partido Unionista)[2] 후보 라사로 차콘 곤살레스에 패배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한동안 야인으로 살다가 1930년 12월 차콘이 심장마비로 사임하면서 다시 정계에 진출했다. 차콘 사임 후 과테말라는 대공황과 재정위기로 상당히 불안정한 시대를 보냈다. 차콘의 대행 바우딜리오 팔마(Baudilio Palma)는 취임 4일만에 쿠데타로 쫓겨나 호세 마리아 오레야나의 사촌인 마누엘 마리아 오레야나(Manuel María Orellana)로 교체되었다. 당시 과테말라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과거 자기 회사에 특혜를 베풀어준 에스트라다 카브레라를 호세 마리아 오레야나가 축출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미국 정부에 오레야나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오레야나에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오레야나도 집권 2주일만에 1931년 1월 2일 퇴진했고 국회의 지명을 받은 호세 마리아 레이나 안드라데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맡았는데 사실상 우비코의 대통령 취임을 위한 구색맞추기 용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우비코는 정계에 적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연합당은 차콘 사임 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연합당에 가담하지 않은 자유당의 다른 인사들은 우비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1931년 2월 6~8일 열린 1931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자유당의 우비코가 유일 후보로 나서 100%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1. 대통령 재임기

우비코는 당대 라틴아메리카의 전형적인 권위주의 정치가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지극히 강권적이었으나 동시에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개발독재자였다는 말이다. 우비코는 집권 후 정부 요직에 우비코 추종자(Ubiquista)로 불린 자기 인사들을 배치하여 정부를 자기 수족처럼 부렸다. 또한 반대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탄압하고 의회를 사실상 거수기로 만들었다. 일부 정치범들은 재판 절차마저 생략하고 수도 근처로 끌고 가 처형했다. 언론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어 출판물은 하루 전까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우비코가 권위주의 정치가가 된 것은 어느 정도 시대가 요구하는 바였다. 우비코가 물려받은 과테말라는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공황과 정부 혼란의 여파로 파산 상태에 놓여 있었고 주력 상품인 커피 가격의 폭락으로 외화 조달도 급감한 상태였다.

따라서 우비코의 당면 과제는 국가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었다(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비코는 1931년 5월 2일 정직법(Ley de Probidad)을 제정하여 경리직 공무원들이 공직을 맡을 때 개인 재산을 밝히도록 했다. 재정을 긴축하고 정부의 부패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회계감사국(Contraloría General de la República)과 회계법원(Tribunal de Cuentas)을 설립하고 공금 횡령을 징역형으로 처벌했다. 또한 범죄 척결에도 노력하여 재임기에 범죄가 크게 줄었다. 대공황 가운데서도 지주들과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1934년 5월 7일 부랑자 척결법(Ley contra la Vagancia)을 제정, 전 대통령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가 제정한 1877년 일용노동자 규정(Reglamento de Jornaleros)을 폐지하고 해당 법안으로 대체했다.

부랑자 척결법은 1~5만사나[3]를 경작하는 원주민 농민에게 지주 소유지에서 최소 150일, 5만사나 이상 경작하는 농민에게 최소 100일의 의무 노동을 부과하고, 노동 여부를 증명하지 못한 농민은 "부랑자"로 간주하여 정부가 지정한 공공사업에 동원했다.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계약노동으로(원주민 농민들은 법적으로는 자기가 일하고 싶은 농장의 농장주와 "계약"하게 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채무노예제를 폐지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계약노동과 강제노동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우비코는 지주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허용하는 2795호 법령(Decreto 2795)을 공포하여 농장주들이 자기 농장에서 사실상의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우비코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의 재정문제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을 재건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우비코는 미국,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과 관계를 강화하는데 노력했다. 미국을 상대로는 1936년 상호무역조약을 체결하여 커피 수출을 늘렸다. 국제연맹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이유로 이탈리아를 비난했을 때 우비코는 국제연맹에서 자국 대표를 철수시켰다. 1937년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전 해 제정된 케찰 훈장(Orden del Quetzal)을 수여했다. 주과테말라 이탈리아 대사는 우비코의 고문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지지를 대가로 이탈리아로 면화 수출을 늘리고 무기를 공급받았다. 우비코는 커피와 목화의 수출 호조를 바탕으로 흑자재정을 이룩하고 대부분의 외채를 청산하여 대외 신용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흑자재정을 바탕으로 도로, 병원 등의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대통령궁(Palacio Nacional de Guatemala), 경찰본부, 우체국본부, 대법원 등 각종 관청들을 신축했다.

나치 독일은 19세기 말 과테말라로 이주하여 국내 커피산업을 장악한 독일인 때문에 그 전부터 이미 중요한 무역 상대였다. 과테말라의 커피는 독일인 지주와 가공업자들이 주로 생산했고, 유럽으로 수출되는 커피의 대부분은 독일계 상인의 손을 거쳤다. 우비코 재임기 3,000명에 달하는 독일인들은 2차대전 전까지 과테말라 내에서 실질적으로 면책 특권을 누렸다. 독일계 학교에서는 히틀러유겐트가 설립되어 나치식 경례가 시행되고 나치식 인종주의가 설파되었다. 독일인 커뮤니티는 히틀러의 생일과 집권일, 노동절[4]을 공공연히 기념했다. 우비코는 독일이 개입한 유럽의 문제에서도 독일과 호흡을 맞추어 히틀러를 기쁘게 했다. 스페인 내전 초기 1936년 11월에 이미 국민군 지도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부를 스페인의 유일 정부로 인정했으며 프랑코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1937년 히틀러는 우비코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두 지도자들의 우정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웃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한 외교에서는 엘살바도르와 있었던 일이 특기할만 하다. 엘살바도르도 과테말라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는 극소수 지주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절대다수의 농민들을 지배하며, 경제적으로는 커피 단작농업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국가였다. 1932년 공산주의자인 파라분도 마르티(Farabundo Martí)의 지도 하에 엘살바도르 서부의 농민들이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정부군에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일부 생존자는 과테말라 국경을 넘어서 피신했다. 이에 우비코는 양국의 국경을 봉쇄하고 월경자들을 모두 붙잡아 엘살바도르 측에 넘기는 한편 한편 국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5] 그 밖에도 이들 국가들과 국경분쟁을 해결하는데 노력하여 온두라스를 상대로 1933년 미국의 특별국경중재법원(Special Boundary Tribunal)의 중재를 거쳐 국경분쟁을 마무리 지었고,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938년에 약간의 영토를 할양받고 국경분쟁을 해결했다.

우비코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달 4일 과테말라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독일과 경제적으로 긴밀한 과테말라가 못미더웠던 미국은 과테말라의 독일인 소유 회사와 농장을 제재하여 노골적인 압력을 넣었다. 유럽 시장의 폐장으로 커피 수출이 어려워진 가운데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더 이상 미국의 인내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우비코도 같은 달 11일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과테말라에게 그나마 다행히도 독일이 구입하던 기존 커피 물량은 미국이 흡수해주었고, 대신 과테말라는 역내에 미 육군항공대 기지의 설치를 허가했다. 이후 과테말라 내의 독일인 소유 재산들은 모두 과테말라 정부에 몰수되었으며 일부 독일계 주민들은 미국을 거쳐 독일로 추방되었다.

2.2. 몰락

우비코는 상당한 경제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강권정치는 도시민의 불만을 크게 샀다. 1944년 6월 총파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과테말라시티 산카를로스 대학교(Universidad de San Carlos de Guatemala)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군부마저 지지를 거두자 우비코는 같은 해 7월 1일에 사임했다. 이후 에두아르도 비야그란 아리사(Eduardo Villagrán Ariza), 부에나벤투라 피네다(Buenaventura Pineda), 후안 페데리코 폰세 바이데스의 삼두정이 한동안 과테말라를 통치했다. 우비코는 퇴임 후에도 그의 아내와 함께 과테말라시티에 계속 살았지만, 1944년 10월 20일 삼두정마저 하코보 아르벤스 등이 일으킨 과테말라 혁명으로 축출되자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도피했다. 우비코는 1946년 6월 14일 그 곳에서 죽었다.

3. 평가

우비코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로 알려졌으며 이는 어느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독재자들 중에서 특히 잔인한 것은 아니었고 사회와 경제 분야는 분명히 업적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 독재자들이 그렇듯 명암이 극명히 엇갈리는 인물로, 그의 이미지는 반정부 인사들에 의해 어느정도 악마화된 감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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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나마 운하 건설의 의무지원을 총괄한 장군이다.[2] 자유당의 일파와 보수당(Partido Conservador)이 합당한 당으로 1920년대 활동하고 1930년 해산했다.[3] 만사나(manzana)는 면적의 단위로 1만사나는 약 0.69헥타르에 해당한다.[4] 나치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 노동절을 기념했다.[5] 1944년 마르티네스는 우비코와 마찬가지로 반정부 시위로 사임했다. 그는 1966년 망명지 온두라스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