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4:52

랄프 네빌(2대 네빌 남작)

성명 랄프 네빌
Ralph Neville
생몰년도 1291년경 ~ 1367년 8월 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더럼셔 라비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더럼셔 라비 성
아버지 라눌프 네빌
어머니 유페미아 드 클라버링
형제 로버트, 알렉산더, 존, 토머스, 아나스타시야 외 8명
아내 앨리스 드 오들리
자녀 , 캐서린, 알렉산더, 유페미아, 토마스, 로버트, 랄프, 엘레노어, 윌리엄, 마가렛, 엘리자베스, 이사벨라
직위 네빌 남작, 왕실의 세네샬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스코틀랜드 왕국을 상대했다.

2. 생애

1291년경[1] 잉글랜드 왕국 더럼셔 라비 성에서 제1대 네빌 남작 라눌프 네빌과 노섬벌랜드의 워크워스 영주 존 드 클라버링의 딸 유페미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로버트가 있었고, 동생으로 알렉산더, 존, 토머스, 아나스타시야 외 7명이 있었다.

1318년 스코틀랜드군이 점령한 베릭을 탈환하기 위한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참여했지만, 그해 6월 6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친구이자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제임스 더글러스의 급습을 받고 형 로버트는 전사했고, 그와 알렉산더, 존 형제는 체포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빌 삼형제의 몸값으로 2,000마르크를 요구했다. 아버지 라눌프 네빌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아들들의 몸값을 지불하기엔 자신이 너무 가난하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몸값을 지불하는 걸 도와줬음을 암시하는 기록은 없다.

언제 풀려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321년에 자유의 몸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해에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가신으로서 셔번 조약에 서명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322년 토머스가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했지만 그해 3월 22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이 참패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후 왕에게 항복했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 보내졌다. 1322년 워크워스 성주로 선임되었고, 1325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326년 9월, 에드워드 2세의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 로저 모티머가 프랑스에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그는 현제들과 함께 이들에 가세해 에드워드 2세의 폐위에 기여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제 권력은 이자벨 여왕과 로저 모티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1330년 10월 이자벨과 모티머를 축출하기 위한 에드워드 3세의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332년 1월, 랄프는 제2대 퍼시 남작이자 피커링 성과 스카보로 마을과 성의 총독인 헨리 퍼시에게 20명의 전사와 함께 평생 그를 따르겠다고 약속해고, 그 대가로 노섬벌랜드에 있는 퍼시 남작령의 뉴번을 수여받았다.

1333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히기 위한 에드워드 3세의 원정에 가담했다. 그는 제1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베릭어폰트위드 마을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군 20,000명이 베릭에서 3.2km 떨어진 할리돈 힐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자, 잉글랜드군은 그들을 물리치러 이동했다. 1333년 7월 19일에 벌어진 할리돈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장궁병과 기사들의 활약 덕분에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할리돈 힐 전투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베릭 수비대가 출격하지 않도록 배치된 분견대의 일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릭 요새 수비대는 전투 다음날 항복했다.

이후 랄프는 스콘(1333년 10월)과 에든버러(1334년 2월)에서 소집한 스코틀랜드 의회에 특사로 파견되어 새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스코틀랜드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기고, 발리올은 에드워드 3세의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을 잉글랜드로 이전하는" 록스버그 협정을 이행하라는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전달했다. 1334년 8월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물자 수송 감독관을 역임했고, 1335년 8월 29일에는 뱀버러 성의 종신 성주 직위를 받았다. 1334년 가을 베너렛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334년 11월부터 1335년 2월까지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고자 60명의 맨앳암즈와 40명의 기마 궁수를 이끌었다. 또한 1335년 6월부터 9월까지 85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한편, 랄프는 1333년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사망한 후 새로운 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더런 교구의 세속적 소유물을 관리했다. 1334년 3월 남동생 토머스가 더럼 주교로 선임되었는데, 그가 그렇게 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1336년 노섬벌랜드의 바이웰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사실 그는 어머니의 형제인 존 피츠로버트 클라버링이 소유했던 워크워스 성을 물려받기를 희망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워크워스 성을 퍼시 남작령에 양도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 북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에게 영지를 내려줌으로써 그들의 호의를 사는 동시에 서로 경쟁을 붙여서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렸다고 추정한다.

1338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착수한 뒤, 그는 잉글랜드의 세네샬(Senechal: 통치 대리인)로서 왕을 대신해 잉글랜드 행정을 도맡았다. 또한 헨리 퍼시와 함께 왕의 사령관으로서 스코틀랜드 국경지대 방어를 담당했다. 1346년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연이은 요청에 응해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그는 그해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군을 요격해 대승을 거두고 데이비드 2세를 생포했다.

1355년 베릭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으며, 버리의 리처드 주교의 유언 집행자들로부터 받은 성인의 모습이 수놓인 빨간 벨벳 의복을 더럼 대성당에 선물했다. 그러면서 더럼 수도원장에게 자신과 아내 엘리스 드 올드리가 대성당의 본당에 묻힐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1367년 8월 5일에 사망했고, 생전의 요청대로 더럼 대성당의 본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출생년도는 기록상에 전해지지 않으나, 1331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40세를 갓 넘겼다는 기록이 있기에, 학자들은 이때 태어났을 것이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