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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13 06:09:22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colbgcolor=#D9C0BF><colcolor=#000>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Edmund, Earl of Rutland
파일: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png
이름 에드먼드 플랜태저넷
(Edmund Plantagenet)
출생 1443년 5월 17일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루앙
사망 1460년 12월 30일 (향년 17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웨이크필드
아버지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어머니 세실리 네빌
형제 앤, 에드워드 4세, 엘리자베스, 마거릿, 조지, 리처드 3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요크 왕조의 일원. 장미 전쟁 시기인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인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 리처드 3세의 형제이다.

2. 생애

1443년 5월 17일, 당시 노르망디 총독이었던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인 세실리 네빌의 세번째 아들로 노르망디 공국의 주도인 루앙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보다 한 살 많은 형 에드워드와 함께 자랐으며, 1451년 아일랜드 총독 직함을 지녔던 아버지에 의해 아일랜드 대법관에 선임되었다. 다만 당시 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대법관인 미스 주교 에드먼드 올드홀이 1454년까지 직무를 수행했고, 제2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가 뒤이어 부대법관으로서 에드먼드를 대신해 직무를 수행했다.

16살 때인 1459년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 참여했다가, 헨리 6세에게 맞서기를 꺼린 군대가 와해하자 아버지와 함께 아일랜드로 망명했다. 1460년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10월 10일 아버지가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과 성직자들 앞에서 왕좌에 손을 얹으며 왕이 될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들이 헨리 6세를 폐위하는 걸 강하게 거부했기에 무산되었고, 리처드는 그 대신 사생아로 격하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1460년 12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받든 랭커스터군이 요크 공작령을 약탈하고 파괴하자, 요크 공작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런던에서 북상했다. 이때 에드먼드도 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했다. 12월 21일, 요크 공작 리처드와 에드먼드는 요크셔의 웨이크필드 시 인근 킬더 강 남쪽의 샌달 성에 도착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랭커스터군과 함께 웨이크필드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폰트프랙트 성에서 성탄절를 보냈다. 그 직후, 그녀는 요크 공작을 물리치기 위해 웨이크필드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공성 병기가 딱히 없었고, 때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녀가 요크 공작이 있는 샌달 성을 공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파일:러틀랜드 백작의 살인.jpg
찰스 로버트 레슬리(Charles Robert Leslie, 1794 ~ 1859) 작, 러틀랜드 백작의 살인.

그런데 요크 공작은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티지 않고 회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이리하여 1460년 12월 30일에 벌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군은 압도적인 군세를 앞세운 랭커스터군에게 섬멸되었고, 샌달 성은 무력하게 함락되었다. 이때 에드먼드는 가정교사와 함께 웨이크필드 다리를 건너 탈출을 시도했지만, 제9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붙잡혔다. 에드먼드는 클리퍼드 경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이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아버지 토머스 드 클리퍼드가 전사한 것에 대한 클리퍼드 경의 복수였을 것이다.

그 후 요크 공작 리처드, 러틀랜드 백작,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등 요크군 수뇌부의 수급이 요크 성의 미클게이트에 전시되었다. 이 수급 밑에는 "요크가 요크 마을을 내려다보게 하라"는 표지판이 세워졌다고 한다. 나중에 에드워드 4세가 요크 성을 탈환한 뒤 아버지와 남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폰트프랙트 수도원에 안장했다. 이들의 유해는 1476년 7월 29일에서 30일 사이에 포더링헤이 성의 가족 납골당에 이장되었다. 에드먼드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