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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colcolor=#001F7E>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Edward of Westminster, Prince of Wal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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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Edward of Westminster) |
출생 | 1453년 10월 13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 |
사망 | 1471년 5월 4일 (향년 17세) |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튜크스베리 | |
배우자 | 앤 네빌 (1470년 결혼) |
아버지 | 헨리 6세 |
어머니 | 앙주의 마르그리트 |
종교 | 가톨릭 (세례명:에두아르도) |
1. 개요
잉글랜드의 왕족.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외아들이다.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왕자이자 역대 웨일스 공(영국 왕세자) 중 유일하게 전투에서 사망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453년 10월 1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왕자의 탄생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축일과 겹쳤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에드워드로 정해졌다. 그는 아버지 쪽으로는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손자였고, 어머니 쪽으로는 앙주 공작이자 명목상 나폴리 국왕인 앙주의 르네와 로렌 여공작인 로렌의 이자벨의 외손자였다. 그는 부계로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곤트의 존을 통해 랭커스터 왕조에 속했다. 에드워드는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에게 세례를 받았고, 잉글랜드 추기경 존 캠프가 대부를 맡았고, 버킹엄 공작부인 앤 네빌이 대모를 맡았다.에드워드 왕자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동시대 사료에 따르면, 1454년 1월 에드워드 왕자가 윈저 성으로 인도되어 왕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소개되었지만, 헨리 6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정신 질환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궁정 신하들은 그가 아이를 가질 상태가 아니라고 믿었고, 새로 태어난 왕자는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제5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 또는 다른 귀족이 왕비와 불륜 관계를 맺어서 낳았다고 믿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태어날 때부터 콘월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1454년 3월 15일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6월 9일에는 윈저 성에서 웨일스 공으로서 서임식에 참석했다. 이 무렵,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앙주의 마르그리트는 왕의 병환 동안 왕권을 행사할 권리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해 경쟁했다. 영주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를 왕위 계승자이자 웨일스 공으로 인정했지만, 3월 28일에 왕의 병환 또는 왕이 회복하지 못하거나 사망할 경우 왕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요크 공작이 호국경을 맡게 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동시에, 의회는 어린 왕자의 하인 수를 39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요크 공작은 자신의 정적인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체포해 런던 탑에 보냈다.
1454년 성탄절 무렵, 헨리 6세의 병세는 호전되었고, 아들을 다시 만났다. 왕은 왕자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왕비가 "에드워드"라고 대답하자 헨리 6세는 하늘로 손을 들고 신에게 감사했다. 이후 헨리 6세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요크 공작을 호국경에서 해임하고 서머셋 공작을 런던 탑에서 풀어준 뒤 칼레 총독에 복귀시켰다. 이후 서머셋 공작은 왕비의 지원을 받아 "적들로부터 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해, 리처드 파벌을 대대적으로 탄핵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요크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하면서,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2.2. 장미 전쟁 초기의 행적
1455년 5월 22일,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왕을 호위하던 왕실군을 기습 공격해 섬멸하고 서머셋 공작을 사살했다. 헨리 6세는 호위병에게 버림받은 뒤 벌판에서 또다시 광기에 걸려 발작하다가 요크군에게 확보되었다. 요크 공작은 헨리 6세를 세인트 올번스 교회 예배당으로 데려간 뒤 자신이 그의 충성스러운 신민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 후 요크 병사들은 세인트 올번스 시를 온종일 약탈하다가 요크군 장성들의 제지를 받고 중단했다. 그 후 요크 공작은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런던으로 향했다. 그 후 의회를 소집해 헨리 6세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호국경으로 취임하고, 추종자들에게 여러 요직을 수여했다. 또한 워릭 백작과 함께 런던에 성가대 예배당을 지었고, 그곳에서 한 사제가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매일 기도하도록 했다.이리하여 요크 공작이 실권자로 우뚝 서는 듯 했지만, 그는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리처드에게 원한을 품은 보퍼트 파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요크 공작을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이렇듯 상황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에드워드 왕자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1456년 11월 12일, 왕실 궁정은 그가 8살이 될 때까지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에서 매년 1,000파운드를 받아 왕자의 생계를 유지하기로 했으며, 에드워드가 14살이 될 때까지 왕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에드워드는 이 기간 동안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종종 아들을 미들랜드와 체셔로 데려갔다. 그는 권력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어머니와 거의 항상 함께 있었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은 에드워드가 헨리 6세의 아들이 아니며, 마르그리트 왕비가 한 귀족과 불륜 관계를 맺어서 낳은 아들인 게 분명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1457년 1월 28일, 에드워드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도록 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실제 통치는 대부분 마르그리트 왕비에 의해 행사되었다. 1458년 가을, 정부는 에드워드와 프랑스 왕국 또는 부르고뉴국의 공주 사이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에드워드가 미들랜드에 머물렀고, 마르그리트가 광대한 인맥을 동원해 미들랜드 지역을 장악한 덕분에, 1459년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때 미들랜드에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미들랜드 지역군은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 전투 때 웨일스 공의 제복을 입었다. 1459년 10월, 랭커스터군은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 11월, 의회가 코번트리에서 소집되어 요크 공작과 그의 추종자들을 규탄하고, 그들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했다. 또한 영주들은 그 자리에서 웨일스 공 앞에 무릎을 꿇고 미래의 군주로서 충성을 서약하며, 그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460년 초, 에드워드는 고식적으로 웨일스와 체셔 방어 위원회에 선임되었다.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이 패배했고, 헨리 6세는 요크군에게 생포되었다. 당시 헨리 6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아내와 아들을 코번트리에 남겨두고, 자신들만 아는 암호가 적힌 메시지를 받을 때까지 마르그리트와 에드워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후 남편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르그리트는 아들을 데리고 요크 가문에 계속 항전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먼저 체스터로, 그 다음엔 웨일스로 도주한 뒤 하를레크 성으로 피신했다. 1460년 10월 25일, 의회는 헨리 6세가 왕위를 유지하되 에드워드 왕자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요크 공작과 그의 후손을 왕의 상속인으로 선포했다. 동시에 요크 공작은 웨일스, 체스터, 콘월에 있는 에드워드의 영지를 받았는데, 그 수입은 연간 1만 마크에 달했다. 이에 마르그리트와 에드워드는 런던으로 항의서를 보내 요크 공작을 비난하고, 헨리 6세의 석방이 이뤄질 때까지 항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에드워드는 어머니와 함께 비밀리에 하를레크 성을 떠나 헨리 6세의 이부 형제인 재스퍼 튜더와 합류했다. 이후 헐에서 추종자들과 접촉해 앞으로 어찌할지 논의한 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여행했다. 1460년 12월, 마르그리트 왕비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요크 공작의 영지를 파괴했다. 이에 요크 공작이 진압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참패하고 차남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1461년 1월 5일, 에드워드와 그의 어머니는 린클래드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 왕비이자 섭정인 헬러의 마리아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국경 도시인 베릭을 스코틀랜드에 넘기고,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3세의 여동생 메리 사이의 결혼 동맹을 대가로 스코틀랜드군을 지원받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군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은 마르그리트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진홍색과 검은색 줄무늬에 타조 깃털을 두른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1461년 2월 17일, 랭커스터군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끄는 요크군을 격파했다. 헨리 6세는 전장에서 가족과 재회하여 아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에드워드는 다시 앤드류 트롤로프 등 여러 사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다음날, 당시 7살이었던 왕자는 토머스 키리엘과 윌리엄 본빌에 대한 법정을 열었고, 이들은 곧 처형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마르그리트는 왕자에게 토머스 키리엘과 그의 아들을 어떻게 처형할지 물었고, 에드워드는 참수를 제안했다고 한다. 또다른 사료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가 왕비의 동의를 받지 않고 처형을 독단적으로 집행했고, 마르그리트는 나중에 이를 알게 되자 경악했다고 한다. 반면에, 일부 사료는 토머스 키리엘의 아들의 운명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아버지 토머스 키리엘은 전장에서 죽었으며, 에드워드 왕자는 윌리엄 본빌만 처형했다고 밝혔다.
2.3. 토우턴 전투와 해외 망명 생활
랭커스터군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으로 진군할 수 있었지만, 런던 시민들은 랭커스터군의 심각한 약탈 행진에 깊은 반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런던 시민들의 동향을 전해듣고, 런던으로 진군하는 걸 망설였다. 여기에 더해,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랭커스터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물러나기로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스코틀랜드인과 변경 영주들이 이미 모은 전리품을 가지고 전력에서 이탈했다.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워릭 백작과 합세한 뒤 1461년 3월 2일 런던에 입성했다. 그는 런던 시민들이 스코틀랜드인들과 결탁하여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각지에서 자행한 랭커스터파에게 매우 적대적인 것을 확인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즉각 회의를 개최했다. 워릭 백작의 형제인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이 왕위를 계승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등극했다. 다음날 네빌가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헨리 6세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무기를 들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왕위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고 발표함으로써 그의 직위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에는 2명의 왕이 존재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즉위 후 헨리 6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한 랭커스터 파 인사에게 사면하겠다고 선언한 후, 워릭 백작의 군대와 자기가 이끌고 있는 군대, 그리고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과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등 강력한 영주들과 합세한 뒤, 요크셔의 에어 강 너머에 자리잡은 랭커스터 진영을 향해 북상했다. 그 후 1461년 3월 29일에 벌어진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은 에드워드 4세의 요크군에게 궤멸되었다. 승리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으로 돌아간 뒤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1461년 11월 또는 12월 16일 의회를 소집해 랭커스터 왕조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부모와 함께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피신한 뒤 에든버러에서 지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남편을 왕위에 복위시키고 아들의 왕위 상속권을 확보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쉼 없이 노력했다. 14652년 6월 26일, 마르그리트는 에드워드 4세에 맞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칼레를 플아스에 양도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루이 11세는 마르그리트에게 함대를 줬고, 그녀와 에드워드 왕자는 이 함대를 타고 노르망디에서 항해하여 10월에 스코틀랜드에 상륙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재결성한 랭커스터군은 노섬벌랜드의 뱀버러 성과 던스턴버러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를 추종하는 영주들이 반격하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 했는데, 마르그리트와 에드워드 왕자는 도중에 길을 잃고 몇 주간 해안을 따라 방황했다. 그러다가 산적에게 붙들렸지만 그들을 알아본 한 산적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고, 헨리 6세가 숨어있던 웨일스로 이동했다. 여러 연대기 작가는 이들이 이 기간 동안 청어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었다고 밝혔다. 1462년 후반, 마르그리트와 에드워드 왕자는 뱀버러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를 떠났다. 두 사람은 슬로이스에 상륙한 뒤 샤롤레 백작 샤를과 만났고, 샤롤레 백작의 안내로 브뤼헤 또는 릴로 안내되어 백작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대면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두 사람을 로렌에 있던 마르그리트의 아버지인 앙주의 르네와 합류하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외할아버지와 만난 에드워드는 어머니와 함께 앙주 궁정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다시 프랑스 왕의 지지를 받고자 프랑스로 이동했다. 한편, 그의 아버지 헨리 6세는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도피하다가 이 무렵에 끝내 체포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1463년 8월, 마르그리트와 에드워드는 프랑스와 부르고뉴가 에드워드 4세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플랑드르로 갔다. 이후 1463년 9월부터 1470년까지 앙주의 르네가 소유했던 프랑스의 상 미셸 드 바로야 인근 쾨르 성에 머물렀다. 그들은 그곳에서 작은 궁정을 조직했는데, 잉글랜드에서 망명한 인사들이 궁정 관리로 활동했다. 또한 에드워드는 어머니와 함께 친척들 중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을 모집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여러 곳에 보냈다. 제6대 오몽드 백작 존 버틀러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가 랭커스터 왕조에 호의적이라고 전했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포르투갈까지 가고 싶지 않아서 그와 접촉하길 꺼렸다. 1470년, 에드워드는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의 대부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쾨르 성에서 잉글랜드 법정 변호사, 정치 사상가이자 정치가 존 포르테스큐의 지도를 받으면서 지적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동안 겪은 고난 탓에 매우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1467년 프랑스 주재 밀라노 대사는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에게 서신을 보내 왕자의 성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13세의 에드워드 왕자는 마치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전쟁의 신인 것처럼, 평화롭게 [잉글랜드] 왕좌를 차지한 것처럼, 목을 베고 전쟁만 하는 아이입니다.
존 포르테스큐는 훗날 에드워드 왕자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어른이 되자마자 군사 훈련에 완전히 몰두했다. 그는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타고 박차로 길들인 채, 자신을 찾아온 어린 동료들과 공격하고 싸우는 것을 종종 즐겼다.
2.4. 잉글랜드 귀환과 최후의 전쟁
1470년, 마르그리트 왕비는 루이 11세의 중재를 통해 에드워드 4세와 갈등을 벌이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1470년 7월 15일 또는 25일, 그들은 앙제에서 회담을 갖고 에드워드 왕자가 워릭 백작의 막내딸 앤 네빌과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워릭 백작은 그 대가로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하고 헨리 6세가 복위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왕자와 앤 네빌의 약혼식은 1470년 7월 앙제에서 열렸으며, 결혼식은 12월 13일 앙부아즈 성에서 열렸다.워릭 백작은 딸의 약혼 직후 마르그리트의 지시에 따라 결혼식을 기다리지 않고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마르그리트는 아들이 워릭 백작과 함께 잉글랜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워릭 백작이 단독으로 헨리 6세를 복위하라도록 했다. 그녀의 계획에 따르면, 헨리 6세가 왕위에 복귀하면 에드워드 왕자가 무능력해진 아버지의 섭정을 맡을 것이었다. 1470년 10월,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출항이 1471년 3월로 지연되었다.
1471년 3월 24일, 마르그리트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몽플로르에서 출항하여 12시간 만에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했지만, 역풍이 불면서 도로 돌아가야 했고, 4월 14일 늦은 저녁에야 웨이머스에 상륙했다. 그들이 웨이머스에 상륙한 날, 워릭 백작은 바넷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4세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며칠 후,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그들과 합류한 뒤 바넷 전투 소식을 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절망에 빠져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지만,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구하고 에드워드 4세를 타도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서머셋 공작도 왕자의 뜻에 동의했다. 결국 마르그리트 왕비는 운명을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원정을 지속하는 데 동의했다. 그 후 랭커스터 가문 귀족들이 병력 상당수를 이끌고 합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북쪽으로 진군해 웨일스로 건너가 재스퍼 튜더와 합류하려 했다. 한편, 바넷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군대를 상당 부분 영지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마르그리트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의 상륙 소식을 접하자 런던 서쪽의 윈저로 군대를 다시 집결시켰다. 랭커스터군은 런던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움직임을 보이며 에드워드 4세를 속이고자 했지만, 에드워드 4세는 이에 넘어가지 않았고, 마르그리트가 웨일스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윈저를 떠나 서쪽으로 맹렬히 진군했다.
랭커스터군은 1471년 4월 30일 바스에 도착했고, 인근 브리스톨에서 대포와 일부 지원군을 확보했다. 이후 인근에 도착한 에드워드 4세의 요크군과 소드베리(Sodbury) 언덕에서 전초전을 벌였다. 에드워드 4세는 본격적인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긴 행군으로 피곤했던 그의 군대에게 휴식을 주었다. 하지만 랭커스터군은 야간 행군으로 에드워드 4세를 따돌리고 5월 2일에는 에드워드 4세보다 약 24km 정도 앞서게 되었다. 랭커스터군이 웨일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웨일즈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세번 강을 어떻게든 건너야 하는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4세는 세번 강에 인접한 요충지 글로스터의 행정관 리처드 보챔프에게 전령을 보내 랭커스터군의 통과를 막도록 했다. 글로스터를 향해 밤새도록 행군한 랭커스터군은 1471년 5월 3일 아침 글로스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글로스터를 통과해 세번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글로스터에 주둔한 수비대는 이들에게 성문을 개방하길 거부하고 방비에 착수했다.
에드워드 4세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기에 포위 공격은 불가능했던 랭커스터군은 다른 곳에서 세번 강을 건너기로 하고 북동쪽으로 16km를 더 행군했다. 이 과정에서 랭커스터군은 요크군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 대포를 포기해야 했고, 이들은 글로스터에서 출발해서 북상한 요크군 지원군의 손에 떨어졌다. 5월 3일 늦은 오후, 랭커스터군은 튜크스베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번 강을 건너려면 로어 로드 포드를 거쳐야 했는데, 이곳은 튜크스베리 수도원에서 하류로 1마일 떨어진 곳, 에이번 강과 합류하는 지점 아래에 있었다.
당시 더운 날씨로 인해 랭커스터군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을 만큼 지쳤고, 강을 건너는 도중에 에드워드 4세의 군대에게 붙잡히면 궤멸될 수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서머셋 공작은 다음 날인 5월 4일에 적군이 접근해오면 더 이상 도주하지 말고 전투를 벌이고, 그렇지 않으면 행군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에드워드 4세의 요크군 또한 50km 이상의 긴 행군을 거쳐 지쳐 있었지만, 랭커스터군에 비해 기병 및 하마보병의 비중이 높아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에드워드 4세는 첼트넘에서 10km를 더 행군하여 랭커스터군에 5km 이내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랭커스터군은 별 수 없이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제임스 노스코트(James Northcote, 1746 ~ 1831) 작, <웨일스 왕자 에드워드의 살해>.
이리하여 1471년 5월 4일에 벌어진 튜크스베리 전투는 에드워드 4세의 뛰어난 지략에 휘말린 랭커스터군의 완패로 끝났다. 랭커스터군 총사령관 서머셋 공작은 인근 수도원으로 도피했다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전투 다음 날 세번 강을 건너 탈출한후 숲길을 따라 도주했다가, 도중에 추격병에게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패주 도중 적의 추격을 받고 사살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옛 동지였다가 에드워드 4세에게 가담한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클래런스 공작과 그의 부하들이 전투 후 숲속에서 슬픔에 잠긴 에드워드 왕자를 발견하고, 왕자의 간청을 무시하고 임시 방편으로 만든 블록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튜더 왕조 시기에 발간된 에드워드 홀의 <런던 대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가 체포되어 에드워드 4세와 클래런스 공작, 글로스터 공작 앞으로 끌려왔다. 에드워드 4세는 왕자를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왜 자신을 상대로 무기를 들었는지 물었다. 왕자가 도전적인 태도로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당신에게 도전했다."라고 답하자, 에드워드 4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왕자의 얼굴을 때렸고, 글로스터 공작과 클래런스 공작이 검으로 왕자를 죽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인 <헨리 6세>에서 극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튜더 왕조가 요크 왕조를 잔인무도한 정권으로 매도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한다. 에드워드 왕자의 시신은 튜크스베리 수도원에 묻혔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에드워드 4세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간 뒤 런던 탑에 수감되어 5년간 유폐되었다가 루이 11세가 몸값을 지불한 뒤 풀려났고, 앙주로 돌아가서 1482년 사망할 때까지 조용히 지냈다. 한편, '포콘버그의 서자'로 알려진 토머스 네빌이 1471년 5월 12일 ~ 5월 15일 런던 탑에 수감된 헨리 6세를 구출하기 위해 급습했지만 격퇴되었다. 헨리 6세는 그 직후 사망했는데, 정황상 에드워드 4세가 은밀히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했던 앤 네빌은 튜크스베리 전투 후 포로로 잡혀 있다가 1472년 에드워드 4세의 남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결혼해 외아들 미들햄의 에드워드를 낳았고, 1483년 남편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로 등극했을 때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3. 여담
- 영화 리처드 3세에서는 30대 나이로 등장, 아버지와 함께 사령부에서 지휘하다 사령부를 T-55 전차를 몰고 급습한 리처드 3세에게 아버지와 함께 사살당한다.
- 만화 장미왕의 장례 행렬에서 리처드 플랜태저넷을 여자로 알고 짝사랑하는 인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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