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7:11:44

존 모브레이(제3대 노퍽 공작)

성명 존 모브레이
John Mowbray
생몰년도 1415년 9월 12일 ~ 1461년 11월 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퍽셔 셋퍼드
아버지 존 모브레이
어머니 캐서린 네빌
아내 엘레노어 부르시에
자녀 존 모브레이
직위 노퍽 공작, 잉글랜드 백작 원수,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
2.1. 모브레이 가문2.2. 초년기2.3. 군사 및 정치 활동2.4. 장미 전쟁 시기의 행적
3. 이후의 이야기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으며, 장미 전쟁에서 오랫동안 간을 보다가 요크 왕조의 편에 섰다.

2. 생애

2.1. 모브레이 가문

모브레이 가문의 창시자는 쿠탕스의 주교였던 조프루아 드 몽프뢰유였다. 그는 본래 코탕탱 반도 남부 생 로시 남쪽에 있는 몽프뢰유 성을 근거지로 삼은 가난한 기사 가문 출신으로,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최측근이 된 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국가의 전반적인 행정을 이끌었다.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주로 서머셋과 도셋에 약 280개의 저택이 있는 광범위한 영지를 윌리엄 1세로부터 수여받았다고 한다.

1093년 조프루아가 사망한 후, 이 땅은 1086년부터 노섬브리아 백작을 역임했으며 북부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봉건 영주였던 조카 로버트 드 몽프뢰유에게 넘어갔다.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국경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잉글랜드 왕실에 반복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095년 윌리엄 2세에 대항한 앵글로-노르만 남작들의 반란의 지도자였지만, 반란은 끝내 실패했고 모든 작위와 영지를 박탈당했다. 그는 수도자가 된 뒤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115년경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로버트 드 몽프뢰유의 미망인인 미탈다 드 라글은 1107년경 나이젤 도버니와 재혼했다. 나이젤의 어머니는 조프루아 드 몽프뢰유의 자매였던 아미시아였다. 나이젤과 마틸다의 아들 로저 도버니는 몽프뢰유라는 성을 이어받아서 몽프뢰유 제2가문의 창립자가 되었고, 몽프뢰유는 나중에 모브레이로 변형되었다. 이후 로저의 후손들은 대대로 잉글랜드 북부의 영주로서 영향력을 키웠다. 로저의 손자 윌리엄 모브레이는 존 왕에 대항하는 남작들의 반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마그나 카르타를 창안하고 왕에게 서명을 강요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윌리엄 모브레이의 아들 로저는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 때 왕실을 지지했고, 손자 로저는 1295년 모브레이 남작 칭호를 최초로 수여받았다.

제2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는 요크셔와 요크의 주지사를 맡았으며, 1313년 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의 관리인을 역임했다. 또한 브라오스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서부 웨일스의 가워 및 쳅스토, 서식스의 브람버 성을 영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1322년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한 남작 반란에 참여했다가 왕실군에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그동안 모았던 가문의 영지와 작위는 왕실에 몰수되었다. 1327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는 제2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의 아들로 이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던 존 모브레이를 석방하고 작위와 영지를 돌려줬다. 제3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는 에드워드 3세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으며,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완파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를 생포하는 데 기여했다.

제4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어린 아들인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의 손녀와 결혼해 노퍽, 서퍽에 있는 비고트 가문의 광대한 영지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모브레이 가문은 남작에서 벗어나 백작 작위를 요구할 자격이 있게 되었다. 제4대 모브레이 남작의 장남 존 모브레이는 1377년 노팅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막내 토머스 모브레이는 1397년 노퍽 공작 작위를 받고 잉글랜드 백작 원수를 세습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토머스 모브레이는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리처드 2세의 총신의 전횡으로 국정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며 불만을 제기한 청원파의 일원이었다. 1388년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함께 반기를 들어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리처드 2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 북부 국경의 방어를 이끌었다. 1391년 칼레와 잉글랜드령 피카르디, 플란데런, 아르투아의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며,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과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397년 리처드 2세가 리처드 피츠앨런, 토머스 뷰챔프,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숙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칼레에서 피살당하는 데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1398년 1월 30일,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모브레이가 청원파의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선임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398년 4월 29일 윈저 성에서 결성되었고, 그곳에서 헨리와 모브레이가 조우했다. 모브레이는 자신이 청원파에 가담한 일은 이미 왕에게 사면받았는데, 이제와서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리 없다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이 왕에게 나쁜 조언을 제공하고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암살한 것을 포함해 왕국의 많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결투 재판을 통해 진위를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투 재판은 9월 17일 코벤트리에서 열리기로 했다.

1398년 9월 17일, 잉글랜드 각지에서 몰려든 기사, 시민, 숙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투 재판이 열렸다. 대중은 환호로 두 공작을 맞이했다. 이때 왕이 돌연 개입해 지팡이를 던져 결투를 중단하게 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왕은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모브레이의 모든 영지는 칼레 대장 및 잉글랜드 원수 직위와 함께 몰수되었고, 모브레이는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베네치아에 지내다가 1399년 9월 22일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1399년 10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로 몰래 돌아와서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로 등극했다. 헨리 4세는 토머스 모브레이의 장남 토머스에게 노퍽 백작과 남작위를 상속하도록 허용했지만, 노퍽 공작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토머스는 헨리 4세를 타도할 음모에 가담했다가 1405년 6월 발각되어 20세의 나이에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토머스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토머스의 동생 존 모브레이가 모브레이 가문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후 존 모브레이는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1425년 노퍽 공작 작위를 돌려받았다. 그의 외아들인 존 모브레이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2.2. 초년기

존은 1415년 9월 12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였고, 어머니는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 캐서린 네빌이었다. 1426년 5월 19일 헨리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43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모든 직함과 영지를 물려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에 불과했기에,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그의 재산을 일시적으로 관리했으며, 그의 후견자로서 결혼을 주선할 권리도 확보했다.

존의 아버지는 모브레이 가문 재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가문 재산의 3분의 2가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부인이자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피츠앨런, 그리고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형 토머스 모브레이의 미망인이었던 콘스탄스 홀랜드가 과부의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1425년에 사망했지만,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사후 영지의 3분의 1이 어머니 캐서린 네빌에게 넘어가면서 상황이 반복되었다. 존은 1437년에 이모 콘스탄스의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어머니 캐서린 네빌은 기사 토머스 스트랭웨이즈, 초대 보몬트 자작 존 보몬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인 존 우드빌과 잇따라 결혼했고, 존이 사망한 지 20여 년이 흐른 1483년까지 생존했다.

존이 직접적으로 가진 영지는 링컨셔에 집중되었고, 노퍽에 몇 개의 부동산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권력은 공식적인 지위와 일치하지 않았고,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되었으며, 응집력 있는 가신과 추종자 그룹을 모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영지를 늘리기 위해 할머니 엘리자베스가 피츠앨런 가문의 일원이었던 점을 근거로 삼아 아룬델 백작을 포함한 피츠앨런 가문의 영지와 작위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1433년 7월 의회에 이와 관련된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의회에 출석한 귀족들은 다른 피츠앨런 가문 인사들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기에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존이 장미 전쟁 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2.3. 군사 및 정치 활동

1434년 왕실 추밀원에 포함된 그는 1436년 성년이 되자마자 군사 경력에 뛰어들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게 포위된 칼레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은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의 부관으로서 칼레로 진군했다. 2차 칼레 공방전을 수행하고 있던 부르고뉴군은 잉글랜드군이 인근에 상륙하자 즉시 퇴각했다. 1437년 3월, 존은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동부 국경지대의 소장이자 베릭 성주를 맡아 1년간 수행했으며, 그 대가로 5천 파운드의 급여를 왕실로부터 지급받았다. 1438년 칼레와 긴느의 방어를 강화하는 임무를 맡아 다시 프랑스로 갔고, 1439년 요크 대주교 존 켐프와 함께 칼레 인근에서 열린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상에 참석했다.

1441년 여름 노리치에서 발생한 폭동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존인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과중한 세금에 분노한 노리치 주민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노리치 시는 특권을 박탈당했고, 그는 왕실의 지시에 따라 존 클리프턴을 노리치의 대장에 선임했다. 1443년 3월 5일 추밀원은 그동안의 공헌에 감사를 표했으며, 3월 11일 노퍽 공작 칭호에 대한 왕실 특허를 부여했다. 존은 1446년 10월 로마 및 유럽 대륙의 다른 성지로 순례를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메인을 넘겨받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프랑스 주재 사절단에 합류했다.

존은 노퍽 및 서퍽을 아우르는 이스트 앵글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지만, 1415년 서퍽 백작, 1448년 서퍽 공작을 맡고 있던 윌리엄 드 라 폴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1435년, 존의 부관으로서 프램링엄 성의 청지기를 맡고 있던 로버트 윙필드와 그의 부하들은 윌리엄 드 라 폴의 추종자인 제임스 앤드류를 살해했다. 존은 자신이 살인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1440년 헨리 6세의 총신이 된 윌리엄 드 라 폴은 존을 여러 혐의로 공격했고, 결국 존은 1440년과 1448년에 2차례 투옥되어야 했다. 존은 10,000 파운드라는 막대한 금액을 보석금으로 지불하고 이스트 앵글리아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겨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존이 손을 뗀 사이, 윌리엄 드 라 폴은 이스트 앵글리아 내 존의 영지민들을 마음껏 수탈했다.

1443년, 로버트 윙필드는 존으로부터 독립하고 존이 다른 가신에게 부여한 영지를 빼앗기로 했다. 이에 존은 군대를 모집한 뒤 레더링햄에 있던 윙필드의 집을 습격해 약탈하고 5,000파운드에 달하는 귀중품을 빼앗았다. 윙필드는 공격을 주도한 존의 가신의 수급에 현상금 500마르크를 거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후 존은 이 일로 규탄당했고, 1444년 8월에 런던 탑에 감금되어 6일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왕실은 그에게 3,500파운드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고 윙필드가 노리는 영지의 수입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존은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1447년, 윙필드는 다른 서퍽 귀족 윌리엄 브랜던과 함께 존의 추종자들을 공격하고 강탈했으며, 폭력으로 위협했다. 존은 서퍽 순회 판사 자격으로 적들에게 "왕의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이후에도 양자간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자, 1447년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여기에 제4대 메셈의 스크루프 남작 존 스크루프와의 갈등이 추가되었다. 1446년 6월, 존의 측근이었던 헨리 하워드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같은 해 6월 18일, 존은 입스위치에서 살인 재판을 심리하기 위한 배심원 구성을 개인적으로 감독해, 배심원 구성원 중 최소 5명을 자신의 주민으로 세웠다. 그는 이를 통해 존 스크루프가 헨리 하워드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하인들에게 내렸다는 판결이 내려지게 하려고 했다. 이에 스크루프는 존의 행동이 악의적이라며 왕에게 청원했고, 헨리 6세는 사건을 종결하라고 명령했다. 존은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라야 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는 1450년까지 혼란에 휩싸였다. 존의 추종자들과 정적들간의 소규모 충돌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강도 및 살인, 재산 파괴가 정기적으로 벌어졌다. 존은 왕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간수들에게 살인자를 석방하도록 강요했으며, 다른 카운티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정적들을 비난하고 이를 근거 삼아 정적의 재산을 압수하기도 했다. 1450년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노르망디 상실의 책임을 지고 실각한 뒤 추방형에 처해졌다가 도중에 피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정적들이 이스트 앵글리아에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가 그 일대를 장악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1450년 잭 케이드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윌리엄 드 라 폴을 포함해 당시 헨리 6세가 총애했던 귀족들이 국정을 엉망으로 이끌고 노르망디를 프랑스에게 빼앗기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면서, 존을 헨리 6세의 고문이 되어 개혁을 시작할 귀족 중 한 명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존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아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함께 서퍽에 숨어있는 반군을 수색해 처단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451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50년 가을, 요크의 리처드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간의 정쟁이 벌어졌다. 그는 리처드가 자신의 인척인 점을 고려해 리처드의 편에 섰다. 1450년 10월 15일,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서 리처드와 만난 존은 11월 6일에 의회를 소집한 뒤 어떤 기사가 노퍽 카운티를 대표해야 하는지를 함께 결정했다. 이후 대규모 무장 수행원을 모은 뒤 리처드를 지원하기 위해 런던으로 달려갔으며, 뒤이어 리처드, 데본 백작 토머스 코트니와 함께 의회 기간 동안 런던 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2월 1일, 존의 부하들은 리처드의 수행원들과 함께 블랙프라이어스에 있는 에드먼드 보퍼트의 집을 공격했고, 에드먼드 보퍼트는 런던 탑으로 피신했다. 의원들은 에드먼드 보퍼트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 리처드를 왕좌의 조건부 상속자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헨리 6세는 둘 다 거부했다.

1452년 2월, 리처드는 왕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는데다 랭커스터 왕조 지지자들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서 이에 대응하자, 결국 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군대를 해산한 뒤 사면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존은 리처드에 가담하지 않고 헨리 6세의 군대에 가담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200파운드와 수려한 컵을 받았다. 그러던 1453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를 순행하던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인해 무력화되자, 존은 의회에서 에드먼드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면서 그가 노르망디 공국과 가스코뉴 공국의 손실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후 에드먼드 보퍼트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리처드는 호국경이 되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존에게 별다른 지위를 내리지 않았다. 1455년 1월 정신을 가까스로 차린 헨리 6세는 리처드를 호국경에서 해임하고 에드먼드를 석방시켰다. 존은 이 상황을 보고 자신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다른 영주들과 함께 정치에서 물러나 영지에서 잠자코 지냈다.

2.4. 장미 전쟁 시기의 행적

1455년 5월 말, 헨리 6세는 레스터에서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의회를 소집하는 목적이 리처드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리처드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네빌 가문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모은 뒤 5월 22일 레스터로 가던 길에 세인트 올번스 마을을 통과하고 있던 헨리 6세와 수행원들, 그리고 군대와 마주쳤다. 이후 양자간의 평화 협상이 오가던 중, 리처드가 에드먼드 보퍼트를 처형하라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갑자기 기습 공격을 감행해 왕실군을 물리치고 에드먼드 보퍼트를 죽이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이 당시 존은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전령을 보내 양자간의 협상에 참여하게 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깃발을 던지고 도망친 왕실 기수 필립 웬트워스를 "제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존은 사건 전개에 대해 무심하게 대했다. 그는 1455년 요크파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1458년 양자간의 공식 화해가 이뤄진 자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457년 8월에 국왕에게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브르타뉴, 피카르디, 쾰른, 로마, 예루살렘 등 다양한 성지로 순례를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순례를 떠났는지는 불분명하다.

1459년 요크의 리처드와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 등이 다시 군대를 일으켰을 때, 존은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군이 참패한 뒤 요크의 리처드와 리처드 네빌이 해외로 망명한 후, 코벤트리에서 의회가 소집된 뒤 요크의 리처드를 추종하는 자들을 반역자로 선언했다. 존은 이 의회에 참석했으며, 12월 11일 다른 영주들과 함께 헨리 6세의 어린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왕좌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1460년 2월, 그는 리처드 네빌의 상륙을 막기 위해 노퍽과 서퍽에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수행했다.

1460년 여름, 리처드 네빌은 켄트에 기습 상륙했다. 이에 존은 입장을 정 반대로 바꿔서 리처드 네빌을 지지했고,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10월 의회에서 요크의 리처드가 국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영주들에 가세했다. 그들은 리처드가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라는 건 인정했지만, 헨리 6세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요크의 리처드가 헨리 6세의 왕위 계승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1460년 12월, 요크의 리처드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1]은 랭커스터 왕조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존은 런던에 남아있었다. 이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가 인솔한 랭커스터군이 런던으로 진군하자, 존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함게 이에 맞서 싸우고자 세인스 올번스로 향했다. 그러나 1461년 2월 17일에 벌어진 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군은 참패했다. 이후 그와 리처드 네빌은 런던으로 돌아갔고, 3월 3일 베이너드 성에서 열린 요크 가문의 영주 회의에 참석한 뒤 요크의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를 국왕 에드워드 4세로 받들기로 했다. 다음날 존은 에드워드 4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석했다.

한편 랭커스터군은 런던으로 진군하지 않고 다시 북부 카운티로 이동했다. 존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북상한 에드워드 4세를 위해 병력을 모으고자 이스트 앵글리아로 갔다. 3월 17일 캠브리지에서 사촌이자 가신인 기사 존 하워드 및 그의 부하들과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본대가 3월 29일 타우턴 마을 인근에서 랭커스터군과 격돌할 때 좀처럼 나타나지 못했다. 그가 지연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동원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고, 질병에 걸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타우턴 인근인 폰테프랙트에 이르렀을 때 존 하워드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성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는 질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요크군은 타우턴 전투에서 좌측면 부대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했다간 궤멸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 정오 무렵에 노퍽 공작의 군대가 뒤늦게 당도했고, 즉시 랭커스터군의 오른쪽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랭커스터군은 도주하다가 많은 이들이 추격자들의 무기에 맞아 죽거나 코크 강과 바르프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 왕비는 탈출했지만, 그들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리하여 승리를 거머쥔 에드워드 4세는 1461년 6월28일 런던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존은 이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동안의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7월 11일에 트렌트 남쪽 왕실 숲의 관리인 밎 대법원장 직위를 받았으며, 8월 12일에 스카버러 성 순경직을 받는 등 수익성이 높은 직위를 잇따라 받았다.

이렇게 왕의 든든한 지원을 얻게 된 존은 기세를 몰아 이스트 앵글리아를 자신의 손아귀에 온전히 놓이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지난날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군 사령관이었던 존 파스톨프로부터 노퍽의 카이스터 성을 물려받은 존 파스턴과 심한 갈등을 벌인 끝에 카이스터 성을 몰수했다. 그러나 그 직후인 1461년 11월 6일 46세의 나이로 노퍽셔 셋퍼드에서 급사했고, 셋퍼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이후의 이야기

존 모브레이는 1437년에 외 백작 윌리엄 부르시에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장녀인 앤의 딸인 엘레노어와 결혼해 외아들 존을 낳았다. 존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모든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았지만, 1476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존의 외동딸 앤이 다섯살의 나이에 노퍽 여공작이 되었고,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둘째아들인 슈루즈베리의 리처드와 앤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앤은 9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들의 후손들, 즉 가신인 존 하워드[2]와 제2대 버클리 남작 윌리엄 버클리[3]는 상속권을 주장했지만, 에드워드 4세는 노퍽 공작의 상속인은 앤의 남편이자 자기 아들인 리처드가 되어야 하며, 리처드가 자녀를 낳지 못하면 그때서야 그들이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하워드와 버클리는 리처드 3세가 등극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모브레이 가문의 영지를 그들 사이에 나누게 해달라고 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존 하워드는 초대 노퍽 공작이 되었고, 윌리엄 버클리는 초대 노팅엄 백작이 되었다. 특히 존 하워드는 ‘런던탑의 왕자들’ 에드워드 5세와 슈루즈베리의 리처드를 죽인 범인으로 의심받기도 하는데, 슈루즈베리의 리처드가 모브레이 영지에 대한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가 영지와 작위를 하사했기 때문에 존 하워드는 리처드 3세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고, 그와 함께 보스워스에서 전사했다. 반면 윌리엄 버클리는 헨리 7세에게 줄을 갈아타는 데 성공해 후작으로 승급되기까지 했다. 이후 윌리엄 버클리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노팅엄 백작위는 왕실로 돌아갔고, 존 하워드의 후손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작가로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 '킹메이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버지다.[2]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 마가렛과 기사 로버트 하워드의 아들이다.[3]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 이사벨라와 초대 버클리 남작 제임스 버클리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