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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2:09

레콩키스타/연표


1. 개요2. 배경3. 이슬람 정복4. 전개
4.1. 후우마이야 조의 설립4.2. 국가들의 성립4.3. 북서부 전역

1. 개요

서기 8~15세기 이베리아 반도 (히스파니아)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의 과정을 정리한 문서.

2. 배경

3. 이슬람 정복

4. 전개

4.1. 후우마이야 조의 설립

4.2. 국가들의 성립

4.3. 북서부 전역


[1] 29일, 30일이란 기록도. 병력 7천이라고도. 대부분 베르베르인, 무사의 삼남 마르완과 사남 압둘 아지즈 등 소수의 아랍인 대동.[2] 본래 타리크와 톨레도에서 합류 예정. 타리크는 세비야 놔두고 북상했었음.[3] 발렌시아, 무르시아, 알리칸테, 로크라 등지의 종교적 자유 및 자치. 다만 연공 바치고 이슬람의 적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조건.[4] 로데릭의 잔존 병력 집결하여 결사 저항, 승자 없는 소강전 이어감. 결국 세우타 출신의 7백 병력이 기독교도 원군으로 위장해 입성, 성문 장악하고 우마이야 군대가 돌격하여 겨우 점령함. 이후 군대 양분, 대다수는 자신과 톨레도의 타리크와 합류해 월동. 나머지는 아들 압둘 아지즈에게 주어 세비야의 봉기 진압하게 함.[5] 사라고사 점령 시에 아킬라 2세 전사, 아들 아르도가 셉티마니아에서 왕위 이어감.[6] 그 전에 타리크가 다마스쿠스에 보낸 사절 무기트 알 루미가 돌아와 소환 명령을 알렸으나 방치해 두면 서고트 측이 반격할 것을 직감한 무사는 귀환을 미루고 북부 비스케이 만에 다다른 후에야 세비야로 돌아와 타리크가 먼저 떠난 후에 귀환. 장남 압둘라에게 이프리키야 총독위, 차남 압둘 말리크에겐 탕헤르와 세우타,, 사남 압둘 아지즈에게 안달루스 총독위 맡김. 마지막 원정에서 나바라,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등지가 점령되나 피레네 산맥 중부와 칸타브리아는 남겨져 후환이 됨.[7] 4백여 관료들과 당도했다고 함. 반도 남부에 카디 (재판관) 파견하고 세금 체제 확립하는 등 지배 확고히 함, 베르베르 군인들이 임의로 차지한 재물 반환케하고 그외의 불법적으로 몰수된 토지 원주인에게 돌려줌[8] 칸타브리아 산지의 아우베사 산에 위치한 동굴 앞에서 벌어짐[9] 이후 나르본은 아르부나로 명명되어 프랑스 진군 위한 전초기지가 됨.[10] 카르카손은 기습으로 점령되었고 님은 항복, 복속의 뜻으로 인질 보냄. 인질은 바르셀로나로 후송됨[11] 아키텐의 오도는 카를 마르텔의 위협에 맞서느라 (사위?) 세르다냐의 우스만 이븐 나이사 (무누자) 돕지 못함.[12] 진압 후 압둘 라흐만은 곧장 피레네 넘어 가스큐뉴 진군, 오슈 점령하고 보르도 (알 부르딜) 기습 점령. 후자 수비대장 전사. 한편 안달루스 군대가 가스코뉴 일대 수도원 약탈하는 동안 오도는 군대 재정비하고 카를 마르텔에게 복속, 지원 요청[13] 지휘관은 후에 총독이 되는 유수프 이븐 압둘 라흐만[14] 아를의 무슬림 수비대가 프랑크 군에 반격한 것에 대한 보복 겸 다시 무슬림들의 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전소됨[15] 카를 마르텔, 지원군마저 격파하였으나 공성병기 부족해 철수함[16]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 터진 베르베르 반란 소식에 코르도바로 귀환[17] 베르베르 반란에 맞서 시리아에서 파견된 쿠틀룸은 그들을 과소평가하고 바그도우라 전투에서 대패, 부관 발즈가 남은 병력과 세우타로 피신. 베르베르 군에 포위당한 발즈는 수차례 압둘 말리크에게 대피 위해 선박 파견해 줄 것을 청했으나 묵살당함. 한편 갈리시아 등지의 베르베르 인들도 봉기, 톨레도 위협. 코르도바까지 위기에 처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압둘 말리크는 도움 얻기 위해 반란 진압 도운 후 안달루스 떠나는 조건으로 선박 보내 시리아 군단 들여옴[18] 우선 740년 갈리시아 등지의 아랍 주둔군 철수, 이듬해엔 베르베르 인들도 그곳 떠나 남하. 톨레도, 코르도바, 지브롤터의 3개 방면으로 진군. 이 틈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영토 확장 개시. 패배한 베르베르 인들이 돌아왔지만 750년의 대가뭄 때에 고향 마그레브로 탈주하자 인구 불리는 것에서 나아가 정착[19] 톨레도 포위하던 베르베르 군은 압둘 말리크의 아들이 격파, 지브롤터 향하던 베르베르 군은 발즈가 알 헤시라스에서 격파. 이후 압둘 말리크는 약속대로 발즈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나 발즈는 대신 코르도바로 진군함[20] 우마이야는 압둘 라흐만 이븐 하빕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병력과 거병, 패한 후 북부로 도주해 재규합[21] 모든 전투 중단시키고 시리아 군을 해산, 대신 그들에게 봉토를 나눠주었음. 출신별로 다마스쿠스는 그라나다, 홈스는 세비야와 니에블라, 킨나스린은 하엔, 요르단은 말라카, 팔레스타인은 시도니아와 헤레스, 콥트인들은 베자와 무르시아 등 주로 남부에 영지를 하사하며 소득 1/3을 세금으로 내되 필요할 때 군역을 질 것을 조건으로 둠[22] 730년대 나르본 태수 지내며 여러 차례 남부 프랑스 습격한 인물, 이프리키야 총독 압둘 라흐만의 아들이자 알 수마일의 장인. 등극 도움 대가로 알 수마일에게 톨레도, 후에 사라고사에 반독립적인 지배권 하사[23] 유수프 휘하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모트릴 부근의 외진 곳에 상륙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