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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2:02:10

펠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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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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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layo
생몰년도 미상 ~ 737년
출생지 미상
사망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칸가스 데 오니스
재위
기간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718년 - 737년
아버지 파빌라
배우자 가우디오사
자녀 파빌라, 에르메신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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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 초대 국왕이자 현 스페인 왕실의 시조.

2. 생애

펠라요의 생애와 경력에 대한 주요 기록은 9세기 후반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쓰여진 2편의 라틴어 연대기이다. 첫번째는 880년대에 집필된 알베덴세(Albeldense) 연대기로, 고대부터 9세기까지 히스파니아의 역사를 다뤘다. 또 하나는 10세기 초에 집필된 알폰소 3세 연대기로, 2개의 사본이 전해지는데 몇 개의 주요 구절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디체 드 로다(Códice de Roda)는 나바라 왕국과 인근 국가들에 대한 고대 사본이 들어있는데, 여기에도 펠라요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나마 들어있다.

알베덴세 연대기에 따르면, 펠라요는 서고트 왕국 갈리시아 공작이었던 파빌라의 아들로, 파빌라가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하다가 새 국왕 위티자에게 살해되자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고 한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펠라요는 친다수윈트의 손자이며, 아버지 파빌라는 위티자에 의해 코르도바에서 눈이 멀었고 펠라요 본인은 톨레도에서 추방되어 아스투리아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며,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토착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우선, 그들은 펠라요(Pelayo)가 게르만어가 아니라 라틴어 팔라기우스(Pelagius: 해양)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원이 로마화된 히스파니아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알폰소 3세 연대기에는 펠라요의 모계 증손자인 알폰소 2세가 증조부로부터 산타 마리아 데 텐시아나 교회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펠라요가 중앙 정계에 있다가 숙청을 피해 아스투리아스로 망명했다면 이런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며, 펠라요의 집안은 옛날부터 아스투리아스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일부 아랍 연대기에서는 펠라요를 'Belay al-Rumi', 즉 '로마인 펠라요'라고 지칭하는데, 이 역시 그가 고트인이 아니라 로마인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은 억측이라고 간주한다. 기독교와 무슬림을 포함한 많은 출처에서 펠라요의 기원을 고트인으로 밝혔으며, 고트인과 로마-히스파니아인이 섞여 산 지 수백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름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아랍 문헌에서 언급되는 'Rumi'라는 단어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방인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펠라요가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더라도 아스투리아스에 재산을 별도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단순히 이것만 가지고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원주민 출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학자들은 펠라요가 서고트 왕족일 가능성은 기록상 모순된 점이 많아서 높게 볼 수 없고, 레콩키스타의 발판을 마련한 그를 후대에서 미화하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은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크 왕이 지휘하는 서고트 왕국군을 괴멸시키고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를 거의 석권했다. 하지만 딱 한 지역만은 복속되지 않았으니, 바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 산맥이었다. 9세기 경 익명의 모사라베(Mozarabs: 무슬림이 통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그리스도교인)의 기록에 따르면, 서고트인들은 이 지역으로 피신한 뒤 718년경에 펠라요를 지도자로 선출했다고 한다.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 칸가스 데 오니스에 본부를 세우고,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봉기를 선동했다.

720년,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투입되어 아스투리아스 산맥을 장악하였고, 펠라요는 여러 차례 패배한 뒤 산 속 깊숙이 숨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병력은 아마도 3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침략군이 세운 숙영지를 종종 습격하고, 보급물자를 싣고 가던 마차를 탈취하고, 고급 장교를 암살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때마침 이슬람 지배자들이 지즈야를 2배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신자들이 호응하였고, 아스투리아스 일대를 다스리던 무슬림 관리는 안전을 위해 피신해야 했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엔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군을 파견한 왈리(wali: 아랍인 주(州) 장관) 움바사 이븐 수하임 알 카르비는 패배로 인해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722년 여름, 우마야드 왕조군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가 진압군을 이끌고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출동했다.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됐는 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펠라요와 그의 소규모 부대는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다가 코바동가 마을 인근의 좁은 계곡에 숨었다. 그곳은 길이 무척 좁고 지형이 험준해서,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공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펠라요는 이곳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슬람군이 협곡에 들어서자, 협곡 양쪽에 숨어 있던 펠라요의 전사들이 화살을 퍼부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슬람군은 급히 퇴각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고트족 군대에 의해 거의 궤멸되었다. 지휘관 알 카마 본인은 퇴각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코바동가 전투 소식을 접한 아스투리아스 산맥 거주민들은 펠라요의 군대에 즉시 가담했다. 펠라요는 여세를 이어가 고원을 행진하던 무누자의 군대를 습격했고, 무누자는 올라리스에서 전사했다. 이후 펠라요가 히혼 시에 무혈 입성하자, 인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펠라요의 군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아랍군의 예상되는 보복에 대처하기 위해 히혼 대신 기존에 본부로 삼았던 칸가스 데 오니스에 궁정을 세우고 산악 지대에 은신한 채 아랍군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그는 19년간 통치하다가 737년 칸가스 데 오니스에서 사망했고, 아내 가우디오사가 묻혔던 아바미아 마을에 위치한 산타 에우렐리아 성당에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유골은 훗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에 의해 코바동가의 성스러운 동굴(Santa Cueva de Covadonga)로 이장되었다.

펠라요는 가우디오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 파빌라와 딸 에르메신다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파빌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딸 에르메산다는 칸타브리아 공작 페드로의 아들 알폰수와 결혼했다. 알폰수는 훗날 파빌라의 뒤를 이어 아스투리아스 왕국 제3대 국왕 알폰수 1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