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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0:18:47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

<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
Louis Ier de Bourbon-Vendôme, comte de Vendôme
파일:Louis_Count of Vendôme.jpg
성명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 (Louis Ier de Bourbon-Vendôme)
출생 1376년
프랑스 왕국 방돔
사망 1446년 12월 21일 (향년 70세)
프랑스 왕국 투르
배우자 블랑슈 드 루시 (1414년 결혼/1421년 사망)
잔 드 라발 (1424년 결혼)
자녀 장 8세, 카트린, 가브리엘, 장 드 부르봉(사생아)
아버지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어머니 카트린 드 방돔
형제 자크 2세, 장 1세, 이자벨, 안, 샤를로트, 마리
직위 방돔 백작, 몬뒤블로 영주, 프랑스 대의원, 프랑스 궁정의 대청지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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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방돔 백작.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라마르슈 및 방돔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와 방돔 백작 장 6세 드 방돔의 딸인 카트린 드 방돔의 차남이다. 139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방돔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카트린이 그의 섭정을 맡았다가 1403년에 통치권을 아들에게 완전히 넘겼다. 1406년, 루이는 한때 어머니의 조상이 소유했던 방돔의 몬뒤블로 영지도 구매해 몬뒤블로 영주를 칭했다. 1399년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원해, 그가 리처드 2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대립했을 때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했지만, 1407년 오를레앙 공작이 살해된 뒤 1408년 4월 17일 정신병에 걸린 샤를 6세를 대신하여 왕국의 섭정을 맡은 용맹공 장에 의해 프랑스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413년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부르고뉴파를 격파하여 파리를 장악한 뒤, 그는 그해 11월 프랑스 왕실 수석 청지기에 선임되었으며, 샹파뉴, 브리 및 피카르디 보안관을 겸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했는데, 특히 잉글랜드로 건너가 헨리 5세에게 백년전쟁을 재개하지 말고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촉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15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후, 그는 그해 10월 24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했다가 친척인 부르봉 공작 장 1세 드 부르봉과 함께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이후 런던으로 이송되어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헨리 5세는 몸값으로 100,000 에퀴에 달하는 돈을 요구했지만, 1422년 54,000 에퀴만 받고 풀어주기로 했다. 프랑스로 귀환한 뒤 헨리 5세를 샤를 6세의 후계자로 선언한 트루아 조약에 반대하고 도팽 샤를을 지지했다. 1423년 7월 31일 크라방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토머스 몬타구가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군에게 참패한 뒤 생포되었다. 이후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은 랭커스터의 존은 방돔 카운티를 그로부터 박탈하고 제6대 에레스비의 윌러비 남작 로버트 윌러비를 방돔 백작에 선임했다.

이후 감옥에 갇혀 있던 루이는 1425년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이를 기념하고자 나중에 탈출한 날을 특별 휴일로 삼고, 그 날에 죄수 한 명을 꼭 석방했다. 샤를 7세는 그가 방돔 백국을 상실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샤르트르 백작 칭호를 하사했고, 프랑스 궁정 대청지기 칙잭을 다시 맡겼다. 1429년 5월 잔 다르크와 함께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고, 1429년 루아르 원정파테 전투에 참여했다. 뒤이어 랭스 행진에 가담한 뒤 1429년 7우러 17일 랭스에서 열린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여했다. 그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기옌 공작의 역할을 맡았다.

루이는 대관식 이후 일드프랑스와 상파뉴 군대의 지휘권을 맡았고, 1429년 9월 1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1430년 5월 수아송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에 격파된 뒤 군대를 해산했다. 이 때문에 잔 다르크는 얼마 안 되는 병력만 이끌고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해야 했고, 이후 부르고뉴군에 생포된 뒤 잉글랜드에 넘겨졌다가 1431년 이단 및 마녀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1430년 10월 피에르 드 브레제가 지휘하는 군대에 가담해 콩피에뉴로 돌아와서 부르고뉴군을 물리치고 도시 포위를 해제했다. 이후 아라스 공방전을 치렀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샤를 7세간의 동맹 협약이 체결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증인 중 한 사람이었다. 1438년 샤를 7세의 딸 카트린과 부르고뉴 공작의 후계자인 용담공 샤를(당시엔 샤롤레 백작 샤를) 사이의 결혼 협상을 중재했다. 1440년 샤를 7세가 귀족들의 사병을 해체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자, 이에 반발해 장 드 뒤누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알랑송의 장 2세, 샤를 1세 드 부르봉, 도팽 루이 등과 함께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그는 왕에게 용서받았다.

1444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트루아 협약이 맺어지면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1446년, 루이는 휴전 연장을 위해 잉글랜드로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직후 중병에 걸려 1446년 12월 21일 투르에서 사망했다. 사후 방돔에 있는 생 조르주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방돔 예배당에 묻혔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