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라마르슈 백작 자크 2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Jacques II de Bourbon-La Marche, comte de La Marche | ||
이름 | 자크 2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Jacques II de Bourbon-La Marche | |
출생 | 1370년 / 1380년 | |
프랑스 왕국 방돔 | ||
사망 | 1438년 9월 24일 (향년 57~58/67~68세) | |
프랑스 왕국 브랑송 | ||
배우자 | 나바라의 베아트리체[1] (1406년 결혼/1407년 사망) | |
블루아의 마르그리트 (1412년 결혼/1413 혹은 1414년 사망) | ||
조반나 2세 (1415년 결혼/1435년 사망) | ||
자녀 | 엘레오노르[2] | |
아버지 |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 |
어머니 | 카트린 드 방돔 | |
형제 | 루이 1세, 장 1세, 이자벨, 안, 샤를로트, 마리 | |
직위 | 라마르슈 백작. 카스트르 백작, 나폴리 국왕(자칭)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라마르슈 백작, 카스트르 백작, 나폴리 국왕(자칭).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1415년부터 1419년까지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남편이었으며, 나폴리 국왕을 자칭하기도 했다.2. 생애
라마르슈 및 방돔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와 방돔 백작 장 6세 드 방돔의 딸인 카트린 드 방돔의 장남이다. 계보학자 안셀므 드 생트 마리 신부는 그가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술했는데, 이에 따른다면 1370년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 2세 르 맹그르의 회고록인 <부시코로 알려진 선한 영주 장 르 맹그르의 사실집>에 따르면, 그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여했을 때 "수염을 길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매우 젊었지만 너무나 당당하게 싸웠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틴 드 피장은 1404년에 그가 무척 젊고 친절한 기사였다고 서술했으며, 부르고뉴 궁정의 외교관이자 연대기 작가 올리비에 드 라 마르슈는 회고록에서 그가 1435년 퐁타리에에 도착했을 때 40세쯤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대략 1380년에 출생했을 수도 있다.1396년, 장 2세 르 맹그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사단에 가담해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가 조직한 십자군에 가담한 뒤 오스만 술탄국과 맞섰다. 그러나 십자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와해되었고, 그는 생포된 뒤 옥고를 치르다가 1398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1400년에서 1403년 사이에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의 명목상 국왕 루이지 2세를 대신하여 나폴리의 실질적인 국왕 라디슬라오와 대적했다. 이후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 대항하는 웨일스 반란군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를 지원할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함대는 플리머스 섬을 공략하고 약탈했지만, 잉글랜드군에게 격퇴된 뒤 1404년 귀환하던 중 폭풍으로 인해 12척의 배를 잃었다.
1406년 9월 16일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결혼해 외동딸 엘레오노르를 낳았다. 1407년 12월 14일 베아트리체가 사망한 뒤 1412년 11월 5일 팡티에브르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장 드 샤티용블루아의 딸인 블루아의 마르그리트와 재혼했지만, 마르그리트는 1413년 또는 1414년에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1415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는 일전에 나폴리 왕위를 놓고 오빠 라디슬라오와 전쟁을 벌였던 루이지 2세가 또다시 나폴리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남편 감으로 그를 정했다. 결혼식은 1415년 8월 10일에 나폴리에서 거행되었다.
조반나 2세는 남편에게 타란토 공작과 칼라브리아 공작의 칭호를 부여했지만, 왕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자크 2세는 여왕에게 끌려다니는 남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여왕의 애인인 판돌펠로를 체포한 뒤 그해 9월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데려온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나폴리를 통제했으며, 여왕을 별궁에 가두고 자신을 나폴리 왕으로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나중에 별궁에서 겨우 빠져나온 조반나 2세는 나폴리에 오자마자 오만하게 행동하는 남편에게 격분했고, 나폴리 귀족들 역시 자기들을 몰아내고 프랑스 귀족들을 정계의 핵심으로 삼아버린 것에 불만을 품었다.
1416년 9월, 조반나 2세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은 귀족들은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제압된 자크 2세는 프랑스 측근들을 돌려보내고 작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반나 2세는 조반니 카라촐로(Giovanni Caracciolo. 조반니의 애칭인 '잔니(Gianni)' 카라촐로로 불리기도 한다.)를 새 애인으로 두고, 그를 시니스칼코(siniscalco: 재상), 아벨리노 백작, 카푸아, 멜피, 베노사 등 캄파니아와 풀리아의 여러 영지의 영주로 삼았다. 1418년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크 2세는 나폴리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었다.
1424년 샤를 7세의 진영에 합류한 뒤 랑그독 총독에 선임되었지만, 몇 달만에 장 1세 드 푸아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후 라마르슈 카운티에 셀레스틴 노트르담 데 테른 수도원, 생안투안 수도원, 생트 세실 달비 수도원 등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가난한 클라라 수도회와 플란치스코 수도원의 일부 수녀원을 개혁한 공로로 1807년 성녀로 시성된 콜레트 드 코르비와 교류했다. 1438년 9월 24일 브장송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일한 합법적인 자녀인 엘레오노르는 1424년 파드디악 백작 베르나르 8세 다르마냐크의 부인이 되었다.
[1]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2] 베르나르 8세 다르마냐크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