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루이조제프 파피노 Louis-Joseph Papinea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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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7년 10월 7일 |
영국령 북아메리카 퀘벡주 몬트리올 | |
사망 | 1871년 9월 23일 (향년 84세) |
캐나다 자치령 퀘벡주 몬테벨로 | |
국적 | [[캐나다 자치령|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조제프 파피노 (아버지) 쥘리 브루노(배우자) |
학력 | 퀘벡 소신학교(Petit Séminaire de Québec)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 |
직업 | 변호사, 영주, 정치인 |
소속 | 애국자당(Parti patriote)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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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의 자유주의 정치인. 1837년 캐나다 최초의 무장봉기를 이끈 인물이다.2. 생애
루이조제프 파피노(Louis-Joseph Papineau)는 1786년 10월 7일,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본 교육을 마친 후 세인트 라파엘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특정 사건을 계기로 퀘벡 소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1804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진로를 두고 고민했으며, 처음에는 공증인이 되려 했으나 결국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몬트리올에서 사촌인 드니-벤자민 비제의 법률 사무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181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변호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했고, 1816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으며, 이 직업이 점점 더 싫어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1808년 켄트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850년대까지 몬트리올 서부, 서리, 생모리스, 되-몽타뉴 등의 선거구에서 출마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세기 초반 경제·인구·사회적 변화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자유 직업인들은 소상인들과 연대하여 전통적인 프랑스계 캐나다 기관을 수호하려 했으며, 영국계 상인·공무원·미국 이민자·프랑스계 캐나다 배신자들과 대립했다. 그러나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퀘벡을 거점으로 한 정당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후원 시스템을 통제하려는 전략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내각 책임제 개념이 부각되었고, 이에 성직자 및 봉건 귀족 가문들은 반발했다.
파피노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프랑스계 캐나다 자유주의 전문직 계층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1809년 하급 캐나다(Lower Canada, 현재의 퀘벡) 입법회의에 당선되었으며, 당시 총독 제임스 크레이그 경이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공포 통치" 시기였다. 그는 뛰어난 웅변 실력과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청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파르티 카나디앵(Parti canadien, 후에 파르티 파트리오트(Parti patriote))의 지도자가 되어, 1815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주제를 강력히 옹호했다. 1817년 그는 프티트 나시옹 영지(Seigneurie de la Petite-Nation)를 아버지로부터 매입했고, 영주로서 거주민들에게 철저한 의무 이행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당시 상인들이 필수적이라 여긴 상업 및 교통 인프라 혁신에 반대했다. 또한 반성직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의 약화가 영국계 개신교 세력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파피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민족적 유산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으며, 하급 캐나다의 정치 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 했다. 정치 초반에는 영국 의회 제도를 존중하는 온건한 입장이었으나, 1820년대부터 점차 급진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는 의회의 세입과 공무원 임금 지급 권한을 이용하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한 영국계 상업 계층의 정책을 견제했다.
1823년, 그는 1822년 연합법안의 저지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해당 법안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결국 부결되었다. 이는 개혁 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영국계 엘리트 관료 집단인 샤토 클리크가 장악한 의회를 개혁하려 했다. 1830년경에는 비선출직 입법회의를 강하게 비판했고 1832년에는 자신을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며, 하급 캐나다의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830년 이후 파피노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며 토머스 제퍼슨과 잭슨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북미를 소규모 토지 소유자 공화국의 발전에 적합한 장소로 보았으며, 1833년 연설에서 "캐나다는 기후가 혹독하고 가난하지만, 법과 관습이 항상 재산의 평등한 분배를 지지하며, 장자상속의 특권을 배척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적 사상과 영주 제도를 조화시키려 했으며, 애국당 지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과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1834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후, 그는 더욱 강경한 정치 전략을 추진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실질적 권력 확보를 위해 개혁을 요구하며 "92개 결의안(Ninety-Two Resolutions)"을 작성했다. 이는 입법부의 세입 통제권, 행정부 책임제 도입, 상원의 선출 등을 포함한 개혁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837년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1837년 10월 23일, 생샤를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연설하며 "6개 군의 독립 선언"을 지지했고, 무력 투쟁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는 1837년 반란으로 이어졌으나 생샤를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미국으로 피신했다. 1839년 두 번째 반란마저 실패하자 뉴욕을 거쳐 파리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망명 후 그는 반란 가담을 부인했으나, 당시 기록에 따르면 생드니 전투 직전까지 반란군을 지휘한 최고 사령관이었다. 전투 직전에 사라진 그의 행적 때문에 동료들조차 그를 비겁자라 비판했다.
1845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빈곤 속에 살았으며, 국립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에서 프랑스 시대 문서를 복사하며 생활했다.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했으며,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캐나다로 돌아갔으며, 1845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요청에 따라 망명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한 그는 먼저, 자신의 영지에서 벌목권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했으며, 빚을 진 거주민들의 노동을 이용해 몬테벨로에 호화로운 대저택을 건설했다.
1848년, 그는 다시 정치에 복귀했으나 프랑스계 지도자인 루이 라퐁텐과 대립했다. 1841년 연합법을 강력히 반대하며 오히려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했다. 그의 주위에는 자유주의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했으나, 결국 1854년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그는 1871년 9월 23일, 퀘벡주 몬테벨로에서 사망했으며, 5일 후 가족 영묘에 묻혔다.
3. 활동
연도 | 선거 구역 | 직책 | 결과 |
1812 | 퀘벡 | 입법회의 의원 | 당선 |
1816 | 퀘벡 | 입법회의 의원 | 재선 |
1820 | 퀘벡 | 입법회의 의원 | 3선 |
1830 | 퀘벡 | 입법회의 의원 | 4선 |
1834 | 퀘벡 | 입법회의 의원 | 5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