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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서강성 정부주석 | ||
정체 | 劉文輝 | |
간체 | 刘文辉 | |
한국식 독음 | 유문휘 | |
영문 | Liu Wenhui | |
호 | 병우(病虞) | |
자 | 자건(自乾) | |
출생 | 1895년 1월 10일 청나라 사천성 대현 | |
사망 | 1976년 6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바오딩 군관학교 | |
직업 | 정치가, 군인 | |
서강주석 재임기간 | 1939년 1월 1일 ~ 1949년 12월 8일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사천성의 군벌로 류샹과 사천성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으나 이류지전에서 패배하였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공산당에 투항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류원후이는 1895년 사천성 다이현에서 태어났는데 다이현은 류샹을 비롯하여 사천군벌들의 주요 장령들을 다수 배출한 곳이었다. 류원후이는 사천육군소학교, 섬서성 서안육군중학, 베이징육군 제1 중학을 거쳐 1916년 바오딩 육군군관학교를 2기로 졸업했고 이후 사천으로 돌아와 사천군 제2사단의 유존후 부대의 참모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조카이되 나이는 7년 연상이었던 류샹은 자신의 친척인 류원후이를 후원해주었고 류샹의 추천으로 류원후이는 사천군 8사단장 진홍범 밑의 영장 자리를 얻었다. 류원후이는 진홍범 밑에서 연장, 단장, 여장으로 고속승진을 거쳤고 1921년 류샹이 사천성장 겸 사천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자 류샹은 류원후이를 총사령관 직속 제1혼성여단 여단장으로 전임시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해주었다.1922년 류샹이 하야하고 유성훈이 그 후임으로 계임할 때도 류샹은 류원후이를 유성훈과 뢰심휘 등에게 적극 추천하였다. 이에 류원후이는 제9사단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이후 류원후이는 바오딩군관학교 동학인 등석후, 전송요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청두를 점령하여 공동관할했고 이들은 류원후이를 중심으로 뭉쳐 단결할 것을 선언했지만 수면 밑에서는 등석후와 전송요가 류원후이의 성장을 경계해 비밀리에 합작했다. 류원후이는 1924년부터 대대적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1925년 사천군벌 양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던 중 우페이푸가 류샹의 공직을 해임하려 하자 류샹은 1926년 8월 13일, 뢰심휘, 유성훈, 류원후이와 함께 우페이푸 타도를 통전하며 국민당 옹호를 선포했고 뢰심휘의 대표 장독륜이 국민혁명군 8군 군장 탕성즈와 바오딩 군관학교 동기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장독륜이 대표가 되어 국민정부와 협상했다.
1926년 11월, 국민혁명군 무창행영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명의로 류샹, 뢰심휘, 유성훈, 류원후이를 각각 21,22,23,24군장에 임명했다. 뢰심휘와 유성훈은 11월 26일 취임통전을 발표했지만 류샹과 류원후이는 잠시 취임을 유보하였다. 류샹의 경우, 왕릉기 등의 심복이 국민혁명군 가담을 반대했으며 류샹 본인도 군장의 직위를 불충분하다고 여겨 자신에게 사천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할 수 있는 직위를 요구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는 군장 이상의 직위가 없어서 국민정부로서는 그에게 그러한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북벌의 대세가 국민당에게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류샹은 12월 17일 충칭에서 21군 군장에 취임했다.
류원후이의 경우, 자신의 동맹자인 등석후, 전송요 등과 상의하지 않고 군장에 취임하는 것은 이들의 오해를 살 일이라 여겨 12월 24일 장제스에게 등석후와 전송요 역시 군장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한 후 12월 27일 청두에 삼군의 민정, 재정, 군정 통일을 위해 연합부대를 조직하고 삼군연합사령부를 설치했다. 장제스가 류원후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류원후이는 1927년 1월 1일 24군 군장에 취임하여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물론 사천군벌들이 국민당에 합류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세에 순응하여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2.2. 사천의 패자
1927년 6월, 류원후이는 서강성을 지배하던 유성훈을 공격했다. 7월 12일 유성훈은 하야를 통전했고 류원후이는 서강성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1928년 사천성의 장령들을 류원후이를 사천성 정부 주석으로 추대했으며 난징정부로퉈 서강의 민재정을 통괄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류원후이는 학교를 설립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 서강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소수민족과의 화해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서강성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류원후이보다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3세였다.1929년 국민정부는 류원후이를 사천성 정부주석에, 류샹을 군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29년 1차 장풍전쟁과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반장전쟁에 가담했던 펑위샹이 류원후이에게 공개적으로 반장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1930년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이 장제스에 대항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류원후이는 베이핑에서 열린 확대회의에 호응하는 통전을 보내 왕징웨이 등 개조파 지지를 선언했지만 반장세력이 패배하자 즉각 장제스와 난징 국민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줄을 갈아탔고 일본 제국의 침략과 중국공산당의 폭동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던 중앙정부는 류원후이를 용서하여 1931년 1월 성정부 개조 시에 다시 사천성 정부주석으로 재임명하고 민정청장을 겸하게 했다. 1932년 시점에서 류원후이는 청두를 중심으로 사천성의 147개 현 중 68개 현을 지배하여 사천성 제1의 세력이 되었고 그 휘하 병력은 12만으로 늘었다. 류원후이는 주요 곡창지대와 상업지대를 대부분 점령하여 가장 풍족한 재정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1932년 이후부터 중앙정부의 사정이 나아지면서 난징 정부는 사천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중원대전에서 중앙을 옹호하고 초공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사천성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류샹을 사천성의 지배자로 낙점하고 그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1931년 6월,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류샹은 국민정부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충칭을 점령한 이래 국민혁명군 21군 군장으로 임명되어 안정적으로 충칭을 통치하며 다양한 재원 개발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한편 류원후이는 조세 수취에 있어서 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에 곧 민중의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다.
2.3. 이류지전과 건성운동
1928년 이후 류원후이는 서강성에 대한 확장을 시작했으나 1930년 중국-티베트 전쟁에 휘말리게 되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3세의와의 국경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32년 9월 이류지전이 발발하면서 전송요, 등석후 등이 류샹에게 가담하고 티베트군의 협공까지 이어지면서 류원후이는 궁지에 밀렸다. 1933년 2월 이류지전은 일시 정전되었으나 4얼에 재개되어 결국 류원후이는 8월에 완전히 패배, 청두를 내주고 서강성으로 철수하였다. 한때 사천 내부 최고 세력이었던 류원후이는 6개 현, 150만의 인구만을 지배하는 군소세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국민정부는 류샹을 견제할 겸 1934년 서강건성위원회를 설립하고 1935년 류원후이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1935년 6월, 사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사천성정부는 서강행정독찰구를 편제하여 류원후이에게 관리하게 했고 류원후이가 지배하던 상당수 지역을 사천성 정부에 귀속시켜 류원후이의 지배 인구는 30만으로 떨어졌고 휘하의 24군을 먹여살리는 것조차 벅차게 되었다.류원후이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건성운동을 전개하여 국민정부에 수원성, 차하얼성의 건성 사례를 참고하여 서강성 건성과 그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행정원장 왕징웨이는 적극 지지했으나 장제스는 류샹이 서강성 건성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장궈타오 등 제4차 초공작전에 쫓겨 사천성 북부로 피신한 홍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사천성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류샹을 흔들기는 내부 정황상 무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류샹이 한커우에서 사망하면서 급변했다. 국민정부는 장췬을 사천성 정부주석에 임명하고 1월 25일 행정원 명의로 서강건성위원회를 개조했다. 류샹이 죽자 왕릉기, 반문화, 왕찬서 등의 군인과 등한상 등의 토착 문관세력들이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다. 이때 사천성 정부주석 자리를 노리던 전 44군 군장 왕찬서는 류원후이와 연계하기 위해 류원후이에 대한 재정지원과 사천성 서부 지역의 서강성 할양을 제안했다. 이어 왕찬서는 성정부 주석을 대리하게 되었고 1938년부터 류원후이는 실질적인 건성에 착수했다. 1938년 4월, 류원후이는 우한에서 장제스를 만나 재정 개조, 교통 개조 등을 논의했고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류샹 사후 혼란스러운 사천성을 안정화하기 위해 이를 수락했다. 1938년 8월, 왕찬서는 사천성 정부주석에 정식으로 취임했고[1] 1938년 11월 28일 행정원은 서강성 건립을 비준하여 1939년 1월 1일 서강성을 건립했다. 류원후이는 서강성 정부주석에 취임, 정식으로 서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류원후이는 자신이 신뢰하는 군관과 친척들을 중심으로 서강성을 강력하게 통치했으며 중일전쟁에도 힘이 닿는 대로 상당히 협력하여 류원후이 치하에서 서강성은 상당한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구가했다. 하지만 북벌 때와 마찬가지로 류원후이의 항전 협조는 어디까지나 기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1949년까지도 서강성은 반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2.4. 국공내전
류원후이는 장제스에게 어느 정도 협력하면서 반장세력과의 연계를 유지했고 1944년에는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던 중 1946년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국민정부가 멸망의 위기에 몰리자 류원후이는 사천성의 덩시허우(등석후), 판원화(반문화)와 결탁하여 1949년 12월 8일 기의를 일으켜 중화인민공화국 합류를 선언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 겸 사천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자리를 그에게 맡겼다.이후 1957년 서강성이 폐지되어 사천성에 합쳐졌고 류원후이는 1958년[2] 임업부 장관에 임명되어 서강성에서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지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군병원에 비밀리에 입원하여 홍위병들의 조리돌림을 피할 수 있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치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우언라이에 대한 조의를 표했으며 몇달 후인 1976년 6월 24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1930년대 軍政機構 設立을 통해 본 中央과 四川, 김희신, 중국학보 52권, 한국중국학회.
- 국민정부시기 劉文輝와 川康 政治, 김희신, 중국학보 56권, 한국중국학회.
- 川北 剿共을 계기로 한 四川의 政治統合과 그 意味, 김희신, 동양사학연구 89권 89호, 동양사학회.
- 四川省 防區體制와 地域統治 : 21軍 防區의 團務 改革을 중심으로, 1926~1934, 김희신, 중국근현대사연구 18권,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