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37년 11월 26일 태어났다.1954년 6월 조선인민군에 입대, 제대한 이후 1959년 9월 평안남도 성천군 민청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당중앙위원회 배치에 탈락하였다. 이에 좌절하여 기숙사에 남아 있는데 김정일이 그를 눈여겨보고 그를 직접 발탁하여 당중앙위원회에 배치했다. 1971년 7월, 중앙위원회 과장에 임명, 이후 부부장을 거쳐 부장으로 승진했다. 북한의 선전을 보면 "그는 당에서 바라는 다방면적인 일군으로 준비하기 위해 매일같이 일기도 쓰고 시도 썼으며 우리 나라 문학작품은 물론 세계문학작품과 명언집, 속담집, 세계적인 인물들의 개인자료집 지어는 아이들의 동화와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라고 하는데 문화예술 관련 쪽에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김인태의 논문에 따르면 문서정리실장을 역임했다. 1973년 12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4년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수행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당선되었으나 1987년 8월 14일, 불과 만 4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예술 애호가인 김정일과 죽이 잘 맞았는지 김정일은 리경선이 죽은 후에도 그는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직한 혁명전사이며 능력있는 일군이었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황장엽 회고록에도 이름 없이 직함으로만 잠시 언급되는데, 김일성의 신년사 작성을 도맡아 하였고 췌장염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후임 문서정리실장으로는 황장엽이 임명되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특히 김정은 시대에도 과거의 대표적 충신으로 꼽히면서 소개편집물이 제작되는 등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3. 여담
리경선의 아들 리성국은 나중에 조선인민군 군단장을 지냈다.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